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와 차별, 망각...아리셀 참사 유족들은 얼어붙은 길 위에 있다

Nov. 19, 2024, 11:38 AM.

지난 6월 24일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리튬전지 제조공장 아리셀에 불이 났다. 23명이 숨지고, 9명이 다쳤다. 사망자 중 18명은 중국과 라오스에서 온 이주노동자였다. 이들은 회사로부터 어떤 안전교육도 받지 못했다. 출구도 소화기도 없는 공장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폭발하는 작업장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우리나라의 열악한 노동 현실에 이주노동자까지 희생된 최악의 참사였다.
지난 6월 24일 경기도 화성시 소재 '아리셀' 공장에서 폭발이 발생해 23명이 숨지고 9명이 다쳤다.
참사 발생 다섯 달이 되어 간다. 유가족들은 생업을 포기하고 공장과 국회, 그리고 거리에서 나서 진상 규명을 외쳤다. 수사를 통해 참사의 배경에 불법 파견과 군납 비리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책임자 박순관 아리셀 대표와 그의 아들 박중언 총괄본부장은 구속됐고, 관계자 6명이 불구속 기소됐다. 
유족들은 여전히 거리 위에 있다. 회사 앞에 천막을 세우고, 무기한 농성 투쟁에 들어갔다. 영하의 날씨 속 얼어붙은 길 위에서 이들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뉴스타파가 여러 차례 농성장을 찾고, 유족들로부터 못다 한 이야기를 들었다.

얼어붙은 길 위, 찢어진 꽹과리의 한 맺힌 소리

경기도 광주시 양벌동, 공장들 사이로 난 좁은 도로 위에 파란색 천막 두 개가 들어섰다. 맞은 편엔 ‘에스코넥’이란 회사가 있다. 32명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진 아리셀의 모기업이다.
좁은 길에는 쉼 없이 꽹과리 소리가 울린다. 참사의 유족들이 때리는 꽹과리다. 대부분 찢어져 있다. 이미 찢어진 꽹과리가 여러 개다. 김태윤 아리셀 참사 유가족협의회 공동대표는 망가진 꽹과리를 '유족들의 한'이라고 말했다. 유족은 '회사가 이주노동자들을 무시한 증거'라고 말했다. 
꽹과리를 치는 사람들 뒤로 피켓을 든 사람들이 있다. 한국인도 있고, 중국인도 여럿이다. 피켓엔 이렇게 쓰여있다. '에스코넥 경영진은 유가족과 협의하라', '불법파견, 군납비리, 에스코넥은 살인자다'.  
지난 10월 31일, 아리셀 참사 유족들의 천막 농성장 모습이다. 유가족협의회는 에스코넥 경영진의 사과와 피해 보상을 위한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 유가족협의회에는 23명 희생자 중 13명의 유족이 함께하고 있다. 
△ 11월 7일, 경기도 광주시 양벌동 에스코넥 앞에 설치된 아리셀 참사 유가족협의회 농성장에서 선전전이 펼쳐지고 있다.
 
 
유가족협의회는 지금까지 여섯 차례 교섭요구안을 보냈지만, 한 번도 답을 듣지 못했다. 유족들은 묵묵부답인 회사 앞에서 10월 10일부터 천막 농성에 들어갔다. 하루 세 번, 1시간 넘게 꽹과리를 친다. 
에스코넥은 유족의 요구에 응할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아리셀은 별개의 회사라는 이유다. 하지만 유족들의 생각은 다르다. 에스코넥과 박순관 대표는 아리셀의 지분 100%를 가지고 있다. 두 회사 모두 대표는 박순관 씨다. 2020년 5월, 에스코넥의 리튬전지 부서를 분리해 설립한 것이 아리셀이기도 하다.
아리셀 참사의 발단에는 에스코넥 시절부터 이어져 온 ‘군납 비리’가 있다. 수사에 따르면, 아리셀이 수년간 노동자들을 불법 파견받아 규격 미달의 군납용 배터리를 만들었다. 이런 불량 제품을 납품하기 위해 국방기술품질원의 품질 검사를 수년간 조작해 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분사 이전인 2017년부터 계속됐던 일이다. 불량 배터리는 결국 폭발했다. 

