[난중칼럼] 검찰은 '윤석열 내란' 수사에서 손을 떼라
2024년 12월 06일 20시 25분
국내 최고령 항일독립운동가 구익균 옹이 지난 8일 타계했다. 향년 105세. 구익균 선생은 일제강점기 도산 안창호 선생의 비서실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독립운동가 양성과 후원에 힘썼다.
광복 직후, 상해에 남은 교민 3000여명의 귀국을 돕기 위해 당시 미화로 60만 달러의 사재를 털었던 일화는 구익균 선생의 품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광복 이후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대공주의(大公主義) 사상을 계승하며 진보정당 활동에 참여했다. 일평생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정작 본인의 가정사는 제대로 챙기지 못한 그였다.
당연히 국립묘지에 안치될 것이라는 유족들의 기대와 달리 국가보훈처는 구익균 선생의 현충원 안장을 불허한다고 통보했다. 유신정권 때 있었던 두 번의 집행유예 판결이 이유였다. 유족들과 제자들은 형식적인 기준만 적용한 처사라며 반발하고 있다.
현충원 안장은 독립유공자들에게 돌아가는 마지막 명예다. 하지만 지금 현충원에는 반민족, 반민주 행위를 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들도 다수 묻혀있다.
일제강점기, 친일과 항일이라는 갈래 길에 섰던 사람들. 시간이 지나 일신의 안위를 쫓았던 이들은 과거의 행적에 대해 함구한 채 양지 바른 곳을 찾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은 묻힐 곳을 찾지 못하는 현실. 규정대로 했으니 아무 문제없다는 보훈처의 입장에서 역사와 정의는 찾아 보기 힘들다.
지난 8일, 최고령 독립유공자 고 항산 구익균 선생이 영면에 들었습니다. 향년 105세.
고인이 세상에 남긴 것은 여행용 가방 두 개에 든 옷가지와 낡은 책들이 전부였습니다.
그의 유품 중 눈에 띄는 것은 고인이 평생 곁에 두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진이었습니다.
1928년, 신의주 학생 항일운동의 주도자였던 고인.
중국 망명길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그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게 되면서 고인은 독립운동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흥사단 운동과 한국독립당 창당 등 우리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현장에 그의 족적이 남아 있습니다.
[인터뷰 - 막내딸 구혜란]
“모든 유학생들이 돈이 떨어져서 그 분이 돈을 갖고 와서 줘야 했다. 독립운동가들을 서포트한 것이 많다. 중산대에서 중간자 역할을 하셨다.”
[인터뷰 - 이창걸 도산 안창호 혁명사상연구원장]
“45년 8월 15일 학도병 등이 상해에 몰려있을 때 교민단장으로 있으며 개인의 돈 70만불을 시사해서 3000여명의 숙박비와 배삯을 지불해 서민을 구제한 분이다.”
광복 이후, 고인은 안창호 선생의 유지를 지키기 위한 외길을 걸어왔습니다. 안창호 선생이 주창한 ‘대공사상’을 실천하는 것, 즉 평등의 원칙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정권의 감시와 탄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진보정당 활동에 참여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인터뷰 - 고 구익균 선생 / MBC 인터뷰]
"도산 안창호 선생은 편협하지 않거든요. 넉넉히 공산당도 (독립운동에) 수용할 수 있다고."
유족들은 고인을 ‘나쁜 가장’으로 기억합니다. 독립과 통일 운동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지만 정작 가난 때문에 자녀들의 교육엔 소홀했습니다.
국가유공자 자격을 수락하면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이 주는 혜택은 받을 순 없다며 끝끝내 거절했던 그였습니다.
[인터뷰 - 막내딸 구혜란]
“왜겠어요. 박정희가 한일협정으로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하시던 분이셨어요. 이 정권에서는 훈장을 받을 수 없다는 거예요.”
이렇듯 자신보다 나라의 일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온 고인이었만, 그의 유골은 이 땅에 안치될 곳을 찾지 못하고 납골당에 보관됐습니다.
국가보훈처가 고인의 국립묘지 안장을 불허했기 때문입니다.
유신정권 시절에 내려진 두 건의 집행유예 판결이 문제가 됐습니다. 국가보훈처는 규정대로 심의를 진행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유족들은 기계적으로 규정을 적용해 고인의 공로를 평가한다는 것이 납득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 막내딸 구혜란]
“자세한 공적은 모르면서 판단한 분들이 저도 모르는데 무슨 잣대로 된다 안된다 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소명기회 없이 한평생 국가를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의 행적을 단 7시간 만에 평가해 불허 판정을 내렸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인터뷰 - 이창걸 도산 안창호 혁명사상연구원장]
“최소한 6개월 전에 조사를 해서 무엇이 문제이고 원인 규명해서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절차상 하자가 있다.”
국립현충원. 이 곳은 후대에 귀감이 될 만한 헌신을 보여준 선열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입니다.
하지만 이 곳의 모든 유해가 국민적 공감대 위에 안치됐느냐는 아직 논란거리입니다.
국립묘소에 안장된 친일인명사전 등재 인사의 수는 총 일흔여섯 명. 안현태 전 경호실장을 비롯한 12.12 군사반란에 가담자 5명도 국립묘소에 안장돼 있습니다. 또 지난 2011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이 일제 강점기 간도특설대 활동 전과를 가지고 있는 백선엽 대한민국육군협회장에 대해 안장을 약속해 논란을 낳았었습니다.
국립묘소안치를 위한 심의 과정에 국민적 공감대가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지, 형평성의 문제는 없는지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조국에 헌신하고도 작은 답례 하나 바란 적이 없었다던 고 구익균 선생.
생전에 권력을 누렸던 이들에겐 넘기 손쉬웠던 현충원의 담장이 유독 그의 앞에선 높습니다.
뉴스타파 오대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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