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들] 리영희 연작 다큐멘터리 4부 〈실천〉

Dec. 16, 2020, 05:49 PM.

12월 5일은 우상과 권력에 맞서 진실을 추구한 언론인이자 지식인이었던 리영희 선생의 10주기입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는 리영희의 삶과 그의 글쓰기를 다시 비춰보는 연작 다큐멘터리를 방송합니다. 이성의 힘으로 평생 진실을 좇았던 그의 삶이 가짜 뉴스가 난무하는 ‘탈진실’의 언론 생태계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네 번째, 지식인으로서의 삶과 행동을 다룬 <실천> 편입니다. 

1. 저널리스트, 지식인으로서 실천

저널리스트로 있는 이상, 붓을 꺾고 글을 안 쓸 수가 없을 것이다. 나처럼 글을 안 쓰고 깊은 명상에 잠기는 철학자가 있을 수 있어도 글을 안 쓰는 저널리스트는 이미 저널리스트가 아니다.

최정호 / 1974년 12월, 비평의 논리와 지성의 논리 중  
저항하며 행동하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시대입니다. 긴급조치’가 ‘일상조치’가 돼 버린 “긴조시대", 살기 위해선 납작 엎드리고 바짝 숨죽여야 했고 언제든 죽임을 당할지 모를 압제의 시대였습니다. 이렇게 불을 보듯 뻔한 위험에도, 거의 가망이 없는 절망의 상황에도 민주주의의 확고한 희망을 품고 독재의 과녁으로 돌진하는 게 지식인의 숙명이었습니다.    

2.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실천 

1969년 3선개헌으로 종신집권의 길을 닦은 박정희는 1971년 관권과 금권을 동원해 다시 대통령이 됩니다. 시민, 종교인, 학생들은 독재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박정희는 그해 10월 위수령을 선포하고 서울대와 연세대 등에 공수특전단 등 무장군인을 투입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진압합니다.
▲ 64인 지식인 선언 (1971. 10. 19)
당시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있던 리영희는 군부독재, 학원탄압을 반대하는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합니다. 글과 기사로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것입니다. 리영희는 얼마 뒤 합동통신에서 쫓겨납니다. 2년 전 1969년 조선일보에서 해직당한 뒤, 두 번째 강제해직이었습니다. 

3. ‘중국문제연구소’ 설립, 지식인으로서 실천 

리영희는 1972년 한양대학교로 옮겨 교수로 재직합니다. 이후 한양대 중국문제연구소를 이끌며 중국에 관한 논문을 속속 발표합니다. 당시 미수교 국가이던 중국을 실증적으로 조명한 리영희의 논문은 냉전논리를 넘어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습니다. 1974년 출간한 <전환시대의 논리>가 대표적입니다.
 ▲ 한양대학교 부설 ‘중국문제연구소’ 리영희 (1974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안경 쓴 앉은 이  
리영희 선생님 자신은 ‘이게 뭐 팔리겠나’ 꽤 회의적이셨어요. 선생님 아닐 거라고, ‘팔릴 겁니다.’ 했는데. 내 말이 맞았죠.  반응이 그때 굉장했어요. 그 시절 대학생들이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서는 눈을 번쩍 떴다, 눈이 뜨였다 .이런 사람들이 많았어요 

백낙청 명예편집인 / 창작과비평 
리영희의 생각과 달리, <전환시대의 논리>는 폭발적인 관심을 끌게 됩니다. 김동춘 교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고,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냉전적 의식과 사고의 깊은 중독 상태에서 벗어나는 지적 해방의 단비를 맛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유신독재는 황급히 금서로 지정해 불태우려 했지만, 막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 그리고 북한에 대한 우리 사회의 도그마를 깨려고 언론인으로서 노력을 했고 학계로 와서는 북한에 대한 과장된 일종의 북한의 위협 문제라든지, 한일관계의 문제에 대해서 주로 잘못된 시각이라든지, 너무 과도한 미국 편향적인 시각이라든지, 이런 것을 깨려고 논문도 쓰고 하셨죠. 결국은 학자로서 혹은 언론인으로서 극우반공주의의 우상과 맞서서 싸운 그런 분이죠.

김동춘 교수 /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4. '반유신독재'의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리영희는 실천하는 지식인의 상징이었습니다. 1972년 국제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설립을 주도했고, 74년에는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민주회복 국민회의는 이병린, 함석헌, 천관우, 강원룡 등이 참여한 재야의 반유신단체였습니다.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결성 리영희 (1972.3.28) 오른쪽 맨끝 안경 쓴 이 
'민주회복 국민회의'는 ‘자주, 평화, 양심’이 행동강령이었고, ‘민주회복’이 목표였습니다. 리영희는  글 쓰기와 연구 뿐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행동이야말로 지식인의 당연한 역할이라고 믿었습니다. 
▲ 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 (1974.11.27)  맨 앞 김영삼의 모습, 오른쪽에서 세번 째 맨 끝, 안경쓰고 앉은 이가 리영희.
민간인들이 하는 민주화운동에는 참여 안 한 데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 하면, 그 단체에 같이 성명서에 같이 이름이 들어갔더라도 딴 사람은 그냥 어물어물 통과하는데 리영희라고 하면 ‘아, 리영희 들어갔구나!’ 심지어 ‘이 빨갱이! 족쳐. 캐 봐’‘그 성명서 문안, 초안을 잡은 게 누구야? 리영희 혹시 아니야?‘ 이런 식의 접근을, 다른 사람보다도 두 배, 세 배 고초를 당하는 거죠.