대표는 언론 앞에서만 사과했다

유족들이 가장 바라는 건 사과다. 박순관 대표는 참사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대국민사과를 했다. 정작 유족에게는 사과하지 않았다. 지난 7월 경기도청의 주선으로 한 차례 유족들과 만났지만 이후 대화는 다시 끊어졌다. 박 대표 구속 이후, 유족들이 접견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회사에 급여명세서 등 자료를 요청했지만 이것 역시 협조받을 수 없었다.
박 대표는 지난 10월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출석을 거부했다. 재판 준비 때문이라고 답했다. 박 대표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 등 11명을 변호인으로 선임한 상태다. 첫 재판은 지난달 21일 시작됐다. 
아리셀 참사 법률지원단장을 맡고 있는 신하나 변호사는 “재판에 제출된 자료를 보면, 박 대표가 무죄 취지로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유족들은 금전적 보상만이 아니라 최소한의 사과나 잘못의 인정을 원하고 있는데, 지금 주장이나 태도로 봐선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싸움의 끝은 기약이 없다.
 
 
 

국적 따라, 비자 따라 목숨값 차별

아리셀 측은 사과와 대화 대신 유족들과의 개별 합의를 원한다. 죽음의 값은 다르게 매겨진다. 아리셀은 국적에 따라, 비자에 따라 다른 보상합의안을 제시했다. 
재해 사망에 대한 회사의 보상금은 일반적으로 사망 시점으로부터 만 65세까지 일했을 때 받을 것으로 기대되는 수입, 즉 일실수입에 따라 지급된다. 아리셀 참사와 같은 중대재해의 경우, 사업주는 피해자에게 손해액의 5배 범위 안에서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  
참사 발생 직후 아리셀 측은 중국 동포 유가족에게 중국 길림성 임금 기준을 적용한 보상안을 내밀었다. 길림성은 중국 동북 3성 안에서도 임금이 가장 낮은 지역이다. 박순관 대표 등 아리셀 관계자들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처벌불원서를 작성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7월 말까지 합의하면, 5천만 원을 웃돈으로 준다는 말도 있었다.
유족은 분통을 터뜨렸다. 죽음에 대한 위로와 사과 한번 없이, 어떻게든 적은 돈으로 사태를 덮으려고 하는 회사의 태도 때문이었다. 죽어서도 차별받는 현실에 다시 한번 분노했다. 가족이 피땀 흘려 일하던 회사는 유족이 안타까워 고구마와 떡을 가져다주는 농성장 주변 마을 주민만도 못하다고, 유족들은 가슴을 두드렸다. 
신하나 변호사는 “한국말이 서툰 일부 유족들은 회사가 빨리 합의해야 좋다는 말에 떠밀려,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합의안과 처벌불원서에 서명한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외국인 차별이라는 여론의 비판이 나오자, 아리셀 측은 11월 초 국내 임금 수준을 적용한 새 보상합의안을 전달했다. 하지만 차별은 계속됐다. 아리셀 측은 한국인과 영주권자(F-5 비자)에게는 2024년 일용직 ‘건설업 보통 인부’ 임금(하루 16만 5,545원)을 적용하고, 재외동포(F-4)와 고용허가(H-2) 비자로 입국한 희생자에게는 ‘수동 물품 포장원’ 임금(하루 8만 6,768원) 기준으로 보상금을 책정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일을 했지만, 어느 비자로 입국했느냐에 따라 보상금은 두 배 차이가 났다. 
유가족협의회는 차별 없는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김태윤 공동대표는 “유족협의회가 원하는 건 내·외국인을 차별하는 개별 합의가 아닌, 희생자 모두에게 정규직 임금을 적용하고 중대재해에 따른 책임을 인정하는 배·보상을 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생된 파견 노동자들이 하는 일은 정규직 노동자와 다르지 않았다. 용접이나 부품 절단 등 위험하고 숙련이 필요한 작업도 파견 노동자들이 맡았다. 하지만 파견 노동자들이 받은 돈은 시간당 9,860원, 최저임금이었다. 
파견법상 리튬전지를 생산하는 제조업 직접 생산공정에 노동자를 파견하는 것은 불법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무분별한 확대를 막기 위한 법적 장치다. 청소, 경비 등 파견이 허용된 32개 업종에도 고용노동부 허가를 받은 업체만 파견업을 할 수 있다.
희생된 이주노동자들은 모두 인력공급업체 ‘메이셀’과 ‘한신다이아’를 통해 아리셀에 파견됐다. 두 회사는 이름만 다르고 대표가 같은 무허가 업체였다. 안산, 화성 등 이주노동자가 밀집한 지역에는 이렇게 이름을 바꿔가며 인력을 불법 파견하는 용역업체가 여럿 있다. 
두 파견회사의 주소는 아리셀과 에스코넥 안산사업장과 같다. 아리셀은 이들 업체에 회사 주소를 빌려주고, 인력을 공급받았다. 전형적인 ‘위장 도급’, ‘불법 파견’이었다. 참사 당시, 아리셀 직원 103명 중 절반 이상인 53명이 파견직이었다.
아리셀 참사 중국인 유족 대부분이 경기도 시흥 정왕동에 산다. 정왕동은 중국 동포들이 밀집해 있는 동네다. 인력공급업체 메이셀은 이곳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용직 채용 공고를 올렸다. ‘배터리 생산, 포장, 검수’하는 곳이라며, 파견 금지 업종을 대놓고 공고했다. 시흥에서 화성까지 통근버스를 운행한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다. 인력업체는 사람들을 통근버스에 태워 화성 아리셀 공장으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유족들은 참사 전까지 이 파견업체들이 무허가 업체인 줄 몰랐다. ‘불법 파견’이 뭔지도 몰랐다. 그저 ‘아르바이트하러 간다’, ‘반찬값 벌러 간다’, ‘좋은 회사에 취업했다’는 가족들의 말을 믿었다.
희생자들은 애초에 직접 고용됐어야 할 노동자들이었다. 유족들이 정규직과 같은 수준의 배·보상을 하라고 요구하는 이유다. 박순관 대표는 에스코넥에서만 지난해 11억 원을 임금으로 받았다. 

