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위기② 여기도 사람이 산다 : 지역에 의료는 있는가

Nov. 25, 2024, 01:54 PM.

뉴스타파는 지난 3개월간 의료 공백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전국의 의료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의료 개혁으로 명명한 독단적 정책의 결과를 진단하고, ‘의료 대란’의 해법을 찾기 위해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의료 개혁의 본질인 필수·지역 의료 강화에 천착했습니다. 오늘(11월 25일)은 지난 1편(21일 방송)에 이어 지역의료 위기를 보도합니다. -편집자 주-
11월 14일 월요일 오전 7시 56분. 서울(서부)역 인근 셔틀버스 정류장에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성별 구분 없이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은 대다수가 마스크를 꼈고 손에는 짐 가방도 하나씩 들려 있었다.
곧 정류장에 버스가 들어섰고 앞문이 열리더니 기사가 내려왔다. ‘세브란스병원’ 표지가 부착된 버스였다. 버스 측면부에는 “이 셔틀버스는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을 위해 운행되는 버스로, 일반인은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다. 기사는 정류장에 대기하던 사람들이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환자’가 맞는지 확인하고 버스에 태웠다. 뒤늦게 대기 줄에 합류한 환자들은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8시 정시에 출발한 버스는 10분 뒤 또 한 번 정류장에 도착했다. 조금 전 못 탄 20여 명의 환자들을 마저 태우기 위해서였다.
11월 14일 월요일 오전 8시, 서울(서부)역 앞에서 세브란스병원 셔틀버스를 타는 사람들. 
이들 승객은 서울의 ‘큰 병원’에 가려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인 환자들이다. 세브란스병원을 비롯해 소위 ‘빅 5’라고 불리는 서울의 상급종합병원들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상경했다. 기차 왕복 비용으로만 10만 원 이상을, 때로는 숙박비까지 들여가며 지역의 환자들은 오늘도 서울로 향하고 있다.
왜 돈과 시간을 들여 굳이 서울에 오는 걸까. 지역에는 치료받을 만한 ‘큰 병원’이 없는 걸까. 지역에는 믿을 만한 의료가 없는 걸까. 윤석열 정부가 지난 2월 발표한 ‘의료 개혁’ 정책은 이 의문들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는 걸까.
뉴스타파는 윤석열 정부의 '의료 개혁' 이후 지역 의료가 다시 복원되고 있는지 취재했다. 전라도와 강원도, 울산광역시 등 전국 곳곳의 의료취약지를 찾아가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지역 의료, 공공 의료 현장에 있는 의료진과 전문가를 만나 지역·공공 의료를 되살리기 위한 실질적 방안을 모색했다.