임재경 / 조선일보 시절 동료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5. 대학에서 또 해직, 두 번째 구속

1976년 리영희는 대학에서 해직됩니다. 명분은 재임용 탈락이었지만 실제로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다 독재정권에 밉보인 것이 원인이 됐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추구한 그의 글쓰기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1977년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가 잇달아 출판합니다. <우상과 이성> 서문에서 리영희는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끝난다.” 라고 밝힙니다. 냉전과 권력의 우상에 도전한 리영희의 책은 학생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계 전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지성인의 한 전형적인 모습 그런 것을 우리는 기억을 하고 있었죠. 그분이 섭렵한 어떤 세계사적인 통찰들 그리고 한국사회 내부의 모순에 관한 관심과 지적과 그런 모든 분석. 이런 것들이 그 당시의 젊은 세대에게 목마름을 적셔주는 그리고 시야를 확 넓혀주는 그런 특별한 분이셨죠.

정태춘 / 가수
아마 저희 대학생들 때, 거의 다 읽지 않았을까, 그래요. ‘8억인과의 대화’. 완전히 ‘죽의 장막’이라고 해서 전혀 알 수 없는 그럴 때,  그거 읽으면서, 이야 세상을 그냥 한꺼번에 빛이. 어둠의 어떤 부분이 한꺼번에 밝아지는 듯한…

임옥상 화백 / 임옥상 미술연구소 
청년 학생들은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라고 불렀지만, 유신독재에게 그는 ‘의식화의 원흉’일 뿐이었습니다. 1977년 11월 23일, 리영희는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됩니다. 반공법 위반 혐의였습니다.  당시 리영희를 조사했던 검사는 <우상과 이성>의 소제목인 ‘임군에게 보내는 편지’의 대목이 중국 공산당을 고무, 찬양했다며 반공법 위반의 죄목을 씌웠습니다. 
담당 검사는 ‘생각하고 저항할 줄 아는 농민을 보고 싶다’는 문장이 공산 혁명을 선동했다고 주장한 겁니다. 또 <8억인과의 대화>에 소개된 번역글 가운데 중국의 의료체계를 소개한 부분도 공산주의 고무 찬양에 해당한다고 주장합니다. 
▲ 농사꾼 임군에게 보내는 편지 / ‘우상과 이성’ 중 
리 교수, 그래 우상과 이성이라는 책 속이 임군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이 마오쩌둥식 농민혁명을 교사, 선동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대답해 보시오. 우리 농촌이 언제 오늘처럼 풍요한 때가 있었소? 당신은 마오쩌둥의 교육사상에서 마오쩌둥이 중국 농민과 노동자의 낡은 의식을 개조해서 기존의 지식인, 유산자 위주의 제도를 뒤엎었다고 썼지 않았소? 대한민국의 국체 부인, 해외 공산주의 고무 찬양, 농민혁명 교사, 선동, 이거야 반공법이 규정한 바로 그대로지! 반공법 위반이 아니고 뭐요. 여부 있나!

'D검사와 이교수의 하루' 자전 에세이 글
검사는 황상구였습니다. 검사 황 씨는 이후 검사장까지 승승장구합니다. 리영희는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을 벌였지만 결국 징역 2년형이 확정됩니다.       
그때는 중공이라고 불렀죠. 중국의 문화혁명에 관한 글을 주로 서방의 언론인이나 주류에 속하는 학자들의 글을 엮어서 리영희 선생님이 직접 번역을 하셔가지고 그 한권 묶어낸 게 ‘8억 인구와의 대화’고 그것 때문에 리영희 선생님이나 나나 다 법정에 섰는데 리영희 선생님은 징역형을 받으셨고 나는 집행유예를 받았죠.

백낙청 명예편집인 / 창작과비평 
리영희는 0.9평의 관 속 같은 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겨울에는 동상에 걸려 발이 짓물러 터졌고,  여름에는 구더기와 함께 식사를 하는 참혹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을 보냈습니다.
하도 인간성을 박탈당하는 모욕과 치욕과 서러움과 자기 환멸과 이런 것 때문에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도 인간을 부정당하는 ‘난 인간. 너넨 인간 아니다.’라는 식의 인권을 박탈당하는, 전에 인간임을, 인간이라는 존재를 부정당하는 그런 상태가 지속이 될 때에 비로소 아, 자살한 사람들의 심정을 나의 심정으로 이관해서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아, 이렇게 해서 자살을 하는구나.’

 리영희 선생 / 인권연대 10주년 특별강연-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는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18년 장기집권은 이렇게 종말을 맞습니다. 리영희는 이 소식을 교도소에서 듣고 '눈물과 웃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고 회고했습니다.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가 성공한 직후인 1980년 1월, 리영희는 2년 형기를 채우고 풀려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리영희에게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리영희 연작 다큐멘터리 최종회 5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12월 18일 금요일 방송합니다.  
By
취재작가 이경은
촬영이광석
글 구성 정재홍
연출김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