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선언으로 당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당했습니다. 일터를 잃은 언론인들은 출판,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언론 현장을 떠난 그들 개개인의 삶은 남모를 설움과 고달픔에 시달렸습니다. 뉴스타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해직 이후의 생활 등을 담습니다. 이 릴레이 회고록은 기자협회보와 동시에 게재됩니다. 스물다섯 번째 글은 이부영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이 썼습니다. - 편집자 주
이 글은 2011년 (주)일조각에서 펴낸 ‘거인 천관우-우리 시대의 언관사관’ 3부 ‘민주투사 천관우’에 실린 같은 제호의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의 회고 글입니다. 동아투위 위원들에게 천관우 선생의 존재와 역할은 자유언론투쟁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 다시 옮겨 싣습니다. - 필자 주
천관우 선생을 떠올리면 먼저 송구스럽고 제대로 모시지 못한 회한이 앞선다. 우리가 동아일보에 입사한 첫날부터 떠나온 날까지 우리의 ‘대장’이셨다. 그 대장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송함이 사무친다.
박정희 정권의 '아킬레스건'에 메스를 대다
언제 한번 바람 잘 날 없이 평온한 적이 있었겠는가만, 천 선생께서 주필로 재직하시던 1968년 말에 우리가 입사한 동아일보사는 폭풍 전야의 벌판 같았다. ‘3선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 음모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차관’에 관한 특집을 꾸몄다는 것을 빌미로 천 선생을 동아일보로부터 축출했다.
재벌들에 대한 외자 도입 특혜를 지렛대로 장기 집권을 위한 천문학적 정치자금을 비축하고 있던 박 정권에게 비수를 들이댄 특집이었다. 천 선생을 그대로 두고서는 자신들의 집권 연장 계획이 순조롭게 진척될 수 없다는 것을 안 박 정권이 내린 결단이었다. 필자를 비롯한 동아 수습 11기와 천 선생의 만남은 만나자 이별이었다. 우리들이 입사하자마자 터진 이른바 ‘신동아 필화 사건’이 그것이었다.
△ 1968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 2면 사설 '신동아 필화'의 일부<br>
그래도 수습기자 오리엔테이션 이후 주필과 수습기자-피디-아나운서 25명 사이에 벌어진 술자리는 이별 주연으로선 손색이 없었다. 점심 식사 후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한창 나이의 25명 젊은이들과 주필 한 분과의 대작이었다. 25명의 수습 모두와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젊은이들이 하나둘 곯아떨어졌고 주필 한 분만 멀쩡하게 앉아 계셨다. 나중에 편집국장을 지낸 김용정 군이 마지막까지 대작 상대였지만 이미 25 대 0으로 승패가 가려진 뒤였다. 천 선생은 젊은 기자들과 합동 술자리를 가질 때 중국집의 백주 됫병(한 되)을 시켜서 돌렸다. 이렇게 젊은 기자들의 기를 돋우고 요즘 말로 '스킨십'을 통해 짙은 정을 쌓았다. ‘우리 대장 천관우’가 됐다.
1968년 말에 동아일보사에서 강제퇴직 당하셨던 천 선생은 1970년 2월 동아일보에 복귀, 상근이사로 사사(社史) 편찬을 담당하셨다. 허울뿐인 이사로 대접했지만 논설 등 글을 쓰지 못하도록 만들어 놨다. 근무처도 3층 편집국과 별관 출판국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조그만 독방이었다.
동아일보 상근이사 신분으로 재야 활동
1971년 4월경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천 선생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공동대표의 한 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셨다. 당시 편집부에 근무하던 필자는 자주 천 선생 방으로 호출당했다. 눈치로 보건대 안성열, 심재택 두 기자가 따로따로 가끔 불려오는 듯했다. 자유언론 투쟁으로 해직당해 동아투위에 함께 몸담았던 두 선배는 천 선생이나 마찬가지로 세상을 떴다.
천 선생은 양면 괘지에 특유의 필체로 유려하게 써내려간 시국관련 성명서 초안을 함석헌, 김재준, 장준하, 이병린, 유진오 등 재야 인사들에게 회람토록 해서 서명을 받아오라는 부탁을 하시곤 했다. 유진오 선생이 신병 요양차 묶고 계시던 유성별장에 감시하는 정보과 형사의 눈을 피해 새벽에 찾아가서 서명을 받아 온 적도 있었다.