아직 아이에게 엄마의 죽음을 말하지 못했다

농성장에서 만난 유족들은 취재진에게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김일(44) 씨는 아리셀에서 희생당한 중국인 노동자 고 이해옥(40) 씨의 남편이다. 그의 휴대폰 속엔 떠나보낸 가족 사진, 중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 사진이 담겨 있다. 김씨가 취재진에게 휴대전화 속 사진을 하나 보여줬다. 그의 여섯 살배기 아들의 얼굴이다.
아들은 현재 중국에 있다. 유산을 겪고, 어렵게 가진 아이였다. 한국 땅에서 잘 키워보려 했지만 여력이 되지 않았다. 결국 올해 4월 중국에 있는 할머니에게 보냈다. 빨리 돈 벌어서 영주권을 받는 것이 생전 아내의 꿈이었다.
김씨는 강릉의 건설 현장에 나가 돈을 벌었다. 아내 이해옥 씨는 남편이 출장 간 동안 반찬값이라도 벌겠다며 지난 5월 아리셀 공장에 들어갔다. 아들이 다시 돌아오는 7월까지만 일하겠다고 했다. 그런 아내가 6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아리셀 참사 희생자 고 이해옥 씨가 생전 6살 아들,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유가족 제공)
김씨는 엄마 없는 한국으로 아들을 데리고 올 엄두가 나지 않는다. 6살 아이에게 아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죽어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말할 수 없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고 말한다.
아들한테는 그냥 엄마가 배가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어요. 아들을 계속 중국에 두니까, 요새는 ‘아빠도, 엄마도 자기를 버렸다’고 해요. 지금 상황을 6살 아들한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회사에서 사과라도 받았다면, 아들에게 말할 도리라도 있을 텐데…아직은 할 수가 없어요. 한국에서 돈 많이 벌어서 영주권 따려고 그랬어요. 그래서 열심히 출장 다니며 일한 거였어요. 아들도 한국에서 잘 키워보려고 했는데, 한국이란 나라가 우리 아들 가슴에 대못을 박았어요. 나중에 아들에게 엄마의 죽음을 어찌 말해야 할까요?”

