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⑰] 펜을 쥘 수 없는 기자, 교단에 설 수 없는 교수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선언으로 당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당했습니다. 일터를 잃은 언론인들은 출판,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언론 현장을 떠난 그들 개개인의 삶은 남모를 설움과 고달픔에 시달렸습니다. 뉴스타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해직 이후의 생활 등을 담습니다. 이 릴레이 회고록은 기자협회보와 동시에 게재됩니다. 열일곱 번째 글은 김민남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이 썼습니다. - 편집자 주   
동아투위 김동현 부위원장으로부터 모처럼의 전화다. '김 선배도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회고 글 하나 보내줬으면 좋겠다'라는 연락이다. 난감하기도 막막하기도 하다. 1980년 부마항쟁을 전후하여 아픈 기억들을 되살리기로 했다.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질풍노도가 언론계를 휩쓴 지 벌써 반세기가 흘렀다. 그 많은 동지들을 두고 나 혼자만 멀리 부산 외톨이로 지내왔다. 동아투위를 위해 특별히 기여한 바도 없고,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회고 글을 ‘풍성하게’ 할 자신은 더욱 없으니 정말 망설여진다. 그래도 우리 동지들 서로가 알만한 건 함께 나누는 것도 자그마한 도리일 것  같다. 그래서 50년 넘게 깎이고 무뎌진 펜을 들기로 마음먹었다. 내 딴엔 조그만 용기다.

불의에 항거하는 법을 가르친 죄

1979년 당시 신군부가 권력을 잡고 정권 앞장에 서서 우리 사회를 호령하다시피 했다. 내가 국군 보안사 부산지부에 연행된 건 1980년 7월 16일이다. 보안사 요원 2명이 학교 수위실로 와서 호출했다. 연구실에서 수위실까지 200m 넘는 길을 내려왔다. 잠깐 가까운 찻집으로 가자고 해서 동아대 신동 캠퍼스 부근 찻집을 찾았다. 그들은 앉자마자 '거두절미하고, 7월 16일 부산 보안사 분실로 출두하라'는 것이었다. 보안사 부산지부는 망미동 어디쯤에 있었다.
아내는 7월 염천에 보름간 매일 아침 보안사 정문 앞 도로 건너편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돌봐주셨다. 아내는 당시 가슴만 탄 것이 아니라 얼굴까지 새까맣게 타서 기미가 내려앉았다.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 얼굴을 대할 때마다 미안한 맘이 든다. 나는 동아일보 재직 시절 서울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쳐 박사과정을 이수한다는 조건으로 모교인 동아대학에 운 좋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학업을 계속하라고 강력히 권유하고 뒷바라지를 해준 것도 아내였기에 평생 부양가족처럼 아내 신세를 지고 살아왔다.
△ 동아일보 앞에서 도열 시위 후 신문회관으로 이동 중. 사진 가장 오른쪽이 김민남 위원
보안사 수사요원들이 수사에 들어가기 전에 신발과 입고 온 옷들을 모두 벗겨내고, 고무신과 병사들 군복으로 갈아입혔다. 그들은 육군 중령인가 하는 지부장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지부장은 물 한 방울 먹지 않은 고압적 말투고, 그런 자세였다. “당신은 대학교수니까 실무자들이 조사할 때 예우해 주도록 지시했소. 조사관이 묻는 대로 숨기지 말고 대답해 주기 바라오.”
조사가 시작됐다. 긴장감이 돌았다. 옆방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첫째, 당신이 지금 수사 받는 건 지난날 동아투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학생들을 선동해서 데모에 내몰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우선 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에 가담하고 선언서를 동기인 양한수와 함께 서울 불광동 천관우 주필 댁에 직접 전달했다는 것. 천 주필을 부산에 초청, 남포동 제일예식장에서 시국강연회를 했다는 것도 참고했을 것이다.
사실 이 천 주필 관련 건 때문에 나는 동아일보 기자 시절에도 출입처인 국회에서 남산으로 끌려갔었다. 내가 동료들과 점심 하려고 국회 문을 나서는데 건장한 요원 4명이 와서 다짜고짜 양옆으로 팔을 끼고 건너편 프레스 센터 뒤쪽 다방으로 끌고 갔다. 상관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지프차에 구겨 넣고, 양옆 두 팔을 앞으로 내밀게 하고 수갑을 채웠다. 곧장 남산으로 끌고 갔다.
거기엔 양한수와 거구의 천관우 주필이 먼저 끌려와 있었다. 천 주필은 빨리 조사를 끝내고 돌려보내는 것 같았다. 예우를 한 셈이다. 양한수와 나는 하룻밤 내내 조사를 받고 그날인가 그 다음날 새벽에 ‘훈방 조치’됐다. 긴 시간 조사받을 내용이 별로 없었다.
△ 김민남 위원 개인 소장 사진.
두 번째는 내가 가르친 학생들 진술 ‘덕분’이었다. 보안사 요원들이 1980년 5월 광주 5.18 전후해서 부산 학생들을 대거 끌고 가 강제수사를 했다. 훗날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해줘서 알았다. 모질게 고문당했다는 것이다. 학생들 강제수사는 고문이 엄청 심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학생들을 위해 그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학생들을 선동해서 데모에 나서게 했다면 학생들의 죄가 완화되어야 한다. 학생들을 고문할 줄 알았다면 내가 차라리 데모했을 것이다. 그런 증후를 조사관은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보안사 요원들은 학생들 진술을 근거로 내가 받고 있는 혐의를 꿰맞추고 있었다. 수사관이 내게 말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강의 시간에 신군부 정권을 비판하고, 학생들 3천여 명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시위에 나서도록 선동했다는 것. 그들 학생 3천여 명이 남포동, 광복동, 국제시장, 부산역을 거쳐 서면까지 휩쓸었다는 것이다. 이건 사실이다.