의료취약지 공중보건의사들, 전공의 공백 메우러 수도권 병원으로 차출

전북 부안군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사(공보의)로 복무 중인 이성환 씨. 지난해 4월 전남 영암군보건소에서 공보의 생활을 시작해 1년 7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이 씨는 올해 3월과 9월, 총 8주 동안 근무지인 전라도에 없었다.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에 두 차례 파견됐기 때문이다.
‘의대 2천 명 증원’을 골자로 한 정부의 의료 개혁안이 발표된 뒤, 강남세브란스병원과 같은 수도권 대형 병원 전공의들은 줄줄이 사직서를 던지기 시작했다. 정부는 그 빈 자리를 메꾼다며 이 씨처럼 지역 공공병원에 복무 중인 공중보건의사들을 지난 3월부터 수도권으로 불러들였다.
올해 6월 17일 보건복지부 기준 공보의 219명이 차출됐고 이 중 108명이 수도권 병원으로 파견됐으며, 파견 공보의 중 80% 가까이는 전북 부안군처럼 원래 비수도권 의료취약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수도권의 의료 공백을 메꾸려다 거꾸로 비수도권 의료취약지에 의료 공백이 발생한 셈이다. 자연히 그 피해는 지역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6월 17일 기준, 공보의 219명이 정부로부터 차출됐고 이 중 108명이 수도권 병원으로 파견됐다. 파견 공보의 중 83명은 비수도권 의료취약지에서 근무 중이었다. 
(의사들이) 면대면으로 지역 주민들하고 맞닿을 수 있는 기회들이 줄어들고 의사들은 계속해서 순회 진료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의사들마다) 약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태도들도 다른 것들이 있을 거고 그 이전에 사실 환자에 대해서 파악을 어느 정도 했는지도 다 다른데 그런 부분들이 계속 바뀌다 보니까 환자 입장에서는 조금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이성환/부안군보건소 공중보건의사
군 복무 대신 의료취약지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공보의의 숫자는 이미 감소세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올해 신규 편입 공보의 수는 255명이다. 2년 전 511명에서 반토막이 난 수치다. 복무 기간이 36개월로 길다 보니 의대생들의 현역 입대가 해마다 늘고 여성 의대생 수도 증가해서다. 
이렇게 공보의 숫자가 줄다 보니 부안군에도 섬을 제외한 면 지역의 보건지소 10곳 중 5곳에만 공보의가 배치된 상태다. 그런데도 정부는 부안군 공보의 2명을 수도권으로 파견 보냈다. 공보의가 없는 보건지소에는 월·화·수 중 하루, 주 1회 순회 진료가 이뤄졌다. 보건지소를 이용하는 주민 수는 줄었다. 
농촌이 고령화에다가 인구가 계속 줄어드니까 점점 인적 네트워크도 잘 안되고. 힘이 좀 돼야 그래도 항의하러 “야, 이거 군수한테 가서 항의해야 돼, 보건소장한테 가서 항의해야 돼” 이게 됐는데 그게 안 되는 거죠. 그런 느낌이 좀 들었어요. 그래서 좀 안타깝고 좀 서글프죠. 

박찬병/부안군보건소장
표면적으로 항의하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을 뿐, 피해는 분명 발생하고 있다. 
강원 정선군 임계면에 사는 최보란 씨에게는 구순을 맞은 외할머니가 있다. 외할머니는 고혈압이 있어 정기적으로 보건지소에 가 처방을 받는다. 그런데 이번 여름, 최 씨는 외할머니를 모시고 보건지소에 갔다가 예상치 못한 불편을 겪었다.   
고혈압 약 같은 경우는 평생 관리를 해야 되는 약이고 약이 크게 변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서 보건지소에서 충분히 처방받아서 드시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3개월에 한 번씩 주기로 약을 처방 받으십니다. 그전에는 가면 그래도 금방금방 좀 오래 대기하지 않고 받았었는데 한 석 달 전부터는 한 2시간 정도 대기를 해야 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최보란/강원 정선군 임계면
임계면 보건지소에는 지난해까지 공중보건의사가 상주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지역 공보의가 일주일에 이틀씩만 순회 진료를 오고 있다. 
최보란 씨 외할머니처럼 정선군 임계면 주민 대부분은 고령이다. 노인인 주민들에게 보건지소는 장이 열리는 날, 오랜만에 읍내에 나온 김에 마음먹고 들러야 하는 곳이다. 줄어든 진료 날짜에 맞춰 아무 때나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강원 정선군 임계면 보건지소에 붙은 안내문. 
최 씨 집에서 보건지소까지는 자가용으로도 15분은 가야 한다. 차 없이 보건지소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하는데 정류장도 멀고, 정류장까지 가는 길마저 가파른 편이다. 그렇다고 보건지소보다 가까운 거리에 민간병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안이 없으니, 주민들은 항의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피해를 감수하고 있다. 