당시 더 이상 대통령 선거는 없고 박정희 일인 지배의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는 관측이 떠돌았다. 부정선거 시비가 그치지 않고 재야와 대학 사회의 저항이 계속되자 박 정권은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천 선생은 다시 동아일보사를 퇴사하셨다. 천 선생께서는 1972년 10월 유신을 통해 실낱같던 민주주의가 숨을 거뒀다고 판단하시고 1974년 12월에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민주회복국민회의’로 이름을 바꿔 함께 결성하고 투쟁하셨다.
그런 와중에 필자는 1973년 4월 장준하 선생의 비서로 있던 손수향 양과 결혼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없던 우리 두 사람은 장준하 선생을 대부로 그리고 천관우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태평로 신문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천관우, 장준하 두 분 선생을 모시고 올린 결혼식은 그 뒤 필자의 생애를 결정짓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결혼 후 첫 신접살림은 천 선생 댁 바로 옆의 전셋집에서 시작되었다. 천 선생 댁은 50년대 말에 지은 국민주택이었고 필자의 셋집은 허름한 단독 가옥 단칸방이었는데 필자의 집 바로 앞에 파출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천 선생 댁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였다. 그 골목 안에는 작가 이호철 선생 댁과 야당 김현수 국회의원의 댁이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필자의 집까지 포함해서 네 집을 감시하는 중앙정보부원을 비롯한 정보기관원들이 파출소에 언제나 북적인 것은 당연했다.
△ 농성 기자들이 축출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민주인사들이 심야에 동아일보사 앞으로 몰려들었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천관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동아일보 사주’ 측의 만행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우리 동아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자유언론의 기수들이 내쫓기던 1975년 3월 16일 자정 무렵부터 다음 날인 17일 통금 후 새벽 4시부터 6시경까지의 경과는 다음과 같았다.
16일 오후 9시경부터 동아 사주 측은 보급소 직원들을 비롯한 깡패들을 동원(외신들은 사복 경찰관들도 동원되었다고 보도했다), 폭력으로 농성자들을 사옥 밖으로 내쫓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수많은 재야인사들과 야당 정치인들이 동아일보 사옥 앞 광화문 부근으로 모여들었다. 검은 베레모를 쓴 거구의 천 선생이 다른 재야인사들 및 외신 기자들과 함께 서 계셨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영부인 공덕귀 여사와 정일형·이태영 선생 부부도 함께 계셨다. 그분들의 응원을 지켜보던 우리들은 큰 위로와 격려를 얻었다.
그리고 우리 농성자들은 통행금지 해제 직전 쇠 파이프와 몽둥이 그리고 산소 용접기를 든 깡패 폭도들에게 폭행당하면서 동아일보 사옥 밖으로 내쫓겼다. 밖에서 통금이 해제되기를 기다렸다가 나와 준 천 선생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우리들을 맞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외쳤다. “자유언론 만세!”, “폭력 축출 사과하라!”, “자유언론 사수하자!”
그런데 며칠 뒤 사주 측이 장악한 동아일보 격려광고 지면에는 해괴한 광고 한 개가 실렸다. “천관우 씨, 여자 아나운서와 여관 동숙(同宿)” 대강 이런 낯 뜨겁고 야비한 내용이었다. 농성자들 걱정에 귀가하지 못하던 천 선생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16일 자정 가까워서 통금을 피해 세종로 부근 여관에 함께 투숙해서 꼬박 밤을 지새우고 다시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쫓겨나오는 농성자들을 맞이한 것이 전말이었다.
농성장에 함께 있다가 농성자들의 먹을거리를 사려고 외출했던 여자 아나운서 한현수 씨가 봉쇄에 막혀 농성장에 합류하지 못하고 재야인사들과 함께 여관에서 지낸 것을 두고 동아일보 사주 측은 그 같은 저질 광고를 ‘자유언론을 격려하는 광고’에 섞어 내보냈다. 뒤에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나서 권영자 문화부 차장이 위원장으로 선임되자 동아일보 사주 측은 다시 격려광고 지면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조선작 작가의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를 빗대 비방 광고를 내기도 했다.
구속과 폐쇄, 천관우 선생 댁에서 농성투쟁
1975년 6월 동아노조와 동아투위의 대변인이었던 필자는 성유보 친구와 함께 국가보안법, 반공법, 긴급조치9호, 국가모독죄(형법 104조 2항)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2년 6개월의 형기를 살았다. 1977년 12월 말 출감해 보니 아내는 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불광동 전셋집에서 나와 여섯 차례의 이사 끝에 종로구 청운아파트로 옮겨 있었다. 틈나는 대로 천 선생 댁에 들러서 밖의 사정을 전하고 당부 말씀도 들었다.
