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화재 나야 땜질식 개정...참사 못 막은 '뒷북 입법'

2018년 02월 02일 19시 57분

지난 10년간 화재로 인한 사망자 수는 3천 247명. 한해 평균 320명 넘는 생명이 화재로 사라져 갔다. 이 가운데서도 대형화재 참사들은 거의 어김없이 느슨한 법망과 정부의 대응 실패에서 기인한 ‘인재’로 기록되는 패턴이 반복돼 왔다.

뉴스타파는 화재사고에 대한 정부의 예방과 대응을 점검하기 위해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게재된 화재 및 소방 관련 법안 발의 내역과 시행령 개정 내역을 전수 분석했다. 그 결과, 사고 후에야 발의되는 법안, 한발 씩 늦은 개정안 처리, 건축주 부담을 고려한 제한적인 대상 범위 선정 등으로 대형화재 참사가 반복될 수밖에 없었음이 확연히 드러났다.

1년 전 발의 법안들, 제천·밀양 참사 잇따르자 ‘허겁지겁 통과’

임시국회 첫날인 지난달 30일, 소방기본법 개정안과 소방시설공사업법 개정안 등 화재 관련 법안들이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를 거쳐 일괄 처리됐다. 두 법안은 지난해 12월 제천 화재참사보다 1년 앞서 발의됐으나 계류돼 있었다. 이날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소방기본법 개정안에 따라 앞으로는 공동주택에 소방자동차 전용구역 설치가 의무화되고, 전용구역에 진입을 가로막는 방해 행위가 금지되며 위반할 경우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회에서 발의됐던 화재 예방과 대응 관련 법안들은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임기만료를 이유로 폐기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2002년 이후 발의된 화재예방과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 관련 법안들 중 임기만료로 폐기처리된 법안은 40%가 넘는다.

스프링클러 관련 시행령, 대형화재 생기면 ‘뒷북 땜질 개정’ 반복

사망 40명을 포함해 151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밀양 세종병원은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대형 참사 원인으로 불법적인 증개축과 구조변경에 따른 과밀병동화를 비롯한 여러 요인들이 꼽히지만, 화재 초기진압에 필수인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피해 규모는 현저히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어째서 거동이 어려운 환자들을 대거 수용하고 있는 세종병원급의 건물에 스프링클러가 없었을까. 뒷북·땜질식 처방이 무한반복되다시피 해온 2000년대 이후 스프링클러 설비 설치 관련 시행령들의 개정 과정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정 초기인 2000년대 중반에는 스프링클러설비 등 소방시설의 설치 범위를 확대하기보다는 되레 면제 범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정이 이뤄졌다. 건축주의 비용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이유였다.

연결송수관 설비의 설치를 면제하도록 하여 건축주의 부담을 완화하고, 건축물의 구조 등을 사유로 비상구를 설치할 수 없었던 기존의 다중이용업소에 대한 안전기준을 마련하여 이들 영업장에 대한 안전을 확보하려는 것임.

2006년 5월 29일 시행령 일부개정령

2005년 대구 사우나건물 화재사고로 5명이, 2006년 서울 노래연습장 화재사고로 8명이 사망하는 등 잇따라 인명피해가 발생한 후에야 스프링클러설비 설치 대상 범위가 확대되도록 시행령이 개정됐다. 2007년 3월 개정안은 휴게음식점과 단란주점, 영화상영관, 노래연습장, 찜질방에도 비상구와 간이스프링클러설비 등 방화시설을 설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설치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곳은 화재 예방의 사각지대였다. 2007년 2월 법무부 여수출입국사무소에서 보호외국인이 탈출을 시도하기 위해 불을 냈다.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보호시설에서 외국인 9명이 사망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화재 발생 당시 화재경보기는 작동하지 않았고, 스프링클러 또한 설치돼 있지 않아 대형화재로 이어졌다. 출입국관리사무소는 특정소방대상물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아 법으로 규정하는 스프링클러설비 설치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그로부터 1년 후인 2008년 2월에야 “교정시설, 창살이 설치된 노유자 시설, 3천 미터 이상의 터널 등”이 특정소방대상물 범위에 추가됐다.

그러나 빈틈은 여전히 많았다. 2008년 2월, 국보 1호 숭례문이 방화로 소실됐다. 그제서야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건축물을 방화 관리 대상에 포함하고 소방시설을 설치하도록 하는 법안이 발의돼 시행됐다.

하지만 다시 2년 후, 이번엔 의료시설에서 참사가 발생했다. 2010년 경북 포항 노인요양시설에서 새벽에 불이 나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거동이 불편한 요양시설 이용자들이 빨리 대피하지 못해 연기에 질식해 사망했다. 이에 따라 2년 뒤인 2012년, 정신요양시설 등을 소방시설 설치 대상으로 재분류하고 시설의 성격에 맞게 간이스프링클러설비 등 소방시설을 갖추도록 시행령이 개정됐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정신보건법」 상 정신요양시설 및 정신질환자 사회복귀시설을 노유자시설로 재분류한 것으로, 중소규모의 병원이나 요양병원 등은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화마는 어김없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2014년 5월 전남 장성요양병원에서 방화로 불이 나 21명이 사망했다. 이 때문에 2015년 6월이 돼서야 소방시설기준의 적용 대상에 요양병원을 포함한 의료시설의 스프링클러설비 등이 포함되도록 시행령이 보완됐다. 「의료법」에 따라 규정한 요양병원과 대형병원들의 스프링클러설비 설치가 의무화된 것이 불과 2년 반전이었다는 뜻이다.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 대상을 건물의 층수에 따라 규정한 시행령들도 대표적인 뒷북 조치의 사례다. 2015년 1월 경기도 의정부시의 한 아파트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했다. 1층은 주차장, 2~9층은 원룸, 10층은 오피스텔로 허가된 도시형 생활주택 건물이었다. 출동한 소방대는 골목에 불법주차된 차들로 인해 초기 진화에 실패했다. 불은 인접한 다른 아파트와 단독주택 등에 옮겨붙었고 2시간이 지나서야 진화됐다. 이 화재로 5명이 사망하고 125명이 부상했다. 화재 발생 당시 대피방송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화재경보기와 스프링클러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당시엔 11층 이상 건물에만 스프링클러설비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7년 1월이 되어서야 스프링클러설비 설치 의무 기준을 6층 이상 건축물의 모든 층으로 확대한 개정안이 마련됐다.

스프링클러 의무화됐지만 ‘기존 시설은 3년 유예’

이렇게 2015년과 2017년 시행령 개정으로 대형병원과 요양병원은 스프링클러설비 설치가 의무화됐다. 하지만 이번 화재 참사가 발생한 밀양 세종병원은 ‘중소규모’라는 이유로 설치 대상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또 인접해 있던 세종요양병원 역시 ‘이미 건축이 완료된 건물에서 운영 중인 요양병원은 2018년 6월까지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도록 3년의 유예기간을 두었기 때문에 규제를 받지 않은 채로 운영을 이어올 수 있었다.

밀양 세종요양병원과 같이 2015년 시행령 개정 이전에 건축이 완료된 건물에서 운영 중인 요양병원, 입원실이 갖춰져 있으나 중소규모인 의료시설, 4층 이하의 건물 등은 아직도 초기 화재진압에 필수적인 스프링클러설비 의무 설치 대상이 아니다. 여전히 숫자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잠재적 화재 참사 후보군들이 가까스로 땜질 조치만 이어온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데이터 : 최윤원, 연다혜
그래픽 : 하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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