김일 / 아리셀 참사 희생자 고 이해옥 씨 남편
연변 출신 중국 동포인 이순희 씨 부부는 참사로 딸을 잃었다. 20년 전 한국에 왔을 때 부부는 첫째 딸을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 맡기고 왔다. 빨리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흘러 대학까지 졸업한 25살 첫째 딸이 부모와 함께 살겠다며 한국에 들어왔다. 딸은 지난 4월부터 아리셀에서 일했다. 딸은 이제 돈을 벌게 됐다고 자랑했다. 그 아이는 취업 두 달 만에 부모의 곁을 떠났다.  
부부는 일손을 놓고 진상규명에 매달리고 있다. 이씨는 유족협의회 대표를 맡았다. 남은 열다섯 막내딸을 시흥 정왕동 집에 두고, 매일을 농성장에서 보낸다.   
어느 날 딸이 회사에서 주급으로 돈을 받더니, 이제부턴 월급으로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일을 잘해서 그런 거라고 좋아했어요. 이제 엄마 아빠한테 손 벌리지 않을 거라고도 하고… 불법 파견 그런 거 몰랐어요. 그냥 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는데…거기가 그렇게 위험한 곳일 줄은 알았다면, 어떤 부모가 보냈겠어요?

이순희 / 아리셀 참사 희생자 고 엄정정 씨 어머니
중국 동포 허현우 씨는 아내 강순복(52) 씨를 잃었다. 아내는 강남 신세계 백화점 안의 김밥집에서 10년 간 일을 했다. 4년 전, 허씨와 재혼하면서 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시흥 정왕동으로 이사했다. 
아내 강씨는 계속 일하고 싶어 했다. 통근버스가 있는 공장 일을 찾았다. 아리셀이 조건에 맞았다. 나중에는 강씨의 동생 강금복(47) 씨도 같은 곳에서 일했다. 자매는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 고 강순복·금복 자매처럼, 아리셀에선 가족끼리 함께 일하러 갔다가 같이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허씨는 아리셀이 위험 물질을 다루는 공장인 줄도 몰랐다. 아리셀 모집 공고에는 '좋은 일자리'라고 쓰여 있었다. 
사실 참사 나기 이틀 전에요. 회사에서 한 번 폭발 사고가 있었는데요. 그날 저녁에 아내가 같이 밥 먹으면서 ‘회사에서 무슨 폭발 사고가 있었다’고 얘기했어요. 그 당시에도 아내가 웃으면서 얘기했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거든요. 회사에서도 위험하다고 알려주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저렇게 위험할 곳일 줄은 몰랐죠. 우리 노동자 중 누가 알았겠습니까. 리튬전지가 폭탄이 될 수 있다는 걸...

허현우 / 아리셀 참사 희생자 고 강순복 씨 남편
아리셀 공장에서는 지난 3년간 네 번이나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참사 이틀 전인 6월 22일에도 전지 발열로 인한 폭발 사고가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발열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폭발 위험성을 알리지도 않았다.
참사 당일, 발열 문제가 있었던 전지들이 담긴 트레이는 후속 공정이 이뤄지는 ‘패킹룸’으로 옮겨졌다. 그곳이 이번 참사가 발생한 아리셀 공장 3동 2층이다. 희생된 이주노동자 대부분이 이곳에서 일했다.
리튬전지는 압력이나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때문에 소량으로 분리해 보관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아리셀은 발열 문제가 있었던 전지들이 담긴 트레이들을 출입구 쪽에 그대로 쌓아뒀다. 옆에는 3만 여개 이르는 완제품이 쌓여 있었다. 
한 시간 뒤, 한 개 트레이에 있던 전지에서 폭발이 시작됐다. 다른 전지까지 연쇄 폭발하며 40여 초 만에 공장 전체를 집어삼켰다. 검경 수사를 통해 드러난 아리셀 참사 당일의 상황이다. 

불과 60m 앞, 파견 노동자만 갈 수 없던 비상구

참사로 처남댁 고 박영화 씨를 잃은 유족 이승철 씨는 취재진에게 희생자 한명, 한명을 소개했다. 
한 집은 자식이 죽고, 한 집은 마누라가 죽고, 한 집은 아들이 하고 며느리가 둘 다 죽고, 한 집은 형제간에 죽고, 사촌지간이 같이 죽은 집도 있어요. 사망자 대부분이 50살 밑의 젊은 사람들이에요. 거기가 위험한 곳인 줄 알았다면 가족끼리 같이 들어갔겠어요? 한국이란 나라가 이렇게 허술하게 공장을 관리하는 나라인 줄 우리가 알았겠어요? 죽은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고, 억울하고…

