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국100년 특별기획] 족벌사학과 세습⑤  일본 '제국대학' 출신의 부역자들(상)

2019년 07월 17일 08시 01분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民國 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시리즈를 2018년 8월부터 2019년 하반기까지 계속해서 보도합니다. 올해는 1919년 3.1 혁명 100년,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뉴스타파는 지난 100년을 보내고 새로운 100년을 맞는 중요한 시점에서 이 특별기획을 통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을 지배해 온 세력들을 각 분야 별로 분석하고, 특권과 반칙 및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통찰을 99% 시민 여러분과 함께 이끌어 내고자 합니다.

뉴스타파는 <民國 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프로젝트를 통해 일제와 미 군정, 독재, 그리고 자본권력의 시대를 이어오면서 각 분야를 지배해온 세력들이 법과 제도를 비웃으며 돈과 권력을 사실상 독점하고 그들만의 특권을 재생산한 현재의 지배계급 시스템을 가감없이 들춰내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미래 세대가 과거 지배 체제가 극복된, 그래서 보다 정의롭고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나라에서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며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시스템을 함께 모색해 나가려 합니다. -편집자 주

‘순위와 결과’ 지상주의 교육의 뿌리는 일제 식민·국가주의에

1968년 12월 5일 박정희는 이른바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다. 당시 국민학교(1996년 3월 1일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뀜)를 다녔던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국민교육헌장(전문)을 선생님과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던 기억을 갖고 있다.

국민교육헌장은 박종홍·안호상·이인기·유형진을 비롯한 기초위원 26명과 심사위원 48명이 초안을 작성하고 1968년 11월 26일 국회의 ‘만장일치’ 동의에 따라 박정희가 ‘대통령 박정희’의 이름으로 직접 발표했다. 이 헌장은 이후 모든 학교 교과서의 첫머리에 인쇄되고 새마을 운동과 함께 20여 년간 ‘국가적으로’ 보급되었다가 1994년에 사실상 폐기됐다.

당시 학교에선 국민교육헌장을 의무적으로 외워야 했기 때문에 반세기(50년)가 지난 지금까지도 국민교육헌장을 떠올리면, 외우지 못해 체벌 받은 트라우마가 살아난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직 국민교육헌장의 전부 혹은 일부 구절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10대 때 받은 교육의 영향과 충격은 오래 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욱 교육과 교육 시스템이 중요하다.

▲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일제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고 70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나라 교육계와 교육제도, 그리고 학교 교육 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아직도 속을 들여다보면 일본 제국주의식 교육의 흔적이 곳곳에 드러난다. 요즘 ‘자율형 사립고’(약칭 자사고) 재지정과 취소를 둘러싼 논쟁의 뿌리도 따지고 보면, 일본식 경쟁과 결과 지상주의에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탈락과 희생, 혹은 좌절을 전제로 한, 나의 합격과 승진 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슬픈 모습이 남아있다.

일본 ‘천황제’와 ‘국가주의’의 첨병, ‘제국대학’ 시스템

1948년 정부 수립 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교육 제도와 교육계를 좌지우지한 사람들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다 보면, 일본이 군국주의에 바탕을 둔 인재 양성 목적으로 설립한 일본의 ‘제국대학’(시스템)과 만나게 된다.

제국(帝國)대학. 글자 그대로, 우리가 ‘일왕(日王)’으로 부르는 ‘천황제(帝)’와 ‘국(國)가주의’가 결합돼 있는 이름이다.

메이지 유신(1868년)을 거쳐 군국주의의 외길을 걷던 일본이 1886년 발표한 제국대학령(令) 제1조는 제국대학이 “국가의 수요에 부응하여 학술기예를 교수하고 그 온오(蘊奧: 학문이나 기예의 깊고 오묘함: 편집자 주)를 공구(功求: 힘써 연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국대학령을 발표한 1886년 도쿄(東京)제국대학 개교를 시작으로, 교토(京都)제국대학(1897), 도호쿠(東北)제국대학(1907), 규슈(九州)제국대학(1910), 홋카이도(北海道)제국대학(1918), 게이조(京城)제국대학(1924), 다이호쿠(臺北)제국대학(1928), 오사카(大阪)제국대학(1931)과 나고야(名古屋)제국대학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9개의 제국대학 중 한국의 서울(경성)과 대만(대북)의 제국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7개 제국대학이 일본에 있다.

일본 정부가 제국대학과 졸업생들에 제공한 특혜와 특권, 그리고 제국대학들의 운영과정을 살펴보면 ‘제국’대학이란 이름은 글자 그대로 실상과 완벽하게 부합한다. 제국대학을 졸업한 일본인들은 졸업과 동시에 ‘특권적 위상’을 부여받았다. 1892년까지는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생은 무시험으로 (고급)관료로 임용됐고, 제국대학 교수들은 국가의 고급관료로 신분보장과 함께 높은 급료가 지급됐다.