1978년 한여름, 찌는 듯한 날씨에 내방객도 없는 가운데 천 선생께서는 베잠방이 차림으로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고 계셨다. 면도도 머리 손질도 하지 않으셨다. 개다리소반에 소주 두어 병과 맥주잔 그리고 된장, 풋고추와 썰어 놓은 오이 몇 개가 전부였다. 소주 한 병을 따르면 맥주잔으로 두 잔을 못 채웠다. 선생께서는 거의 말없이 드셨고 내가 주로 저간의 사정을 말씀드렸다. 1975년 동아 강제 해직 사태 이후에 천 선생은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계셨다. 1976년 3·1 명동 민주구국선언사건에도 참여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자연스레 재야 인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그러던 가운데 1978년 10월에 동아투위에서 지난 1년 동안 제도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건·사고를 ‘10·24 민주·인권일지’로 묶어 재야인사들과 종교계 그리고 외신 등에 배포했다. 펜과 마이크를 빼앗겼어도 자유언론의 깃발을 들고 있던 해직언론인단체 동아투위의 안종필 위원장 등 10명이 그 파동으로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다. 동아투위의 사무실도 폐쇄당해 모일 곳도 없었다.
동아투위 사람들은 농성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천 선생 댁으로 가서 농성을 시작했다. 넓지도 않은 선생 댁에 20명 가까운 젊은 해직 언론인들이 하루 종일, 그것도 닷새 동안 농성투쟁을 벌였다. 아무 수입도 없이 칩거하고 계신 천 선생 댁에 천지 분간 못 하던(?) 젊은이들이 장기 농성투쟁을 벌이고 있었으니 천 선생, 특히 사모님의 난감함이 오죽하셨을까. 세월이 지나 눈 감고 생각해 보니 송구스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
△ 천관우 선생 추모문집간행위원회가 천관우 선생 20주기를 맞아 간행한 추모문집 표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천 선생은 1970년대에 한국고대사 연구에 정진, 동아일보 휴직 상태에는 <신동아>에, 그리고 동아일보를 떠나신 뒤에는 제도언론의 모든 창구가 봉쇄되자 학계 학회지 등에 다수의 논문을 집필하셨다. 필자의 서울대 문리대 동기로 사학과 출신인 김종심은 <신동아>에 재직할 당시 학술담당 기자였고 이름난 잡지 편집자였다. 그는 천 선생의 한국사 관계 논문과 학술대담 · 좌담 등을 도맡아 처리했다. 그는 천 선생의 난해한 초서체 원고를 해독하는 드문 편집자로 천 선생께서도 인정하는 준재였다.
그도 천 선생의 심기를 건드려 혼뜨검을 한 일이 있었다. 천 선생은 태어나실 때부터 양 손가락이 불구이셨다. 당신의 양손이 사진 찍히는 것을 피하셨다. 김종심이 편집한 어느 좌담회 기사에 천 선생 상반신과 함께 천 선생의 손이 그대로 노출된 사진이 실렸다. 김종심이 혼났던 이야기는 두고두고 전해진다.
1979년 박정희 시대 말기에 이르러서 천 선생께서는 동아투위와도 거리를 두고 두문불출하셨다. 박 정권의 폭압이 거칠어질수록 더불어 급진화하는 듯한 민주화운동 진영에 대해서도 우려하셨던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10・26 박정희 피살사건과 12·12 신군부 쿠데타 그리고 5·18 광주민주항쟁을 거치면서 고조되었을 천 선생의 위기감이 그 뒤 전두환 정권의 의도적 접근으로 더욱 심화하지 않았을까 짐작될 따름이다.
말년 몇 해의 삶으로 생애를 재단하지 말아야
대한민국 건국 이후 민주주의 건설과 언론자유 창달을 위해 헌신하셨던 천 선생 입장에서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 앞에서 당신의 ‘입지’보다 조금 더 우경화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당시의 대다수 민주화운동 진영의 인사들과는 생각을 함께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우리들 모두 알고 있듯이, 천관우 선생은 해방 직후 서울대 국대안 찬성 진영에 속했던 보수적인 분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등 집권자들이 독재 강화의 길을 걷는 것에는 반대하셨다. 말년에 5월 광주민주 항쟁에 대해서는 해방 직후의 위기감에 빠지셨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볼 따름이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1981년 초엽까지는 내 자신의 수감생활 탓에 천 선생을 찾아뵐 수 없었다. 그 기간 동안에 바깥세상과 담을 쌓고 사셨던 천 선생께 문안을 드렸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그러나 말년의 천 선생의 몇 해 삶이 전체 삶의 무게를 지워버릴 만큼 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지금도 우리 언론인들을 기개 높은 선비의 길로 인도해 주신 것에 천 선생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고 있다. 천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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