이승철 / 아리셀 참사 희생자 고 박영화 님 유족
고 박영화 씨 유족 이승철 씨가 에스코넥 울타리에 걸린 참사 희생자들의 영정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아리셀 공장에 가족끼리 함께 일하러 갔다가 같이 사망한 사람들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씨는 지금까지 발표된 경찰 수사 결과 중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 있다고 했다. 아리셀이 파견 노동자들에게는 비상구로 나갈 수 있는 출입 카드조차 지급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경찰 수사에 따르면, 불이 난 공장 3동 2층에는 비상구로 통하는 2개의 문이 있었다.  
하지만 파견직인 이주노동자들은 대피하지 못했다. 작업자들이 비상구까지 가기 위해선 ID카드를 찍거나, 지문 인식을 해야 열리는 출입문을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ID카드와 지문 등록 권한은 정규직 노동자에게만 있었다. 
아리셀 참사가 발생한 공장 3동 2층 작업장 도면. 비상구로 나가는 파란색 출입문(A, B)은 보안카드가 있는 정규직만 출입 가능했고, 비정규직이 출입할 수 있는 주 출입구(D)는 발화지점 바로 뒤에 있어 대피가 불가능했다. (자료 : 경기남부경찰청)
화재가 발생한 작업장에서 비상구까지 거리는 최대 60미터다. 최초 화재 발생 후 폭발까지 걸린 시간은 37초가량, 경찰은 제때 탈출 안내만 있었다면 충분히 대피할 수 있는 거리였다고 봤다. 실제 같은 현장에 있었던 비정규직 노동자 2명은 먼저 대피하는 정규직의 뒤를 따라가 살 수 있었다. 
최초 폭발 이후, 대피를 위한 37초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대다수의 피해자는 고립된 채 사망했습니다. 피신하거나 탈출을 시도한 흔적도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대피하라, (정규직을) 따라 같이 나가라, 탈출하라는 안내만 제대로 했었어도 상당수 희생자를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굉장히 안타깝습니다.

김종민 / 경기남부경찰청 광역수사대 단장
고 김재형 씨의 고모, 김신복 씨
수많은 희생자 중 농성장의 유족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사람이 있다. 아리셀 참사 희생자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스물셋의 고 김재형 씨다. 
중국동포였던 고인 김씨는 두 살 때부터 어머니 없이 친척들 손에 컸다. 중국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올해 4월 가족 초청 비자로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같이 살자는 친척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한국 온 지 두 달 만에 ‘아르바이트로 용돈 벌러 간다’며 아리셀에서 들어갔다. 첫 월급도 받아 보지 못하고, 김씨는 목숨을 잃었다. 
키 180cm가 넘는 건장한 청년이었던 김씨는 희생자 중 가장 작은 주검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농성장의 유족 김신복 씨는 불에 탄 김씨의 시신 모습이 떠올라 제정신으로 지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 애가 키가 180이에요. 그렇게 큰 애가 얼굴도 없고, 팔 다리도 없고, 팔꿈치만 남았어요. 그 큰 애가 그렇게 주먹만큼만 남아서 왔다고요. 한국 온 지 두 달 만에…내가 그걸 다 봤어요. 제 정신으로 살 수 있겠어요? 그런 우리에게 어떻게 사과 한 마디를 안 해요. 어떻게…

김신복 / 아리셀 참사 희생자 고 김재형 씨 고모
고 김병철 씨의 아내, 최현주 씨
거리 위 선전전이 끝났는데도 혼자 남아 계속 꽹과리를 치는 사람이 있다. 얼굴엔 표정이 없다. 아리셀 참사의 한국인 희생자 고 김병철(52) 씨 아내 최현주(53) 씨다. 
최씨는 충북 지역 언론사 ‘충북인뉴스’의 15년 차 기자다. 세월호 참사, 오송 참사, 이주노동자 산재 등 참사의 피해자들을 누구보다 열심히 취재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참사의 유족이 됐다. 취재수첩을 내려 놓고 꽹과리를 들었다.
제가 기자로 왔다면, 지금 상황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까, 어떤 걸 기사 제목으로 정할까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그냥 한 사람의 아내이자 유족이니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 소식을 알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에요.

