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의 배신⑤ "아가, 할미는 참말로 보험사기꾼이 아니데이"
2018년 05월 25일 20시 50분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이란 철 지난 농담입니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현실에선 실현이 불가능한 일을 뜻합니다. 보험업계에선 이 말이 썰렁한 농담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바닥에는 '코끼리' 만한 고객 몫의 보험금을 '냉장고'만한 목표치로 줄여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회사 손해사정업체’의 직원들, 즉 손해사정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손해사정'이라는 낯선 용어부터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보험업계에서는 보험사고가 일어났을 때 보험금을 지급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보상이라고 합니다. 보험소비자들은 이 보상 절차가 가입자와 보험사, 1:1의 관계에서 진행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손해사정이라는 절차가 더 있습니다. 보험업 감독규정에 따르면, 소비자의 보험금 청구 이후 영업일 기준 3일 이내에 보험금이 지급되면 손해사정서 작성을 하지 않을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청구 이후 3일이 지나서 나오는 모든 보험금 청구 건은 손해사정 절차를 거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국내 손해사정제도는 1977년 보험업법 개정을 통해 탄생했습니다. 태생적으로는 보험 계약의 상대적 약자인 보험소비자를 보호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험소비자는 보험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제3의 입장을 가진 별도의 전문가(손해사정사)가 손해액 산정과 보험금 지급을 판단하도록 한 것입니다. 보험사 역시 제3자에 의한 손해사정 절차를 통해 가입자의 보험금 시비를 피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원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삼성생명 보험가입자 강경자 씨의 경우를 보면 현실에서 손해사정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 씨의 남편은 2011년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후 6년 동안 문제없이 보험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올해 4월 보험 손해사정사라는 사람이 갑자기 남편에게 찾아왔습니다. 손해사정사는 환자에게 뭔지도 모르는 서류에 사인을 하라고 종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험금을 더 이상 지급하지 않겠다는 보험사의 통보가 왔습니다.
7년 동안 같은 사람이 같은 병원을 다닌 비용인데, 이제 와서 보험금이 안나오는 이유를 강 씨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손해사정사가 작성한 보고서를 보고 싶었지만 손해사정사는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취재진이 당시 손해사정을 담당한 직원에게 전화를 해 보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는 답변이 전부였습니다.
보험 소비자를 보호할 것 같아 보이는 손해사정사는 왜 보험사의 편에서 일을 하는 걸까요. 전체 시스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위 강경자 씨의 사례에 등장하는 손해사정사가 속한 업체의 이름은 ‘삼성생명 서비스 손해사정 주식회사’입니다. 회사 이름에 삼성생명이 들어가지요. 이 업체가 입주해 있는 건물은 서울 당산동 삼성생명 건물입니다. 아시겠지요. 손해사정을 하는 업체가 삼성생명의 자회사입니다.
제3자가 공정하게 보험금 지급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자고 해놓고 보험사 자회사 직원이 손해사정을 맡는 황당한 상황이 된 겁니다. 비유를 하자면 의료사고를 중재하는 기관인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병원에서 자회사로 운영하는 꼴이라는 거죠. 이 황당한 일은 30년 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손해사정사는 '이해관계를 가진 사건에 손해사정을 해서는 안되지만, 보험사의 자회사는 예외'라는 기이한 법령 때문입니다.
보험업법과 보험업법 시행령에서는 분명히 손해사정을 통해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보험업법 189조 3항)과 이해관계를 가진 자가 보험사고에 대해 손해사정하는 행위(보험업법 시행령 99조 3항)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행령에서는 자회사 손해사정회사가 모회사인 보험사의 계약 건을 손해사정하는 것은 ‘예외’로 한다는 단서 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공정성을 저해해서는 안 되지만 자회사 손해사정은 허용한다'는 역설적인 법령입니다. 이런 ‘셀프 손해사정’은 가뜩이나 보험사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1970년 대 손해사정 제도가 도입되던 시절에는 보험 관련 전문 인력을 보험사 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기형적인 ‘셀프 손해사정’이 예외로 인정됐다는 거죠. 하지만 지금은 2만 명이 넘는 손해사정사가 활동합니다. 현재 시점에는 필요없는 예외조항이라는 말입니다.