“입원한 게 마음 편하다, 언제든 아이 낳을 수 있으니”…분만 의료취약지 임신부의 말

외할머니뿐만 아니라 최보란 씨 자신도 의사가 없어서, 병원이 없어서 마음을 졸인 적이 있다.
몇 년 전 딸을 임신했을 때 최 씨는 강원 강릉시 도심에 있는 산부인과에 다녔다. 집에서 45km 떨어진 병원이었다. 정선군에서 강릉시까지, 구불구불한 산길을 매번 차로 40분 넘게 달려야 했다. 정선군에는 아이를 분만할 산부인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딸을 낳기 전까지 최 씨와 가족들은 노심초사해야 했다.  
신우신염으로 인해서 조산기까지 와가지고 그렇게 고생을 했었습니다. 한 2주 정도 입원해 있었어요. 조산기 오고 나서는 ‘아, 차라리 입원해 있는 게 마음이 편하다, 언제든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곳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것 같다’라는 느낌이 있었고요. 사실상 (차로) 40분 거리가 짧은 거리가 아니라서 남편이랑 이제 계속 조마조마하면서 지냈던 것 같아요. 남편도 술을 되게 좋아하는 타입인데 술도 제가 출산할 때, 출산 임박할 때까지 한두 달 정도 안 먹으면서 그런 위험에 대비했었던…

최보란/강원 정선군 임계면
정선군은 국립중앙의료원이 지난해 발표한 분만 의료취약지 중 하나다. 정선군을 포함한 분만 의료취약지는 108곳으로 전국 시군구의 43%에 해당한다. 의료 취약 수준에 따라 A·B·C 등급이 부여되는데, 정선군은 이중 A 등급으로 분만 의료가 가장 취약한 지역으로 꼽힌다.
국립중앙의료원이 낸 2023년 의료취약지 모니터링 연구 보고서 일부. 지도에 붉게 표시된 ‘분만 의료취약지 A 등급’을 받은 지역에 정선군도 포함됐다.  
전남 보성군도 정선군과 함께 A 등급을 받은 대표적인 분만 의료취약지다. 보성군에는 종합병원 규모의 산부인과가 있지만 산전 검사와 진찰만 가능하다. 아이를 낳으려면 인근 순천시나 광주광역시까지 가야 한다. 약 50km 떨어져 차로 1시간 전후 소요되는 거리다. 양우열 보성아산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응급 분만 위기에 처한 임신부에게 ‘1시간 거리’는 “굉장히 큰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막 출혈이 계속 있다든지 그 출혈의 원인이 또 태반에 관련된 태반 조기 방류라든지 뭐 그런 경우라든지 아니면 이제 또 태아 상태가 갑자기 태아에 혈액 공급이 잘 안돼서 생기는… 그런 응급 상황일 때 1시간 거리면 굉장히 큰 시간이죠, 사실은.

양우열/보성아산병원 산부인과 과장
양우열 과장에게 진료를 받는 환자 대부분은 노년 여성이다. 애초에 보성에 거주하는 임신부는 이달 기준 43명에 불과하다. 임신부 환자가 없으니, 분만까지 할 수 있는 산부인과가 사라지는 것은 이치상 당연하다. 이른바 ‘인구 소멸’로 환자 수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지역에서, 수익을 낼 수 없는 민간병원들이 빠르게 문을 닫는 이유다. 
양우열 과장은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등 필수 진료과목을 맡아줄 공공병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환자 수가 많지 않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그런 의료(산부인과 등)에서 배제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월급 주기도 급급”…적자의 늪에 빠진 ‘코로나19 영웅들’

