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탈북자 간첩사건 조사 후 '규정 위반 없었다' 결론

2021년 05월 28일 15시 12분

  • 박지원 국정원, 피해자 조사도 않고 ‘탈북자 간첩 조사에 규정위반 없었다’ 결론
  • TF 구성 계획은 크게 발표, 조사 결과는 발표하지 않아
  • TF책임자인 박선원 국정원 기조실장, ‘간첩 무죄 판결문 보지 않았다' 
  • "피해자들을 우롱하는 쇼" 간첩조작변호인단 반발
간첩조작 관행을 스스로 뿌리 뽑을 계기가 될 것인지 기대를 모았던 국정원의 탈북자 간첩사건 전수조사가 유의미한 결과 없이 최근 종결된 것으로 드러났다.
박선원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은 "탈북자 위장 간첩사건을 전수조사한 결과 조사 과정에서 조사관들이 규정이나 절차를 위반한 사례는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27일 뉴스타파에 밝혔다. 박 실장은 "이번 조사 과정에서 국정원 내부 조사로 간첩조작 피해를 호소하고 있는 당사자들을 접촉해 진술을 청취한 것은 없었으며 외부에 결과를 발표할 계획도 없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지난해 뉴스타파가 탈북자 간첩사건 전수조사를 촉구한 뒤 12월 28일 보도자료를 통해 “홍강철 씨 ‘북한 직파간첩 사건’에 대한 대법원 무죄 판결을 계기로 과거 중앙합동신문센터’(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적발한 ‘탈북민 위장 간첩사건’에 대해서 전수 조사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국정원은 이를 위해 기조실장을 팀장으로 하고 국정원 파견 검사 등 총 10명 내외의 인원으로 TF를 구성할 계획이며, 조사 과정에서의 인권 침해 여부 등을 조사할 것이라고 했다. 국정원은 전수조사의 의미에 대해 "조사 과정에서의 인권 시비논란이 반복되지 않도록 선제적 조치를 하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박선원 실장은 TF가 피해자들의 진술을 듣지 않은 이유에 대해 "국정원과 법률적 다툼이 있는 분도 있고 국정원의 접촉을 싫어하는 분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피해자들의 반응이 어떤지도 모르고 일단은 자체적으로 규정을 준수했는지에 대한 조사기 때문에 별도로 만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박 실장은 또 TF가 국정원과 재판 중인 사건은 조사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표적으로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에서 180일 간의 신문을 받고 ‘오빠가 간첩’이라는 허위자백을 했던 유우성 씨의 동생 유가려 씨가 당한 일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유가려 씨를 조사하며 허위자백을 강압했다는 혐의를 받는 국정원 직원들은 검찰에 의해 기소돼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정원의 이번 조사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 먼저 철저하게 국정원 내부 인물로만 구성된 TF의 조사였다는 점에서 ‘셀프 조사'라는 한계가 있고 피해자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정원 요원들의 진술만을 듣고 끝난, 지극히 형식적인 ‘면죄부 주기'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무죄판결로 국정원 탈북자 간첩사건 조사의 계기를 제공한 홍강철 씨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국정원 조사관들이 규정을 제대로 지켰는지 알 수 있는데, 가재는 게편이라고 직원들에 유리한 말만 듣고 만 조사"라고 비판했다. 그는 피해자들이 국정원과의 접촉을 싫어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전화 한 통이라도 해보고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들어보지도 않고 속마음을 어떻게 아나"라며 답답해했다.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을 파헤치고 피해자들을 변호해온 장경욱 변호사도 허탈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박지원 국정원장이 직접 지시해 조사한다기에 TF가 구성되면 피해자들과 면담도 요청하고 그 활동을 모니터링하려 했는데 졸속으로 마쳤을 뿐 아니라 규정을 위반한 것이 없다고 면죄부를 준 것은 피해자를 우롱하는 쇼로서 국정원장이 책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사의 형식 뿐 아니라 내용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유우성과 홍강철 두 피해자 사건은 법원에서 오랫동안 검토한 기록이 있고 판결문 안에도 국정원 직원들의 불법이나 징계대상이 될 행위들이 적시돼 있는데 이에 대한 조사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우성 사건에 대한 2심 판결문에서 서울 고등법원은 국정원 조사관들이 조사권한을 남용했다고 명확히 판단했다. 
초기에 유가려씨가 화교임을 부인하자 국가정보원 수사관은 A4 용지 반 크기의 종이에 ‘회령 화교 유가리’라고 적힌 표찰을 유가려의 몸에 붙이고 합신센터에 수용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에 유가려를 서 있게 하였던 바, 수사관의 이와 같은 조치는 피조사자에게 불필요하게 모욕과 망신을 주는 것으로서 보호 여부 결정을 위한 조사권한을 남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유우성 사건 2심 판결문 중에서>
같은 판결문에서 법원은 국정원 조사관들이 유가려 씨를 거짓말로 회유해서 허위자백을 하도록 했다는 점도 지적했다. 
유가려는 2011. 7.경 북한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던 중 피고인과 함께 살 목적으로 한국으로의 입국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국가정보원 수사관이 수사과정에서 유가려에게 ‘있는 죄를 다 진술해서 깨끗이 털어버리면 오빠와 같이 살 수 있다’고 회유하자 이에 헛된 기대를 품고 이 부분 증거의 진술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유우성 사건 2심 판결문 중에서>
유가려 씨가 ‘오빠가 간첩'이라는 진술을 하게 되면 오빠인 유우성 씨가 간첩죄로 구속되고 유가려 본인도 구속되거나 추방될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 불이익 없이 같이 살 수 있는 것처럼 허위자백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박선원 국정원 기조실장은 ‘재판 중인 사건은 조사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위 내용은 최종 확정 판결이 난 유우성 사건 판결문에 적시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이미 완결된 법원의 판단조차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홍강철 씨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문에도 국정원의 ‘거짓말을 이용한 조사 관행'이 지적돼 있다. 국정원 조사관이 홍강철 씨에게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언질로 허위자백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국정원에서의 조사가 끝날 무렵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피고인의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것을 도와줄 수도 있다는 언질을 받아 그에 대한 기대가 피고인의 진술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점…

