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프로포폴 상습 불법 투약 의혹으로 수사를 받아 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벌금 5000만 원에 약식기소했다. 마약류인 프로포폴을 불법 투약한 혐의는 인정하면서도 재판에는 넘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 부회장에게 결정된 벌금 5000만 원은 마약류 불법 투약자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 수준. 하지만 동일 사건으로 수사를 받아온 사람들이 대부분 재판에 넘겨진 것과 비교되면서 "봐주기 결정이 아니냐"는 의심도 나오고 있다. 삼성은 "무혐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다소 아쉽다"는 입장을 밝혔다.
6월 4일 서울중앙지검 강력범죄형사부는 프로포폴 상습 불법 투약 혐의를 받고 있는 이재용 부회장에 대해 벌금 5000만 원의 약식기소 결정을 내렸다. 이 부회장은 2017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서울 강남의 I성형외과 등에서 마약류인 프로포폴을 불법 투약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아왔다. 약식기소는 징역·금고형 대신 벌금형이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검찰이 정식 재판에 넘기지 않고 법원에 서면으로 심리를 신청하는 형사소송 절차다. 수사가 시작된 뒤 이 부회장 측은 "불법 투약은 없었다"고 주장했었다.
지난해 2월 뉴스타파가 이재용 부회장의 프로포폴 불법 투약 의혹을 처음 보도한 뒤, 검찰은 해당 성형외과 등에 대해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뉴스타파가 공개한 '성형외과 원장 김 모 씨와 간호조무사의 대화내용이 담긴 녹음 파일', '이 부회장과 간호조무사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간호조무사 휴대폰의 GPS 추적 내용' 등이 중요한 수사 단서가 됐다.
지난 3월, 이재용 부회장은 검찰 외부 자문기구인 수사심의위원회 소집을 요청한 바 있다. "수사심의위원회가 수사와 기소 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해 달라"는 요구였다. 수사심의위원회는 회의를 거쳐 수사 중단을 결정했지만 기소 여부에 대해서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불법 투약자 재판 넘기던 검찰, 이재용은 약식 기소 결정
그런데 검찰의 이번 약식기소를 두고 형평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을 제외한, 문제의 성형외과에서 프로포폴을 불법 투약한 것으로 의심되는 다른 인사들에 대해서는 검찰이 대부분 정식 재판을 청구했기 때문이다. 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병원장 김 모 씨와 간호조무사 신 모 씨, 채승석 전 애경개발 대표, 연예기획사 대표 김 모 씨, 유명 패션 디자이너 이 모 씨 등이다.
문제의 병원에서 100차례 넘게 프로포폴을 불법 투약해 온 채승석 전 애경개발 대표는 1심에서 징역 8개월형을 받고 구속됐으나 2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깎인 뒤 풀려났다. 연예기획사 대표 김 씨와 패션 디자이너 이 씨도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사건 직후 구속돼 1심에서 징역 3년을 받았던 병원장 김 씨는 현재 2심 재판을 받고 있다. 병원장을 도와 불법 투약에 관여해 온 간호조무사 신 모 씨 역시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2심이 진행중이다. 반면 같은 혐의로 수사를 받던 배우 하정우 씨는 이재용 부회장과 같이 벌금 1000만 원에 약식기소됐다.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약식기소 결정은 마약 투약자를 통상 정식 재판에 넘겨 온 그간 검찰의 관례와도 어긋난다. 대검찰청이 발간하는 ‘검찰연감’에 따르면, 마약류 투약 사범에 대해 검찰이 벌금형 약식기소한 비율은 통상 1~3%대에 불과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약식기소되면서 세간에는 "사면을 예상한 검찰의 봐주기 구형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정식 재판이 진행되면 이재용 부회장의 구체적인 혐의가 재판을 통해 공개될 가능성이 크고 사면 가능성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어 검찰이 약식기소를 결정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박근혜 국정농단에 관여한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아 구속, 수감돼 있다.
관련 보도를 종합해 보면, 이재용 부회장을 약식기소하는 과정에선 검찰 내 불협화음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사팀은 정식 재판에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수사를 지휘하는 대검찰청이 약식 기소로 입장을 바꿨다는 것이다. 약식기소 결정이 나온 6월 4일 SBS는 "수사팀뿐만 아니라 마약 수사 경험이 풍부한 전문검사자문단까지 정식재판 회부를 건의했지만, 대검찰청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대검찰청은 곧바로 반박에 나섰다. 대검찰청은 "사건 수사팀이 수사심의위원회와 전문감사회의 결과 및 피의자 자백, 반성 등을 감안해 대검에 약식 처리계획을 보고 했다. 대검은 이를 승인한 것으로 상호 의견 충돌에 따른 절충안으로 약식기소를 처분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정식 재판 결정할까?'...이제는 '법원의 시간'
검찰이 이례적으로 마약류 범죄에 대해 약식기소를 결정했지만, 사건이 모두 끝난 건 아니다. '검찰이 청구한 약식 기소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정식 재판 절차를 진행할 지'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 남아 있다. 검찰이 청구한 약식 기소를 법원이 뒤집는 일은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지난해 1월에도 법원은 검찰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충돌 사건과 관련해 약식 기소한 국회의원 11명을 직권으로 정식 재판에 넘겼었다.
이재용 부회장의 약식기소 사건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단독 이동희 판사에게 배당됐다. 형사2단독은 마약·환경·식품·보건 관련 약식 사건 전담부서다.
한편, 이 부회장은 문제의 I성형외과가 아닌 또 다른 병원에서도 프로포폴을 불법 투약했다는 혐의로 현재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