하지만 공공병원에도 산부인과는 없다. 전남 순천의료원에서 산부인과가 문을 닫은 지는 20년이 넘었다. 산부인과를 운영하려면 신생아실, 산후조리원 등 시설도 같이 운영해야 하고 관련 장비들도 필요한데 재정 여건상 쉽지 않아서다. 
의료법상 병상수가 100개 이상, 300개 이하인 종합병원은 내과, 외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중에 3개 진료과목을 갖추고 진료과목마다 전속 전문의를 둬야 한다. 운영할 수 있는 병상이 올해 기준 278개인 순천의료원은 산부인과를 제외한 내과, 외과, 소아청소년과를 운영하고 있다. 
순천의료원의 외과 전문의 자리는 재작년만 해도 공석이었다. 계속 지원자가 없어 임금을 높여 모집 공고를 다시 올렸고, 현재는 외과 전문의 2명이 일하고 있다. 힘들게 구한 외과 전문의인데도 이들 중 1명은 응급의학과에 배치해야 했다. 당장 응급의학과에 전문의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외과에 배치된 단 한 명의 전문의에게 수술 일정이라도 생기면, 환자들은 그날 외과 외래 진료를 받을 수 없다. 김대연 순천의료원장은 진료과목별로 최소 3명의 전문의가 있어야 원활한 배후 진료가 가능하지만, 상시 채용 공고를 올려도 지원자가 없다고 말했다. 
(의사들이) 결국은 계속 지원을 안 해서 어쩔 수 없이 또 임금을 더 높게 적어서 사람(외과 의사)을 구하기는 했으나 거기도 또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액티브한, 젊은 액티브한 분을 모셨으면 좋은데 그런 분들은 또 그것(올린 임금) 또한 별로 임금에 대한 메리트가 없기 때문에 지원을 안 하니까 결국 사실은 지금 근무하시는 선생님이 조금 연세가 있으신 분이…

김대연/순천의료원장
필수 진료과목을 개설하고 담당 전문의를 고용하기는커녕, 지역의료원들 대다수는 의료진들 월급 주기에도 급급한 지경이다. 4년 전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로 더해진 만성 적자로 존립마저 위태로운 실정이다. 
2020년 1월 19일, 인천광역시의료원에 국내 첫 코로나 환자가 입원했다. 지역의료원 등 공공병원은 정부 방침에 따라 코로나 전담 병원으로 전환됐다. 그렇게 2년 6개월 가량 동안 공공병원은 코로나 환자만 봤다. 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0년 1월부터 1년 6개월여 동안 코로나로 공공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은 환자는 10만 7천여 명이다. 전체 의료기관의 5% 남짓한 공공병원이 코로나 대응 초기에 전체의 70%에 가까운 환자를 수용했다.
정부는 코로나 유행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은 보상금 성격으로 '회복기 손실지원금'을 지급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이 회복기 손실지원금 예산을  98%가량 삭감했다. ‘코로나19의 영웅’들은 적자의 늪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역의료원들은 땅값이 싼 도시 외곽에 자리한 사례가 많다. 조승연 인천광역시의료원장은 “인천의료원은 공단 한가운데 있다. 급성기 (환자를 맡는) 지역거점종합병원이 있을 위치가 아니다”라고 했다. 5km 떨어진 곳에서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인천의료원에 오려면 1시간 이상 걸린다는 것이다. 제주의료원, 충북 충주의료원 등은 산 중턱에 있다고도 했다. 교통이 불편하고 접근성도 떨어지다 보니 지역의료원은 새로운 환자를 유인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런 와중에 코로나 때 받지 않았던 단골 환자들마저 발길을 끊자, 팬데믹 이전에 70% 수준이었던 지역의료원 병상 가동률은 40%대로 급감했다. 코로나로 병원을 떠났던 의사들 인건비도 그사이 배로 올라 신규 채용도 쉽지 않다. 
정부에서는 한 6개월 정도의 (회복기) 보조금을 주고 “이 정도 줄 테니까, 이걸로 그다음부터 니네가 알아서 해”가 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지금 상당수 (지역)의료원들이 이미 올 초부터 월급을 못 줘서 은행에서 지금 돈을 꿔서 주는 데도 있고 심지어 다른, 그나마 돈이 좀 있는 병원에서 꿔서 주는 데도 있고 아니면 지자체가 좀 여유가 있는 데서는 지자체에서 지원금을 받지만, 그것도 대부분 올해가 지나면 아마 거의 다 월급을 못 주는 상황이 거의 100% 생길 것 같아요.

