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타파] 롯데② 미스터리 계약서

2019년 02월 26일 08시 00분

<편집자주>
뉴스타파는 지난해 12월 현대중공업을 시작으로 대기업 갑질 사례를 ‘갑질타파’라는 시리즈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공정위 등 감독 당국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짚어볼 예정입니다. 갑질타파 두 번째 기업은 롯데그룹입니다.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jebo@newstapa.org

[갑질타파]
롯데① 수원역 롯데몰에서 집을 날리다
롯데② 미스터리 계약서
롯데③ 삼겹살 갑질, 그 후

김정균 씨(46살)는 영등포 청과 시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2001년부터 청과물 업체 직원으로 일했다. 2009년 ‘성선청과’라는 이름으로 마트나 슈퍼에 과일을 납품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CS유통(2012년 롯데쇼핑에 인수)과 주로 거래했다. 한 달 매출이 1억 원이 넘을 때도 있었다. 직원 한 명 두지 못하고 혼자서 트럭을 몰면서 몸으로 때웠다. 2017년 김 씨는 경북 의성군에 내려갔다. 남은 것은 빚 10억 원, 그리고 20만 킬로미터를 달린 낡은 트럭뿐이다.  과일 대금을 갚지 못해 고소 고발을 여러 건 당했다. 지금은 과수원을 임대해 과일 농사를 짓고 있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CS유통(롯데쇼핑 인수)에 과일을 납품했던 성선청과 대표 김정균 씨

2010년 봄, 당시 CS유통의 과일 담당 바이어였던 이 모 씨는 김정균 씨에게 독산동에 있는 하모니마트(CS유통 가맹점) 남문점에 과일을 납품할 것을 요구했다. 김 씨에 따르면 당시 하모니마트 남문점은 하루 매출이 2백만 원에서 3백만 원 수준에 불과했다. 매출이 안 나올 것을 알았기 때문에 김 씨는 몇 번이고 바이어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이어는 다른 매장 발주를 모두 끊어버렸고 남문점에 ‘올인’해 매장을 살릴 것을 김 씨에게 요구했다. 바이어의 발주에 생사가 달렸던 ‘을’인 김 씨는 바이어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2천5백 원 바나나를 1천 원에 납품...하루 백만 원 손해”

과일은 대형 마트에서 손님을 유인하는 이른바 ‘미끼 상품’이었다. 김 씨가 남문점에 과일을 납품하는 내내 특가행사가 이어졌다. 김 씨로서는 매장을 살리고 빨리 남문점에서 철수하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성선청과가 당시 실제로 납품한 사례를 통해 따져보면 이렇다. 바나나 한 송이의 원가는 2천5백 원. 마트에서는 특가로 한 송이당 9백80원에 팔았다. 여기서 CS유통이 10% 수수료를 떼 가면 김 씨에게 돌아오는 돈은 한 송이당 8백82원. 하루에 바나나 1천 송이를 팔면 1백60만 원 가량을 손해보는 구조였다.

적자가 쌓여갔다. 김 씨에 따르면 손님을 유인하기 위해 워낙 가격을 낮춰 팔다보니 인근 시장의 상인들이 마트에서 과일을 사다가 파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김 씨에게 과일을 팔던 도매상이 하루는 마트를 방문해 시세보다 너무 싸게 파는 모습을 보고는 과일 원가를 깎아주는 일까지 생겼다고 한다.  

CS유통은 2012년 4월 롯데쇼핑에 인수됐다. 김 씨는 이듬해인 2013년 6월께 롯데쇼핑에 먼저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과일을 팔면 팔수록 쌓여가는 적자를 더이상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몇 달 후 김 대표는 롯데 측 담당 바이어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우연히 황당한 사실을 알게된다. 당초 계약상으로는 수수료율이 15%였지만 롯데가 25% 수수료를 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었던 김 씨는 반발했다. 2015년 김 씨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했다.

우연히 알게 된 비밀…“수수료가 10% 올랐다”

사건은 공정거래조정원으로 넘어 갔다. 롯데 측은 2013년 3월 작성된 계약서를 조정원에 제출했다. 계약서에는 수수료율이 25%라고 손글씨로 적혀있었다.

