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언론, 더 큰 하나가 될 진지를 '짓다'
2019년 02월 21일 15시 09분
‘가짜뉴스'와 ‘기레기’ 시대에 ‘참언론인’의 상징으로 불리는 노장 기자가 있다. 오는 3월 말 CBS 정년퇴임을 앞둔 변상욱 대기자(大記者).
35년 기자 생활을 해온 변상욱 기자의 말과 글에는 일관된 기자 정신이 흐른다. 강강약약(强强弱弱). 강자에게는 촌철살인 직언을 서슴지 않고, 약자에게는 따뜻함과 배려의 시선을 잃지 않는다.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무자비한 기득권 유착형 언론인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일제강점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것과 8.15 해방 이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의 차이는 크다. 변상욱 기자는 언론의 암흑기인 전두환 정권 때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5공 정권 때 보도 기능을 빼앗긴 CBS가 ‘월요특집'이라는 시사프로를 방송한 적이 있다. ‘언론탄압’을 주제로 2시간 특집방송을 냈는데, 이때 “전두환으로 시작해 이순자로 끝나는 그따위 뉴스"라는 시청자의 목소리가 그대로 생방송으로 나가게 된다.
그 증거를 감추려고 원본 테이프를 가위로 잘라서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그 몇분 사이에 정부(체신청)로부터 ‘원본을 제출하시오'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내일은 남산에 끌려가든지 바로 구속이 되겠구나' 했는데, 다시는 방송 마이크에 세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번은 넘어가겠다’고 해서 다른 부서로 발령났죠.
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이던 김중배 선생은 1987년 1월 ‘초각성의 새벽으로'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CBS의 월요특집은 삶의 현장에서 울려오는 겨레의 육성을 아무런 굴절도 없이 전해준다. (중략) 허위의 장막뒤에서 살아 숨쉬는 현실을 목격한다"며 당시의 굴종적 언론 현실을 개탄하고, 그나마 예외였던 월요특집을 성원했다.
수치심때문에 그랬던 거예요. 내가 만약에 슬쩍 피하면 뒤에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거죠.
변상욱 기자는 권력의 압제와 싸울 수밖에 없었던 당시를 회상하며 ‘수치심’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내가 오늘 저 사람들한테 들은 그 억울한 이야기를 내가 오늘 보도 못하면 누군가 보도 안 해줄 거니까 물러설 자리가 없는 거죠.
변상욱 기자에게는 두려움이나 공포심보다 수치심이나 책임감이 더 컸던 것 같다.
화려한 조명하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일만 좇는 언론의 속성과 달리 변상욱 기자가 그의 책, ‘인생, 강하고 슬픈 그래서 아름다운’에서 별과 별사이 어둠에 대해 말한 부분은 그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볼 때 머무는 시선이 어디인지 짐작케 한다.
우주 전체는 어둠으로 돼 있고, 거기에 별이 좀 떠 있는 거나 마찬가지듯이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아니면 평범한 사람들 보다 더 밑에서 자기를 깎아내면서 겨우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의 땀을 편하게 가지고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들이 위에 있는건데 그 맨 윗 사람들만 바라보는 건 언론의 사명이나 책무는 아니라 봅니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섰던 패기는 20년이 지나 이명박 정권 때 다시 기회를 만나게 된다.
2012년 뉴스타파가 처음 세상에 선보일 때, 변상욱 기자는 칼럼으로 참여했다.
변상욱 칼럼은 뉴스타파 주간 프로그램의 마지막 코너였는데, 뉴스타파를 보는 이유가 변상욱 칼럼 때문이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인기 코너로 자리를 굳혔다.
그로부터 4년 뒤 실제로 광화문에 켜진 수백만개의 촛불은 꺼지지 않고 타올랐고, 부패 권력은 무너졌다.
그렇다면, 변상욱 기자에게 뉴스타파는 어떤 의미였을까.
뉴스타파는 저한테는 운전에 비유한다면 기어 변속의 의미가 있어요. 그때 커브를 틀어야할 지점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뉴스타파가 기어를 바꾸고 핸들을 틀 수 있도록 그 지점에서 나타나준 거죠. 오디오 시대에서 비주얼 시대로 갔고, 올드 미디어에서 뉴 미디어로의 새로운 지경을 살짝 엿보게 했어요. 제 일생에서는 기어변속과 핸들링의 그 지점이었어요.
변상욱 기자는 뉴스타파가 언론노조에서 나와 새로운 사무실을 찾아 나서고 있을 무렵인 2013년초, 독립언론들이 함께 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뉴스타파가 뭔가 시작한다면, 많은 새로운 독립미디어들의 인큐베이터 역할도 해줄 수 있어요. 스튜디오도 빌려주고 장비도 함께 쓸 수 있다면 어떨까.
35년 기자생활을 마감하는 이달 말, CBS를 정년퇴직하면 ‘대기자’라는 직함이 ‘교수'와 ‘앵커’로 바뀐다. 국민대에서 초빙교수로 재직하며, YTN에서 뉴스 앵커로 새출발하기 때문이다.
격변의 시대 ‘공포심’과 ‘수치심’을 맞바꾸지 않았던 언론인 변상욱 기자.
그가 뉴스타파에 바라는 것은 기성 언론의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양심에 의해서 독립적으로 만드는 저널리즘’이라는 좌표가 기왕이면 레거시 미디어(기성언론)보다 저 앞에 항상 찍혀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영상제작 : 박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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