조승연/인천광역시의료원장
보건복지부가 제공한 전국 35개 지역의료원 결산 자료를 보면,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지역의료원들이 입은 의료 손실 총액은 2조 980억 원 이상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 금액의 76%에 해당하는 1조 5,930억 원 정도만 ‘코로나19 손실보상금’으로 지급했다. 남은 5천억여 원의 적자는 오롯이 지역의료원 몫이 됐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지난달 보도자료를 통해 올 한 해에만 5천억 원이 넘는 의료 손실이 지역의료원들에 추가로 발생할 것이란 전망도 내놨다. 
지난해 12월 4일 국회 앞에서 발언하는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 (출처 : 유튜브 보건의료노조 TV)
이와 반대로 지역의료원의 적자를 보전하는 정부 지원은 해마다 줄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 12월에는 공공병원 노동자들이 국회 앞에서 20일 가까이 단식 투쟁을 벌였고, 올해 예산은 420억 원가량 일부 증액되기도 했다. 
공공병원 몫의 ‘지역거점병원 공공성 강화’ 예산은 윤석열 정부 들어 2년 연속 삭감됐다. 당초 정부 예산안 규모가 지난해 1,511억 원에서 올해 1,416억 원으로 줄었다. 내년에는 763억 원으로 절반가량 감축될 가능성이 높다. 
보건복지부 2025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사업설명자료 중 ‘지역거점병원 혁신지원’ 예산 관련 내용.
‘지역거점병원 혁신지원’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예산이 신설됐지만 총액의 절반이 국립대병원 등 상급종합병원 지원에 중점을 두고 있다. 내년도 예산 중 지역의료원 지원 명목으로 편성된 예산은 의료원 1개소당 평균 25억 원 정도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지역의료원 한 곳당 수십억 원에 이르는 올해 1년 치 적자조차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감염병 전담 병원이었던 지역 국립대학교병원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국립대병원 노동조합 공동투쟁 연대체는 올해 상반기 국립대병원 16곳의 차입금 총액이 1조 3,500억 원을 넘어섰다고 지난달 성명에서 밝혔다. 지난해보다 2배 빠른 속도로 차입금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전공의 공백과 함께 눈덩이처럼 불어난 적자는 간호사를 포함한 국립대병원 노동자들이 감내하고 있다. 국립대병원 측은 경영 적자를 이유로 무급 휴직(휴가), 강제 연차 사용 등 부당 대우를 이미 노동자들에게 강권하고 있다. 
의사의 설명 의무를 위해서 시술 동의가 필요한 경우 이런 경우에는 의사가 하게 되어 있는데 교수들도 바쁘다 보니까 그런 것들을 다 간호사들, PA(진료 지원 간호사)들한테 넘기고… (병동을 줄인 결과) 내과 병동에 있던 직원을 갑자기 “외과 병동 중환자실로 갈래 아니면 너 무급 휴직 갈래” 이렇게 얘기한다는 거죠. 

이요한/의료연대본부 강원대병원분회장
강원대학교병원의 경우 의사들의 이탈을 막겠다며 연 천만 원의 특별수당을 의사들에게만 지급하겠다고 결정했다. 정부의 ‘필수의료 유지 특별수당’ 지침에 따른 것이라고 했지만 노조는 “차별”이라며 파업을 준비했다. 
이요한 의료연대본부 강원대병원분회장은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임금 인상률은 연봉 1.9% 정도밖에 인상되지 않았다. 그만큼 최악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어떻게든 자리를 지켜왔다”고 부당함을 토로했다. 의료 대란으로 제대로 된 진료를 못 받는 지역 주민들 생각에 파업을 망설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강원대병원측이 임금 인상안을 제시해 노조는 파업을 철회했다. 다만 다른 국립대병원에서도 부족한 재정 탓에 비슷한 충돌이 재현될 가능성은 여전하다. 

