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한 대한민국 소비자] 5. '클래스 액션' 석사논문 윤석열 대통령 선택은?

2022년 10월 05일 14시 00분

21세기 기업은 국경을 뛰어넘어 세계에서 돈을 벌어 들이지만, 소비자는 자신이 사는 나라의 법률과 법원을 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사법제도는 삼성, 애플, 폭스바겐, 옥시 같은 글로벌 기업에 유난히 유리합니다. 이들 회사가 휴대전화의 성능을 속이고 엉터리 살균제를 만들어도 한국 소비자는 좀처럼 배상받기 어렵습니다. 다른 나라 소비자는 한국의 수천 배 넘는 배상을 받습니다. 한국에는 없는 집단소송(Class Action)제도가 있어서입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기업은 더욱 부도덕해지고, 소비자는 더욱 불리해집니다. 글로벌 기업 시대, 한국의 소비자 권리를 5회에 걸쳐 살펴봅니다. 한국에서 집단소송이란 표현이 종종 쓰이지만 사실은 원고가 많은 ‘대규모 소송’을 가리킬 뿐입니다.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번 시리즈에서는 집단소송 대신 불가피하게 ‘클래스 액션’이란 미국식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편집자 주> 
20세기 법학 논문에서 최다 인용된 세계적인 법학자 리처드 포스너는 '클래스 액션'(집단소송)이 필요한 이유를 “미치지 않고서야 30달러짜리 소송을 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 연방항소법원 판사 출신인 그는 다수의 소비자가 작은 손해를 입었을 때를 위해 클래스 액션이 필요하다고 했다. 클래스 액션이 없다면 30달러를 받자고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기업은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소비자 기만행위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세계 석학들 “클래스 액션 목적, 소비자 배상 아닌 기업들 불법 처벌”

그렇지만 30달러씩을 소비자에게 돌려주기 위해 클래스 액션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리처드 포스너는 설명한다. “중요한 점은 피해자에게 배상한다는 것이 아니라, 법률 위반자가 위반행위 비용을 토하는 것”이라고 포스너는 말했다. 기업이 불법행위로 벌어들이는 이익을 사회가 회수하지 못하면, 기업의 부당한 이윤 축적이 반복되어 기업의 소비자 착취가 제도화한다는 것이다. 클래스 액션 도입 주장을 진보 성향 학자들이 아닌 주류 법학자와 경제학자들이 하는 것도, 이 제도가 자유시장 경제를 지키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클래스 액션 도입에 반대하는 학자들 중에는 기업 관련 단체 지원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이른바 일류학자 가운데 클래스 액션 도입에 반대하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 법학계 최고상인 한국법학원 법학논문상 올해 수상 논문도 클래스 액션에 관한 것이다. 판사 출신인 전원열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쓴 ‘집단소송의 소송허가요건 및 금전배상에 관한 연구’이다. 전원열 교수는 이 논문에서 클래스 액션을 도입하기 위해 이러이러한 준비를 해야 하고, 우리 실정에 맞게 이런 점은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클래스 액션이 필요하다는 대전제는 양보하지 않는다. 전원열 교수는 소수 생산자와 다수 소비자로 이뤄진 현대 경제체제에서는 기존 소송제도가 기능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피해자 개인더러 위법 행위자를 상대로 각자 알아서 소를 제기하라고 하는 기존의 수백 년 된 소송제도는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다.” 그러면서 클래스 액션이 필요한 주요한 이유도 기업 등의 위법행위를 막는 것이라고 했다. “20세기 후반 이래 논의의 중심은 (소비자 보상기능에서) 위법행위의 발생 수준을 사회적 적정수준까지 낮추는 기능 쪽으로 많이 옮겨갔다.” 
이러한 생각은 직접 소송을 대리하는 변호사들도 다르지 않다. 기업 상대 소송 경험이 많은 변호사들은, 21세기에 시장 형태가 달라지면서 클래스 액션은 필수가 됐다고 말한다. “클래스 액션이 아닌 일반 민사소송은 원고와 피고 일대일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런 소송제도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원고가 다소 느는 정도이다. 애플 아이폰, 폭스바겐, 삼성전자 갤럭시 사건처럼 추정 소비자가 수십만 수백만 명에 이르는 경우를 예상하지 못한 제도다. 외국에서 클래스 액션을 줄줄이 도입하는 이유는 이 제도 없이 제대로 된 소송을 할 수 없어서다.” 
대규모 피해 소비자들을 대리해서 일반 민사소송을 했던 변호사들은 소송 진행이 굉장히 어렵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대표 당사자를 뽑아서 하는 클래스 액션과 다르게, 대규모 소송은 소비자와 기업 일대일 소송 수천 개를 동시에 하는 셈”이라고 했다. 본인 확인이나 송달부터 제대로 되지 않아 소송이 진행되지도 않고, 이러다가 원고가 숨지면 상속‧승계도 밟아야 하는 등 절차에서 발목이 잡힌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실력 있는 중견 변호사들은 손을 대지 않고, 경험 없는 변호사들이 착수금을 노려 나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결과도 좋을 리가 없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1988년 ‘미국 클래스 액션에 있어 대표 요건에 관한 연구’란 논문으로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국회 다수당인 야당이 클래스 액션에 적극적인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결심하면 클래스 액션이 도입될 가능성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국회 본회의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출처=연합뉴스)
대기업에서 입은 손해를 재판으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소비자들은 물리력을 동원한 시위에 나서기도 한다. 대기업은 클래스 액션에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무슨 패소할만한 위법행위를 해서가 아니다. 기업을 상대로 소송이 남발될 우려 때문이다. 소송을 당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업 경쟁력이 약화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재판 절차가 막혀 있고 이에 따라 시위만 느는 상황이 오히려 기업 이미지와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많다. 요즘 대기업 앞에서 하는 시위 가운데는 소비자들이 사람을 사서 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야말로 기업 이미지를 공격해 배상을 받아내는 사례다. 
21세기 전후로 더욱 많은 나라들이 클래스 액션을 도입하고 있다. 독일,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유럽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도입했다. 우리와 사법제도가 유사한 일본은 2016년 소비자집단소송 제도를 시행했다. 일본에서는 1단계로 소비자 단체가 사업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의무가 있음을 확인받는 소를 제기한다. 법원에서 의무를 확인해주면 2차로 채권자를 확정하는 2단계 소송을 한다. 이처럼 나라마다 조금씩 절차는 달라도, 어쨌든 소비자가 집단으로 보호받는 제도가 대부분 있다. 
세계적인 흐름에 맞춰 한국에서도 클래스 액션 법안이 발의되고 있다. 집단소송법안은 제18대 국회(2008~2012)에서 시작해 최근 제20대 국회(2016~2020)까지 꾸준히 발의됐다. 이미 15년 전인 2008년 제출된 국회 전문위원 검토 보고서는 집단소송제도의 장점으로 기업의 경쟁력이 올라가는 점을 꼽았다. “공정한 경쟁질서를 회복시켜 건전하지 못한 사업자를 퇴출함으로써 건전한 사업자를 보호할 수 있고, 기업활동의 투명성 강화를 통한 경쟁력 제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국회는 별다른 논의를 하지 않았다. 법안은 모두 임기만료 폐기됐다. 
이번 제21대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올라와 있는데 ‘소비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집단소송법안’이 대표적이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제20대에 이어 제21대에서 거듭해 발의한 것이다. 제안 이유를 보면 “불특정 다수의 피해자가 존재하는 소비자 피해 사건의 경우, 1인당 손해액을 초과하는 고액의 소송비용과 장기간의 소송기간에 대한 우려로 소송에 나서지 않아 정작 소송을 제기하는 소비자는 많지 않아 다수 소비자들이 기업의 불법 부당행위로 인한 피해를 감내하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돼 있다. 
박주민 의원은 뉴스타파 인터뷰에서 이번에는 집단소송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제가 2020년 7월 제21대 국회에서 집단소송법을 발의하고 두 달 뒤에는 문재인 정부 법무부에서도 집단소송법 제정안을 예고했다. 동료 의원들도 적극적이었다. 경영계를 비롯해 외부와도 간담회도 하면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기업 쪽 반대가 워낙 심하고 국회에도 부정적인 의원들이 있다. 이래저래 동력이 안 생겨 일단은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하지만 제21대 국회에서 처리해야 하는 중요 법안 중에 하나다.”(박주민 의원) 
이와 관련 문재인 정부 법무부는 2020년 9월 피해자 50인 이상인 모든 손해배상청구에서 집단소송을 허용하고, 기업 등이 증거를 숨기지 못하도록 증거조사 절차를 개선하는 집단소송법 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공청회를 열어 각계 의견을 수렴하기도 했다. 그러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로는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28세이던 1988년 서울대학교에 제출한 법학석사 논문이 ‘미국 클래스 액션에 있어 대표 요건에 관한 연구’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집단소송에 우호적일 가능성도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클래스 액션이 제대로 기능했다면, 대우조선해양이 분식회계를 저지르지도, 이후 하도급 노동자의 격렬한 파업이 벌어지지도, 다시 사측이 노조에 거액 손해배상을 청구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2016년 고재호 전 대우조선해양 사장이 5조 원대 분식회계 혐의를 조사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출처=연합뉴스)