1975년 동아일보, 1980년 동아대...두 번의 해직

망미동 보안사 분실에서 석방된 그날 밤 자정 경, 범일동에서 서면에 이르기까지 다시 중앙대로를 둘러봤다. 시위 과정에서 혹시 부상한 학생과 연행된 학생들이 있을까 염려됐다. 자갈 모래가 널려 있고 모래가 흩날려 눈물이 났다.
이튿날 학교에 나갔다. 남포동, 광복동 일대에서 경찰과 군인들, 학생들과 일부 시민들 간의 충돌을 둘러싼 흉흉한 소문들이 돌았었다. 나는 학생들과 교직원을 통해서 대강의 사태를 알 수 있었다. 가슴 아픈 사연들을 또 한 번 마음속에 안아야 하는가 되물었다. 뒤늦게 회한 아닌 회한을 곱씹어야 했다.
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적지 않게 연행됐고 일부 피를 흘리는 부상당한 학생들은 영도 경찰서 유치장에 유치돼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중부서와 서부서 등에 갇혀 있었다. 계엄 상황이지만 그들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 동아대 학생들이라는 소문을 듣고 교수로서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동료 교수 한 분과 함께 영도 경찰서로 갔다. 그는 기독교 장로였으니 마음이 허락했을 것이다. 대부분 교수들은 접근을 꺼리고 심지어 두려워하는 분위기였다.
피를 흘리는 학생들을 비롯해서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동료 교수와 둘이서 영도 경찰서 문을 빠져나와 말없이 부산지방경찰청 앞을 걸었다. 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정면 돌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대연동 집으로 가는 길이고 나는 서면으로 가는 길이다. 그 동료 교수는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용기다. 나는 혼자서 다시 폐허 같은 부산일보-남포동-광복동-자갈치시장에 이르는 중앙대로를 걸었다.
며칠 후 데모한 모교 학생들 몇 명이 연구실을 찾아왔다. 그와 함께 기관원들의 전화가 자주 걸려왔다. 나는 서울로 가볼까 고심했다. 학생들 구할 길이 있을까 하고, 지인 교수가 당시 교육부 장관으로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서울로 가는 그 길이 너무 막막해서 일단 발길을 돌려 남천동 집으로 왔다. 우리 아파트 경비실은 지난번 1964년 6.3 시위 때 기관원들 2명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가족 걱정을 안 할 수 없었다.
나는 불행하게도 강제 해직됐다. 재단 결의를 거쳤으니까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처지도 못되었다. 7월 31일 아침에 소속 박성균 사회대학 학장이 일러준 대로 서대신동 총장 자택을 방문했다. 총장 사모님이 객실로 안내했다. 그러나 총장님은 커피가 다 식도록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대충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 생애에 다시 밥자리를 뺏기는 지점에 도달했다. 이 시대 다른 아버지의 고통에 비하면 별것도 아닐 수 있다.
△ 김민남 위원 개인 소장 사진.