윤석열 “울산의료원 설립” 공약했지만, 기재부 “경제성 없다”며 설립 무산

윤석열 정부가 처음부터 지역 의료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공공병원 설립을 약속했다. 울산의료원 설립을 공약했던 것이다. 
울산광역시 북부소방서 맞은편 부지는 본래 울산의료원이 지어질 자리였다. 이달 11일 취재진이 현장에 가보니, 추수가 끝난 논과 비닐하우스, 여전히 푸릇푸릇한 밭작물이 자라나는 농경지 모습뿐이었다. 만 2천 평 규모로 축구장 4개 크기에 달하는 이 땅에 병원의 흔적은 아직 없다.
울산광역시 북구 창평동에 위치한 울산의료원 부지 전경. 
울산은 전국 광역시 중 유일하게 지역의료원과 국립대병원이 둘 다 없는 의료취약지다. 코로나 팬데믹 때도 공공병원이 없어 민간병원인 울산대학교병원이 감염병 전담 병원이 됐었다. “울산의료원을 조속히 추진하겠다”는 윤석열 대선 후보의 약속이 울산에는 절실했다. 
울산은 (지역)의료원이 없다 보니까 울산대학교병원이 (감염병) 전담 병원이 된 거죠. 그런데 울산대학교병원은 민간 병원인 거예요. 그러니까 가능하면 통째로 이렇게 병상을 비운다든지 아니면 뭐 이렇게 (다 비우고) 하는 게 아니라 조금 열고 병상을. 환자가 조금 이제 늘면 다시 (병상을) 조금 열고 이런 식이었고… (코로나19 3차 대유행 때는) 그래서 할 수 없이 이제 울산 시민들을 안동의료원, 마산에 있는 마산의료원, 부산의료원 이런 데로 거의 300명이나 가까운 울산 시민들을 그렇게 다 보내야 했거든요.

김현주/울산건강연대 정책위원
그러나 윤석열 대선 후보의 공약은 1년 4개월 만에 좌절됐다. 지난해 5월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 조사 문턱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울산에 공공병원을 만들어 달라고 20년 넘게 요구해 온 김현주 울산건강연대 정책위원에게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울산의료원 설립 사업은 2004년 예비타당성 조사와 마찬가지로 “경제성이 없어” 국비를 투입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공공병원 설립 시 정부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해달라는 것. 적어도 조사의 평가 항목과 내용을 현실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는 현장에 있는 공공 의료 전문가들이 일관되게 펼쳐온 주장이다. 주로 경제성을 보는 예비타당성 평가 기준에 의하면, 저출생과 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가 급격히 사라지고 있는 지역에는 공공병원을 지을 수 없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소방서랑 학교를 지을 때 경제성이 되는지 따지고 짓지는 않잖아요. 근데 정부 예산이 투여된 어떤 사업에 대해서 현행 국가재정법은 병원에 대해서는 이런 예비타당성 조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응급 환자를 살렸을 때의 편익을 어떻게 계산하느냐 하면 살릴 수 있는 사람의 연령대에서 평균적으로 경제적 생산성이 얼마냐, 이 사람의 연령대에서 얼마 정도의 연봉이나 이런 것들을 평균적으로 벌어들이느냐 그래서 ‘이 사람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생산성이 있는 인구냐’에 따라서 이 사람을 살렸을 때 편익을 결정하고 있는 거죠.

이서영/좋은공공병원만들기운동본부 사무국장 (서울 서남병원 근무 의사)
“진주의료원이 없어졌다고 해서 공공 의료가 없어진 게 아니고 공공병원 하나가 없어진 겁니다.” 11년 전 홍준표 당시 경남도지사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했던 말이다. 적자와 효율을 근거로 지역에 있는 공공병원들은 문을 닫았다. 
지난해 1월, 진주의료원 폐원 10년 만에 경상남도의료원 진주병원의 설립이 확정됐지만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내년도 보건의료 분야 정부 예산안을 분석한 정형준 원진녹색병원 부원장은 “(진주병원 등) 건립 예산은 말이 안 되는 예산이다. 설계비 정도를 책정하는 수준에서 멈췄다”고 비판했다. 
정부에서 예를 들면 4대강 사업이라든가 예전에 그런 토건 사업할 때 보시면 통 크게 들어가거든요. 한 번에. 빨리 진행하려고 하잖아요. 근데 공공 의료로 오면 결정을 해놓고도 “아, 우리 이거 예산 집행할 거야. 우리 진주의료원 지을 거야” 말만 하고 아주 적은 금액을 그해 이렇게 쫙 펼쳐가지고 설계하는 데 얼마, 그다음에 처음에 이제 아래 지하 파고 그러는데 얼마, 이런 식으로 계속 잘라가지고 이게 언제 건축이 될지도 알 수 없게…