1918년 ‘대학령’이 선포될 때까지 일본에서 대학은 오로지 제국대학 뿐이었다. 게이오(慶應)대학과 와세다(早稲田)대학 등이 대학 명칭을 사용했지만, ‘사립와세다대학’처럼 대학 이름 앞에 ‘사립’을 붙여 사용했다. ‘학사(學士)’라는 호칭도 제국대학 졸업생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적 칭호였다.

일본 문부성의 1909년 통계에 따르면, 도쿄제국대학 일본인 전체졸업생의 44%가 관공청의 관료로, 24%는 관·공립 학교의 교원으로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쿄제국대학 일본인 전체 졸업생의 2/3인 68%가 관(官) 분야로 진출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 제국주의와 패망 이후 일본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 엘리트들이 이끌어온 관료국가였으며 일본의 군부 파시즘을 지탱한 것도 도쿄제국대학의 엘리트 관료들의 카르텔이었다는 것이 ‘제국대학의 조센징’의 저자 정종현 교수(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의 평가다. 정종현 교수의 이 같은 평가는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로 출범한 전두환 정권의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을 육군사관학교 출신 실세들과 서울법대 출신 정치인과 당료들이 좌지우지한다고 하여 이름붙인 ‘육법(육사+서울법대)당’을 연상시킨다. 서울법대의 전신은 경성제국대학의 법학부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 얼마나 많은 한국인(조선인)들이 일본의 7개 제국대학에 유학을 간 것일까? 지난 6월 발행된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란 긴 부제가 붙은 ‘제국대학의 조센징’에 따르면, 일본 본토의 7개 제국대학에 유학하여 ‘학사’를 받은 조선인 졸업생은 모두 784명이었다. 여기에 선과(選科), 전수과(專修科), 위탁(교육)생에다 입학한 후 이러저런 이유로 학업을 포기한 사람까지 합치면, 일본 소재 7개 제국대학에 유학한 조선인은 1천 명이 넘을 것으로 저자 정종현 교수는 파악했다.

1924년 서울에서 개교한 경성제국대학의 경우 1942년까지 졸업한 조선인 누적총수가 629명인 것과 비교하면, 일본의 7개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앞에서 도쿄제국대학 일본인 전체 졸업생의 68%가 관(官) 분야에 근무했던 것처럼,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들도 비슷하거나 높은 관계 진출 비율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아래 도표를 보면,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의 7개 학부 중 법학부를 졸업한 조선인이 각각 60명(36.8%)과 102명(46.6%)으로 나머지 6개 학부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이들이 졸업 후 취업하거나 진출한 분야를 보자.

도쿄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 중 64명이 관료로 출발, 조선총독부와 만주국에서 근무하거나, 일본 본토에서 관료 혹은 준관료로 근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도쿄제국대학 조선인 전체 졸업생 163명의 39.3%에 해당한다. 그러나 163명의 도쿄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 중 행적을 확인하기 어려운 41명을 제외하면, 관료가 된 비율이 52.5%가 된다.

교토제국대학의 경우, 조선인 졸업생 중 관료가 된 이가 96명으로 전체졸업생(236명)의 40.7%에 해당한다. 행적이 확인 안 된 55명을 제외한 비율로 따지면, 역시 절반이 넘는 53%가 관료가 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 다음으로 일본, 조선, 만주국의 대학과 전문학교 교원이나 해방 후 남한과 북한의 교수직을 지낸 졸업생들을 보면, 도쿄제국대학의 경우 53명으로 전체 졸업생의 32.5%에 해당하고, 행적 미확인자(41명)를 제외하면, 43.4%에 해당한다. 교토제국대학 졸업자는 전체졸업생의 19.5%에 해당하는 46명이 교수직을 거쳤고, 행적 미확인 졸업생을 제외하면 25.4%가 되는 셈이다.

도쿄제국대학의 경우, 관료와 교수(교원)가 된 조선인 졸업자를 합치면 117명으로 행적이 확인된 조선인 전체 졸업생(112명)의 무려 95.9%에 해당한다. 교토제국대학의 경우에는 이 비율이 78.4%에 해당한다.