롯데 측은 2013년 3월 29일 서울 가락동 농산물시장 청과동에서 당시 협력업체 대표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그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김 씨는 당시 간담회에 참석했지만 해당 계약서를 작성한 적은 없다고 맞서고 있다.

김 씨는 2013년 계약서에 찍힌 성선청과의 명판과 도장은 본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김 씨가 평소 작성했던 계산서에 찍힌 성선청과 명판과 도장은 롯데가 제출한 계약서에 찍힌 것과 다르다. 롯데가 공정거래조정원에 제출한 계약서에 찍힌 명판에는 ‘도/소매’라는 글자 사이의 점이 ‘가운데’ 있지만 김 씨가 실제 사용하는 명판에는 ‘아래쪽’에 찍혀 있다. 또 김 씨는 가게 명판과 도장을 각각 사용해 도장의 위치가 제각각이지만, 롯데 측이 제출한 계약서에는 명판과 도장이 합쳐져 있다.

▲롯데가 2013년에 김 씨와 체결한 것이라며 공정거래조정원에 제출한 계약서(사진 위)와 김 씨가 사용했던 계산서(사진 아래). 롯데가 제출한 계약서 명판에는 ‘도소매’라는 글자 사이의 점이 가운데 찍혀 있지만 실제 김 씨가 사용하던 명판(사진 아래)에는 ‘도소매’ 사이의 점이 아래 찍혀 있다.

“롯데 계약서 위조”...“사실 무근”

김 씨는 법원에 계약부존재 소송도 제기했다. 김 씨는 법원에 2009년 CS유통과 체결한 계약서를 롯데 측이 제출할 것을 명령해달라고 요청했다. 2009년 당시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자필로 서명한 부분 등이 있기 때문에 2013년 계약서와 비교해 위조 여부를 가릴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소송을 제기할 당시 김 씨는 몇 차례 사무실을 옮기는 과정에서 2009년 계약서를 분실한 상태였다. 법원의 명령에 따라 롯데 측은 2009년 계약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김 씨는 롯데가 법원에 제출한 2009년 계약서도 위조됐다고 주장한다.

▲롯데가 2009년에 김 씨와 체결한 것이라며 법원에 제출한 계약서. ‘갑’란은 아예 비어 있고 ‘을’란의 성선청과 상호와 사업자번호가 잘못 적혀 있다. 김 씨는 이 계약서 역시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9년 계약서에는 ‘갑’의 명판이 아예 찍혀 있지 않다. 성선청과 이름은 ‘성성청과’로 적혀 있고 사업자번호도 잘못 쓰여있다. 김 씨는 롯데쇼핑 직원과 대표를 사문서위조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지만 검찰은 “피의자(롯데) 측이 계약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사업자등록번호 및 상호를 잘못 기재한 것” 뿐이라며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법원은 계약부존재 소송에서 계약서의 진정 성립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계약서를 위조했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애매한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롯데 측이 2013년 3월부터 6월까지 25%의 수수료율을 적용한 것은 부당하다며 김 씨에게 1천 5백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에서 일부 승소하기는 했지만 검찰이 롯데 편을 들면서 계약서 위조 여부를 가릴 수 없게 된 김 씨는 결국 롯데 측과 합의한다. 합의 조건은 △2013년 계약의 존재여부, 수수료율 25%와 관련된 민형사상 소송 취하 △롯데그룹하도급업체 피해자 모임 탈퇴 △제3자 발설 금지 △합의내용 위반 시 배액을 롯데에 지급하는 것이었다. 법원은 김 씨에게 1천5백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지만 롯데는 김 씨에게 8천만 원을 보상했다. 이에 대해 롯데 측은 “사회적, 도의적 책임으로 보상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현재 김 씨는 도매상인들에게 과일 대금을 다 갚지 못해 여러 건의 고소를 당한 상태다. 빚이 10억 원에 이른다. 김 씨는 “저는 롯데한테 피해를 당해서 이렇게 됐지만 저때문에 피해를 입으신 분들한테 미안하다”며 “제가 당한 일이 너무 억울하고 다시는 저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려고 언론에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취재 조현미
촬영 신영철
편집 박서영
CG 정동우
디자인 이도현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