정형준/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

공공병원에 필요한 건 ‘돈’…“정부가 ‘후진’ 병원 편견 만들어”

진주의료원 사태 이후 11년이 지났다. 상황은 오히려 악화했다. 지역에 사는 노인과 취약계층 주민들은 더 많아졌다. 옥민수 울산대학교병원 예방의학과 교수는 서울의 ‘빅 5’ 병원으로 향하는 지역 환자들이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지역 의료 현장을 방치하고 지역 환자들의 원정 진료를 방관한다면 “소득 불평등 문제도 우리가 눈 감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도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재정 수준도, 인구 밀도도 낮은 농어촌 지역에서 민간병원이 살아남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공병원 설립이 불가피한 배경이다. 사람이 적어 수익이 나지 않는 곳에서 돈도 안 되는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응급의학과 진료를 보는 공공병원은 구조적으로 적자를 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공공병원에 돈을 투입해 병원 적자를 메우고 의료진 처우를 개선하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지역 주민들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기차를 타고 서울의 ‘빅 5’ 병원으로 향할까. 아니면 지역의료원과 국립대병원을 찾게 될까. 다시 말해 “공공병원은 ‘후진’ 병원”이라는 주민들의 편견이 깨질 수 있겠냐는 것이다. 조승연 인천광역시의료원장은 이 편견을 만든 주체인 정부가 주민들의 인식을 바꿀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저 어렸을 때만 해도 대전 출신인데 대전에 충남대학교 병원이 있었어요. 그때는 도립병원이었습니다. 뭐 웬만한 병 걸리면 그 병원을 안 가면 죽었어요. 왜냐하면 나머지 민간 병원들은 규모가 되게 작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도립병원 이게 바로 지방의료원이잖아요. 여기도 옛날 경기도립병원(경기도립 인천의원)이었거든요. 그냥 후진 병원. 왜 그럴까요? 그것이 바로 일본 같은 나라들은 그 당시에 민간 병원이 당연히 많아지고 커질 때도 이런 도립병원 같은 공공병원들을 같은 비율로 계속 키워왔던 거예요. 이런 의료원들이 후지다고 국민들이 인정하고 내 동네에 공공병원을 짓겠다고 그러면 무슨 소리냐고, 서울대병원이나 아산병원이 들어와야지, 이렇게 주장하는 그것이 바로 시민들의 인식을 그렇게까지 만들어 놓은 정부의 책임이죠.

조승연/인천광역시의료원장
이서영 좋은공공병원만들기운동본부 사무국장은 코로나 시절 공공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코로나로 공공병원을 난생처음 와 본 사람들도 만났다. “와보니까 여기도 병원이고 괜찮더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서영 사무국장은 “공공 의료의 모델을 만들 기회가 주어진다면 공공 의료가 훨씬 잘할 수 있는 것도 많다. 잠재력은 많이 있다”고 자신했다. 
지난 2016년 정부는 ‘공공병원 총액예산제’를 검토한 바 있다.
코로나 유행 이후 의료진과 지역 주민 등이 연대해 결성한 좋은공공병원만들기운동본부는 ‘공공병원 총액예산제’를 제안한다. 과잉 진료를 하지 않고 필요한 의료만 제공해도 공공병원을 정상 운영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예산만 정기적으로 지급하라는 것이다. 
정부 예산을 충분하게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법으로 매년 1조 원 규모의 공공보건의료기금을 조성하자는 주장도 한다. 의료 대란을 수습한다고 정부가 쓴 비용이 최근 2조 원이 넘은 상황. “공공 보건의료 정책을 체계적으로 만들어서 집행하면 훨씬 더 알차게 쓸 수 있는 1조 원이 되지 않을까”라는 게 이 사무국장의 생각이다.