            <홍강철 씨 사건 2심 판결문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법원이 홍강철 씨에게서 조사관들이 받아낸 간첩 자백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이뤄졌다는 것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홍강철 씨 사건의 2심 재판부는 간첩 자백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진술서를 작성한 뒤 여러차례 번복하고 국정원 조사관들로부터 수정 보완을 요구받기도 하는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피고인이 최초로 피의사실의 일부에 부합하는 진술을 시작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그 내용을 번복하는 진술서를 작성하기도 하였으며 피의사실 전부에 부합하는 진술서를 작성하기까지는 그 과정에서 합신센터 조사관이나 국정원 수사관으로부터 진술서에 대한 수정 보완을 요구받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의 사정들에 비추어 보면...자백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 하에서 행하여졌다는 것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 없이 입증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  

   <홍강철 씨 사건 2심 판결문 중에서>
                                                                     
법원은 자백 진술을 받아내는 과정의 문제점, 달리 증거가 없다는 점, 진술 거부권 고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 등에 근거해 홍강철 씨의 자백 진술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데, 이것은 탈북자 간첩 수사 과정이 내포하고 있는 심대한 문제점을 가리키고 있다. 법원이 지적한 문제는 이혜련 씨 사건 등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간첩으로 적발한 거의 모든 사건의 수사 과정에 공통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홍강철 씨는 합동신문센터의 간첩 조사가 가진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는 뉴스타파가 취재한 상당수 간첩조작 피해자들의 공통된 호소다. 
"낮에 진행된 조사과정에서 이야기된 문제를 저녁에 '숙제'로 내주고, 허위자백을 자필로 정리하도록 했다는 것"
"그러한 자필진술서가 1000여 쪽이 넘는다는 것,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허위자백을 자필로 쓰는 과정에 세뇌시켰다는 것"
"조사관들이 나이가 많다는 구실로 반말과 욕설을 한 문제, 허위자백은 북한 가족들을 데려다준다는 약속의 대가였다는 것, 독방에 수용되어 있는 동안에는 국정원 조사관들 외에는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는 것, 24시간 CCTV 감시 밑에 있었다는 것”
법원 판결문에 나타나 있는 문제점도 조사에 반영되지 않은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박선원 기조실장은 자신이 판결문을 읽어보지는 않았다고 답변했다. TF 책임자가 판결문 내용을 모른다는 것은 국정원이 애초 의지가 없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박 기조실장은 이번 조사가 ‘앞으로 다양한 예방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2년 유우성 씨의 동생 유가려 씨에게서 '오빠는 간첩'이라는 허위 자백을 받아낸 두 국정원 조사관은 여전히 국정원 직원 신분이고 징계도 받지 않았다. 
장경욱 변호사는 “이것은 향후에도 계속 중앙합동신문센터(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행정조사권을 발동하여 간첩조작을 하겠다는 선전포고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우리 변호인단은 수많은 탈북자 합신센터 간첩조작 피해자 분들과 사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간첩조작 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해서 과거사청산위원회 진실규명 신청과 재심 등을 통해 끝까지 진실이 밝혀지는 그날까지 싸워나가겠다”고 밝혔다.
유우성 씨는 “국정원장이 직접 지시해서 전수조사를 한다고 해서 이번엔 뭔가 진상이 밝혀질 것이라고 기대를 해보았지만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니 역시나 국정원은 변한 게 없다는 생각만 든다. 이러한 태도로 볼 때 앞으로도 언제든지 탈북자나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건은 계속하여 발생할 수밖에 없고 아무도 책임은 지지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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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디자인이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