클래스 액션 있었다면, 대우조선 분식회계도 노동자들 파업도 없었을 것

대우조선해양은 경남 거제 옥포조선소에서 점거 농성을 벌인 하도급 노동자들을 상대로 473억 원 손해배상 소송을 지난 8월 제기했다. 회사 측은 “옥포조선소 선박 건조공간을 점거해 선박을 물에 띄우지 못하게 해 피해가 컸다”고 했다. 이렇게 노동자의 파업을 불법이라고 지적하는 대우조선해양은 2015년 5조 원대 분식회계를 벌이다 적발된 회사다. 이 분식회계로 손해를 입은 소액 투자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최근 줄줄이 회사 측 패소로 결론이 나고 있다. 파업이 계속되던 지난 7월에도 수십억 원짜리 패소 판결문을 받았다.
증권 관련 사건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클래스 액션(집단소송)이 인정되는 분야다. 하지만 2005년 도입 이후 지금까지 제기된 소송은 10건에 불과하다. 법원에서 소송허가를 받기가 힘들고, 승소해도 배상액이 적어 유명무실한 제도가 됐다.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건에서도 소액 투자자들은 클래스 액션을 포기하고 일반 민사소송을 벌이고 있다. 애초 증권 분야 클래스 액션이 다른 나라에서처럼 제대로 기능했다면, 대우조선해양이 분식회계를 저지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분식회계가 드러나면서 경영‧노동 여건이 이렇게 나빠지지 않았다면 하도급 노동자의 격렬한 파업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전원열 서울대 교수는 클래스 액션을 이렇게 정의한다. “집단소송이라는 것은 부정적 외부효과(external costs)를 그 해악을 유발하는 주체에게 내부화(internalize)시킴으로써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기여하려는 제도이다.” 다시 말해, 기업이 저지른 해악을 소비자가 아닌 기업에 되돌려주어, 시장을 건강하게 만드는 제도라는 것이다. 국회와 대통령이 클래스 액션을 도입하지 않는다면, 한국 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밀려나고 한국 사회도 병들어갈 수밖에 없다.
제작진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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