법적 강제성 없는 ‘지역 필수의사제’, 국회예산정책처도 비판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정부의 의대 증원으로 배출될 의사들이 과연, 지역에 올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랜 시간 지역 의료 전문가와 주민들이 요구해 온 게 ‘공공의대 신설’과 ‘지역의사제 도입’이다. 의사들을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지역에서 일하도록 강제하자는 게 핵심이다. 
이에 대해 의료계는 거주지 이전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윤석열 정부가 들고 나온 의료 개혁 방안은 ‘지역 필수의사제’다. 의사가 지역 병원과 5년 이상 장기 근로 계약을 하면 매달 4백만 원의 지역 근무수당을 정부와 지자체가 지급하는 제도다.
의료개혁특별위원회 ‘의료개혁 1차 실행방안’ 중 지역필수의사제 관련 내용.
국회예산정책처는 ‘2025년도 예산안 위원회별 분석’에서 이 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지역 필수의사제에 시범 참여할 지자체나 지역 병원, 전문의들의 참여 의사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을뿐더러, 지역 근무수당의 절반은 지자체가 부담해야 해 사업 참여율이 떨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더구나 지역 필수의사제는 의사 개인이 자발적으로 지역 근무를 선택한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법적 강제성이 없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의사들의 지방 근무 기피를 해결한 근본 방안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지금껏 버려졌던 지역에, 공공 의료 현장에 의사들이 알아서 찾아와줄 것이라는 가정은 꿈같은 이야기와 다름없다.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지역에 와 일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변화가 수반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은진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의학과 교수는 의사들을 지역으로 유도하려면 지역의 교육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면서 “이건 사회 전반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각종 정주 여건 개선을 비롯해 수도권과 지역 사이 격차를 줄여 나가야 의사들이 지역에 올 것이라는 말이다. 단순히 의사 연봉을 올려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공병원 설립하라”고 지역 주민들은 외치고 또 외친다

지난달 26일 토요일, 주말 나들이를 떠났을 법한 오후 2시쯤. 경기 부천시의 시민들이 부천역 앞에 모였다. “공공병원 취약지 부천시는 공공병원 설립하라! 감염병 대비 위해 공공병원 설립하라!”라고 구호를 외쳤다. 땡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시민들은 부천역까지 50분 거리를 멈추지 않고 걸었다. 
10월 26일 ‘부천시 공공병원 설립 기원 시민 걷기 행동 및 문화제’ 현장.
이날 시민 걷기 행동을 주최한 부천시 공공병원 시민추진위원회는 지난해 10월부터 3개월간 부천시 시민 8천3백 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부천시 공공의료원 설립 및 운영 조례안’을 시의회에 제출했다. 다음 달 3일에는 이 조례안에 대한 공청회가 예정돼 있다. 
부천 시민이, 국민이 건강보험료를 내고 국민이 병원, 의원을 이용하고 있는데 국민을 제외한 채 국가와 의료인들이 지금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똑같이 부천시에도 공공병원 설립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부천 시민의 이야기를 빼고 국가에서 부천시에서 부천시 의원들이 그다음에 부천시 공무원들이 이야기하면서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조규석/부천시 공공병원 설립 시민추진위원회 상임대표
지역에 닥친 의료 위기.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복잡다단한 고차방정식이 머지않아 풀리길 바라며 부천시 시민과 같은 지역 주민들은 오늘도 요구한다. 내가 사는 지역에 의료가, 공공 의료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소리친다. 
정부의 의료 개혁이 낳은 의료 대란 속에서 지역 환자들을 소외시키지 말라고, 우리를 위한 지역 의료와 공공 의료를 이제는 제공해달라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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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박상희 신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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