사표를 써서 학교에 제출하고 연구실로 돌아와 짐을 쌌다. 뒤늦게 사실을 파악한 학생들이 짐 싸는 걸 도왔다. 학생들 몇 명이 눈물을 쏟았다.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총장실로 찾아가 인사하고 나오는데 손현수 학생처장을 보고 가라는 비서실장 전갈이다.
손 처장은 자기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는 한참 뜸을 들였다. “김 교수는 앞으로 학교 근처에도 오지 말고 동료 교수나 학생들은 만날 수 없소. 보안사가 총장실을 거쳐 지시했소.”
그 후 4년 6개월 동안 나는 학교 근처에 얼씬도 못하고 사랑하는 재학생 제자들도 만날 수 없었다. 뭣보다 힘든 건 급여가 없어졌다는 것. 아내는 저 아이들 데리고 어떻게 살림을 꾸릴까. 그날 저녁부터 비상이었다. 내가 무슨 천형(天刑)을 받은 것도 아닌데….
중학교와 초등학생 작은 아들에게 또 한 번 설명을 해줘야 한다. 아버지가 집에서 빈둥거리는 모습을 매일 보아야 하니까. 더구나 이번에는 다른 사연으로 ‘강제 해직’되었다. 그 이유를 알아듣도록 설명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도 이 시대 아버지의 길이기도 하다면 감수해야지 어쩌겠는가.

그 시절의 엄혹함, 다음 세대에 물려줘선 안 된다

강제 해직(强制解職). 숙명으로 받아들이기엔 아이들과 아내, 내가 가르친 학생들한테 너무 미안하고 가슴 아프다. 특히 학생들에겐 엄청 큰 아픔을 줬을 것이다. 사회학과와 행정학과 학생들이 더욱 그렇다. 등 두드려 그들 미래를 격려해 주어야 한다. 보안사 지부장 말대로, 나는 동료 교수와 학생들은 일절 볼 수 없었다. 동료 교수들은 내가 떠날 때도 볼 수 없었다. 물론 원망하지 않는다. 딱 한 사람, 훗날 총장을 역임한 사회학과 한석정 교수 한 분은 그때도 만났고 지금도 만난다.  
△ 2022년 4월 27일, 김민남 위원 국가 배상책임 판결 관련 부산MBC 보도.
나는 1980년대 후반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부총장도 역임하면서 교직을 이어오다가 정년 한지도 벌써 20년이 되었다. 퇴직 후 건강이 좋지 않아 홀로 바닷가를 찾거나 간혹 기원에 출입하는 낭인(浪人) 김삿갓 신세로 지내고 있다.
과거 엄혹한 시절에는 누가 혹시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해도 내가 피해줘야 하는 세상이었다. 이런 세상은 내 아이와 학생들 세대에게는 절대로 물려줘선 안 된다고 혼자 다짐해 본다.
끝으로 한마디 적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 기자 공채 10기 동료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또 한 번 가슴 먹먹하다. 이참에 사과도 해야 한다. 너무도 오래 만나지 못했다.
※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준비위원회 후원
NH농협 301-0240-3680-71 재단법인 자유언론실천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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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김민남 동아투위 위원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