▲ 일제 강점기 도쿄·교토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과 취업(진출) 현황. 도표는 ‘제국대학의 조센징’ 저자(정종현)가 <도쿄대학졸업생씨명록(1950)> 등의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내용을 재작성한 것임

1968년 국민교육헌장, 1948년 폐기한 일왕의 ‘교육칙어’에 뿌리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국민교육헌장도 그 뿌리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 일왕(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발표한 ‘교육에 관한 칙어(교육칙어: 教育勅語)’에 있다. 1890년 10월 발표된 교육칙어는 일본 제국 신민들의 수신과 도덕 교육의 기본 규범을 정한 것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 식민지에서 시행된 조선교육령과 타이완 교육령에서 교육 전반의 규범을 정했다.

패전 이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사령부의 1946년 교육칙어 금지 통첩을 받은 일본 정부가 1947년 교육기본법을 공포·시행하며 교육칙어를 배제하였고, 1948년 일본 중의원이 “교육칙어 등의 배제에 관한 결의”를 하고, 이어 참의원이 “교육칙어 등의 실효 확인에 관한 결의”를 통해 교육칙어가 학교 교육에서 효력을 상실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사라진 교육칙어가 20년 뒤 ‘식민지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국민교육헌장으로 이름만 바꾼 채 살아난 것이다. 일왕의 교육칙령과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은 그 제정 취지와 내용 등에서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점을 찾아내기 어렵다. 천황제 하의 제국주의 ‘신민’이나 공화국의 ‘국민’이 용어만 다를 뿐, 통치의 대상으로 완벽하게 같다는 것을 시대를 달리하는 두 나라의 교육칙령이 보여준다.

▲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 이인기. 친일인명사전에 아버지와 함께 이름을 올렸고,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참여한 뒤, 숙명여대와 영남대 총장을 지냈다.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참여한 기초위원 26명 중에서 특히 이인기(李寅基: 1907-1987.06.28.)는 단연 눈에 띤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교육학)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 지금의 교원)를 지냈다가 1939년 만주 간도성에서 시학관(視學官: 고종이 1894년 학무부를 설치했을 때 처음 직책으로 학교 수업 내용을 감찰, 지도감독하는 자리)으로 일했다. 1940년에는 ‘건국시묘창건기념장’을 받았고  친일단체 ‘흥아청년구락부’에 가입해 활동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고국에 들어오자마자 경성경제전문학교(경성경전) 교장을 맡다 1년 뒤에 서울상대로 통합되자 서울상대의 학장을 지낸다. 그의 가족 중에는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띤다.

우선 그의 부친 이우정(李愚正: 1880.08.28.-1956.11.03.)은 법관양성소를 거쳐 1909년 판사가 된 뒤 일제에 부역하다 각종 훈장을 받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이우정은 안동지청 판사로 재직하던 1919년 3월 안동군 일직면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 이구덕에게 보안법 위반을 적용해 태형 90대를 선고했다.

이우정, 이인기 부자(父子)는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이인기는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거치는 동안 주요 대학의 교수자리와 요직을 쉬지 않고 거쳐 갔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참여하고 숙명여대와 영남대 총장을 잇따라 지낸다.

도쿄제대 졸업생 이인기, 자신과 부친, 장인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이인기의 장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인 두산의 모태가 된 ‘박승직 상점’을 연 거상(巨商) 박승직(朴承稷: 1864.07.25.-1950.12.20.)이다. 박승직은 서울과 지역을 오가며 포목상 등을 통해 번 돈으로 일제 총독부에 막대한 금액의 국방헌금 등을 제공하고, 일본의 전쟁에 협조하고 전시동원을 위한 여러 단체에서 적극 활동했다. 박승직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

이인기는 6녀 1남을 뒀는데, 그의 맏사위(이덕용)는 서울의대 교수를 거쳐 한국보훈병원장을 지냈다. 차녀(이근원)의 남편은 현재천 고려대 교수로 조부가 현상윤 고려대 초대 총장이다. 6.25 때 납북된 현상윤(조선임전보국단 이사) 전 고려대 총장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 이인기의 3녀(이근수)는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의 큰아버지(김용택)의 손자(김종언)와 결혼했고, 4녀(이근영)의 남편(김중헌)은 민주공화당 원내총무와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김택수(1926-1983) 전 IOC 위원의 장남이다. 이뿐 아니다. 이인기의 여동생의 아들이 유종하(1936) 전 외무부 장관으로, 이명박 대통령 시절 대한적십자사 총재도 지냈다.

이인기를 비롯, 일본으로 건너 간 조선인 유학생들은 대부분 중학교, 고등학교(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제국대학에 입학해 졸업하는 동안 감수성이 예민한 10대와 20대 초반 10년 안팎의 세월을 보냈다. 이러다 보니 이들은 사실상 ‘일본인화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학연과 혈연 등으로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일본의 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들과 그 후손들은 오늘도 ‘또 하나의 가족’이 돼 대한민국 교육계를 지배하고 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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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림 전문위원, 박중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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