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회] 끝나지 않는 유서대필 조작사건

2012년 08월 31일 06시 42분

암 투병 중인 유서대필 피해자인 강기훈씨. 어렵게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20년이 지났지만 강씨에게 이 사건은 떠올리기조차 괴로운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피해자] “그런 거 기억하는 거 자체가 저한테 상처라서 좀 힘들어요. 가면 갈수록 (기억이) 옅어질 줄 알았는데, 자꾸 진해져서... 한 날 한시도 용납할 수 없는 옥살이를 했기 때문에 그 상처는 안 되더라고요. 어떻게 제가 잊어버리려고 해도..”

강기훈씨가 동료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이유로 구속이 되고 3년을 복역하게 된 것은 긴박했던 1991년 정국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91년 5월 당시.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한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이 촉발한 거대한 운동이었습니다.

명지대 1학년이었던 강경대 군이 등록금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습니다. 참혹한 죽음에 분노한 시민들이 노태우 정권에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인위적인 3당 합당을 통해서 여소 야대가 여대 야소로 가고. 정치 개판이 되고 수서사건 비리 터지고 이러면서 국민적 불만이 터져나오고 하니까 강경대 사건이 나오니까 이번 기회에 민주주의 쟁취하자는 싸움으로 간 거예요.”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살인정권이었고, 살인정권은 반드시 퇴진시켜야 한다, 그리고 퇴진한다, 무너지게 돼 있다, 이제 이런 확신들을 갖고 그것을 실현화시키기 위해서 진짜로 정권 타도를 위해서 나갔고 그리고 정권이 흔들흔들 했습니다.”

현실에 절망한 십여 명의 학생 노동자가 정권타도를 외치며 잇따라 분신해 목숨을 버리는 사태까지 일어납니다. 이른바 죽음의 정국이었습니다. 이러자 일부 언론에서 죽음을 방조하는 배후가 있다며 음모론을 제기합니다. 관계당국은 즉각 수사에 나섭니다. 이후 양상은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당시 검찰은 강기훈씨를 지목합니다. 전민연 간부였던 동료의 분신을 방조했다며 자살방조 혐의를 씌우고 분신의 배후라고 공격합니다. 강기훈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거듭 주장했지만 검찰 보수언론의 공격 앞에 무력했습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피해자] “이거 정말 걱정이다. 큰 일이다. 이거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상처가 너무 크다 이렇게 하면, 이런 걱정들을 하고 그랬지. 이거를 뭐 어떻게 해서 (그때의 상황을) 검사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분신을 사주한다던지, 이건 넌센스이죠. 얘기가 될 수 없는. 떠들어 버리니까 나중에 이게(유서대필) 사실처럼 사람들에게 각인이 되고 언론 통해서 써버리고 TV 통해서 방송해 버리고. 없는 게 있는 것처럼 이렇게 되어 버리는 시대였죠.”

검찰이 내세운 증거는 바로 분신한 사람의 유서와 강기훈씨의 필체가 같다는 것. 유서를 대신 써주었다는 혐의였습니다.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체 감정은 숱한 논란에도 증거로 채택됐습니다.

취재팀은 당시 강기훈씨의 필적 감정에 참여했던 관계자를 어렵게 만나 당시 분위기를 들었습니다.

[문서 감정관 유서대필사건 당시 국과수 근무] (당시 91년 재판에서 세 명이 (감정평가를) 공동으로 했다고 하셨잖아요. 선생님은 제대로 못 보신 건가요?) “당연히 (그런 사실이) 없죠. 어떻게 심도 있게 그걸 다 검토를 하겠어요.”

많은 의혹 속에서도 필적이 같다는 국과수와 검찰의 일방적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강기훈씨는 징역 3년을 선고받습니다. 이 사건으로 공안정국이 조성됐고 민주세력은 패배했습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87년 6월만큼의 위기상황이라고까지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집권세력에게) 무엇인가 돌파구가 필요했던 것이죠. 그 돌파구에서 만들어낸 것이, 이 유서대필 사건이라고 하는 감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냈고, 그것이 그런 걸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아마 그랬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 아니었나 싶어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피해자] “생각하기 싫을 정도입니다. 그때 당시 상황은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었으니까.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16년이 지나 2007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는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을 다시 검토합니다. 그리고 1991년과는 완전히 다른 결론을 내놓습니다.

[김갑배 2007년 당시 진실화해위 상임위원(변호사)] “판결의 근거로 삼는 것이 필적감정 결과이기 때문에 필적 감정 결과가 맞는 거냐, 쟁점이 모아지거든요.”

국과수와 일곱 군데 사설 감정기관의 감정 결과 필체가 다르다는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원회는 강기훈씨 사건을 다시 재판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김갑배 2007년 당시 진실화해위 상임위원(변호사)] “유서의 필적과 감정서의 필적이 다르다는 감정이 공동 감정인들의 일치된 감정으로 나왔고. 유죄 판결의 유일한 근거가 필적감정인데, 그 필적감정이 이제 번복된 거죠.”

91년과 2007년의 자료를 동시에 검토한 국과수 출신의 감정 전문가 역시 같은 견해를 내놨습니다.

[문서 감정관 유서대필사건 당시 국과수 근무] (2007년도 감정결과가 맞다고 생각하세요?) “그게 맞다고 생각해.” (2007년도?) “네.”

그러나 이 같은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유서대필 사건은 3년째 해결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변호인단의 두 차례 의견서도, 면담 요청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송상교 변호사] “만약에 지금 자기가 간암에 걸려서 수술을 받게 되는데 향후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자기의 마지막 소원이 법정에서 단 한번이라도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지, 자신의 진실을 한 번쯤 호소하고 밝혀 볼 수 있는 기회가 한 번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마저도 갖지 못할까 너무 두렵고 안타깝다. 이런 얘길 하셨어요.”

대법원이 유서대필사건을 다시 재심해야 한다는 최종 판결을 3년째 미루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송상교 변호사] “거의 3년째가 되어가고 있는데. 3년이 지나도록 법원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결정을 내리고 있지 않은데, 이거는 기록검토의 시간이 걸린 게 아니라 무언가 어떤 이유 때문에 기록검토 자체를 아예 방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죠.”

[대법원 공보관] (계속 기록 검토 중이라는 이유로 미루는 것은 직무유기가 아니냐, 하는 이런 지적들이 있잖아요.) “예. 맞습니다. 예.” (그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일단은 담당 재판부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담당 재판부에서 기록검토를 끝내고 선고를 무작정 안 하고 있다, 이렇게 볼만한 그런 거는 제가 알기로는 없고. 재판부에서 아직까지 기록검토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선고를 못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알기로도 뭐 기간이 오래 걸리는 거는 맞죠, 3년이니까.”

21년이 지났지만 진실이 아직 밝혀질 수 없는 현실. 강기훈씨를 더욱 괴롭히고 있습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피해자] “자기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일이거든요. 20년 전 일이긴 하지만. 자기들이 수사를 주도했고 자기들이 판결한 사건입니다. 이건 못 하는 거예요. 안 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고요. 시간이 참 많이 걸리죠. 걸릴 것 같아요. 세상이 좀 좋게 변하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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