보험사들은 이런 법의 허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국내 주요 생명·손해보험사들은 자회사로 손해사정업체를 두고 있습니다. 7개 대형 보험사(교보생명, 삼성생명, 한화생명, DB화재, 삼성화재, KB손보, 현대해상)가 12개의 손해사정회사를 자회사로 두고 있습니다. 보험사들은 손해사정 10건 중 9건을 자회사에 맡깁니다.
다른 중소 보험사 역시 보험사 직원 출신이 주축이 된 위탁 손해사정업체를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실상 업계 전반에서 '셀프 손해사정'이 이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험사의 일방적인 보험금 부지급을 막을 안전장치인 손해사정이 무력화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손해사정 비용은 누가 지불하는지 아십니까. 보험계약자, 그러니까 소비자입니다. 소비자가 내는 보험료에 이미 손해사정 위탁 비용이 포함돼 있기 때문입니다. ‘소비자가 내는 돈을 받고 일하는 손해사정사가 보험사의 편에서 일한다.’ 현재 한국의 보험시장의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죠.
무력화된 손해사정의 자리에는 소비자 몫으로 돌아갈 보험금을 줄이기 위한 편법과 탈법이 만연합니다. <뉴스타파>는 전현직 자회사 손해사정업체 직원들을 만나 손해사정 일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백태 만상을 들어봤습니다. 그간 ‘보험의 배신 시리즈’에서 취재한 주요 부지급 피해 사례들의 이면에는 어김없이 자회사 손해사정의 불공정 행위가 숨어 있었습니다.
자회사 손해사정사들의 평가 시스템은 가혹하기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손해사정사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평가 시스템으로 '일일 평가'와 '보험금 누수 방지 평가'를 꼽습니다.
‘일일 평가’는 하루 치의 업무 할당량을 정하고 매일 그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보험사고에 대한 조사는 부실해지고 보험소비자의 목소리가 반영될 여지는 줄어듭니다. 시간에 쫓기면서 임의적인 면책(부지급)도 왕왕 생긴다고 합니다.
다수의 선량한 보험 가입자들에게 지급돼야할 보험금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누수 방지'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보험금 누수 방지 평가’는 실상 보험사에서 할당한 보험금 부지급 목표치에 다름없다는 것이 일선 손해사정사들의 설명입니다. 취재진과 인터뷰한 한 의료부문 손해사정사의 경우, 한 달에 1억 5천만 원의 보험금을 부지급하거나 줄여야 했다고 합니다. 또 한 달 처리 건수 29건 중 12건을 면책(부지급) 또는 합의(보험금 삭감)를 해야 했습니다.
이유 불문하고 목표치만큼 보험금 지급을 줄여야 하다 보니 소비자들은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같은 조건이어도 월초에 청구한 보험금은 잘 나오는 데, 월말에 청구한 보험금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부지급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월초에는 비교적 공정하게 손해사정을 할 수 있지만, 목표치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는 월말에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지급 보험금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민사회와 정치권에서는 자회사 손해사정 구조를 개선하자는 논의가 이미 수 년째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6월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소비자가 독립손해사정법인(자회사 또는 보험사 위탁이 아닌 별도의 손해사정법인)을 선임했을 때 그 비용을 보험사가 부담하도록 하는 보험업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하지만 보험료가 오르고 보험사기 위험이 증대될 수 있다는 보험업계의 주장에 막혀 1년 넘게 상임위에 계류 중입니다.
시민단체에서는 박용진 의원의 개정안보다 더 강도 높은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회사에 대한 손해사정 위탁 비율을 제한하거나, 아예 제도의 취지를 살려 선진국에서 시행 중인 ‘공공 손해사정사’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지속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개선을 촉구해온 금융소비자연맹은 정부 당국에서 조금만 의지를 가져도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는 금융적폐라고 말합니다. 금융위원회 소관인 보험업 감독규정에서 계약자가 손해사정사 선임할 수 있는 조건을 '보험사의 동의를 얻은 때'로 국한하고 있어 이미 보장되어 있는 소비자의 손해사정사 선임권을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상임회장은 사실상 보험금 지급 문제를 둘러싼 모든 갈등의 이면에 자회사 손해사정 문제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당국이 최우선적으로 나서 개선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취재 : 오대양
촬영 : 신영철, 김남범
편집 : 정지성
CG : 정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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