최현주 / 아리셀 참사 희생자 고 김병철 씨 아내
남편 고 김병철 씨는 아리셀의 연구소장이었다. 배터리 관련 전문가였던 김씨는 오너 일가인 박중언 본부장의 거듭된 스카우트 제의에 1년 반을 고사하다 결국 소장직을 맡았다. 그렇게 공들여 영입한 직원인데, 참사 이후 박 본부장은 돌변했다. 최씨가 남편의 유품을 찾으러 회사에 갔던 날 본부장은 유족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옥 같은 시간이었어요.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란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싸워서, 130일이 넘는 시간 동안 경찰과 노동부 조사 통해서 박순관 대표가 구속됐잖아요. 그런데 아리셀이나, 에스코넥이나 저희한테는 사실상 사과 한마디가 없었어요. 그게 너무 분노스럽고요. 저희들한테 중요한 것 중 하나인 피해 보상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어요. 얼핏 보기에는 돈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사과의 일환이거든요. 만나서 대화해서 협의하자고 하는데, 아예 무대응이에요.”

최현주 / 아리셀 참사 희생자 고 김병철 씨 아내
남편은 참사 당일 아리셀 공장의 다른 동에 있다가 폭발 소리를 듣고, 불이 난 3동을 찾았다. 현장에 뛰어 들어간 유일한 관리자였다. 끝까지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부부에게는 대학생인 두 딸과 고등학생인 아들이 있다. 남편은 내성적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참 잘했다. 혼자 남은 최씨는 아이들이 있는 충북 청주와 경기도 광주를 매일 오가며 농성장에 나온다. 
마음 한편엔 다른 유족에 대한 미안함도 있다. 그의 남편이 한국인, 정규직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희생자 중 한국인이 5명이고 대부분이 이주노동자였잖아요. 만약 한국인 희생자가 더 많았다면, 높은 직급이 더 많았다면 이렇게 아직까지 사과를 안 했을까, 하고 생각해요. 그런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죠. 저는 아니지만, 중국 동포 분 중에는 훼손 안 된 시신이 거의 없어요. 팔 다리는 물론이고 머리까지 없는 분들도 되게 다수거든요. 그런데 회사 관계자들은 우리를 단 한 번 들여다보지 않아요. 참 비참하고, 인간이 무섭고, 에스코넥 직원들도 우리 같은 노동자인데 왜 그럴까, 생각하면 불쌍하기도 하고…

최현주 / 아리셀 참사 희생자 고 김병철 씨 아내

132일 만의 장례 “사과받고 보내주고 싶었는데...”

일부 유족들은 경영진의 사과를 요구하며 넉 달 넘게 장례를 미뤄왔다. 그러다 지난 3일로 모든 유족이 장례를 마무리했다. 사과에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허현우 씨는 가장 마지막으로 장례를 치렀다. 참사 132일 만에 아내와 처제를 보냈다.  
억울해서, 억울해서 (그동안 장례를) 못 치렀어요. 회사한테 사과라도 받아야 아내를 보낼 도리가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지금 회사의 태도로 봐선 가망이 없어 보여요. 그렇다고 몸이 다 쪼그라든 아내를 계속 차가운 냉동고에 둘 수도 없잖아요…사과받고 장례 치르길 바랐는데 참 끝까지 나쁜 사람들입니다.

허현우 / 아리셀 참사 희생자 고 강순복 씨 남편
‘아리셀 막내’ 고 김재형 씨의 고모 김신복 씨도 이날 장례를 치렀다. 김씨는 조카의 장례 이후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 있는 김씨는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지난 넉 달 동안 진상규명한다고 국회고, 법원이고 돌아다니며 싸우느라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국 사과도 못 받고 재형이를 보냈다. 너무 억울하고 원통하다.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이라 이리 무시하는 것이냐”며, 전화를 붙잡고 울었다.
지난 13일까지 경기도 화성시청 안 1층에 설치돼 있었던 아리셀 참사 희생자 분향소
 
23명 희생자 모두의 장례가 마무리되면서 지난 14일, 화성시청은 청사 내에 차렸던 분향소를 철거했다. 유족들에 대한 화성시의 숙식 지원은 다음 달로 종료된다. 
매주 화요일, 유족들은 농성장이 있는 경기도 광주를 떠나 서울로 향한다. 목적지는 삼성그룹의 서초사옥이다. 삼성에 책임자 에스코넥과의 거래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며 추모 집회를 연다. 
에스코넥은 삼성의 1차 협력사다. 삼성전자는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부품을, 삼성 SDI는 리튬전지 배터리 부품을 납품받는다. 유족들은 에스코넥이 삼성의 협력사 행동규범을 전면으로 위반했기 때문에 거래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성전자 협력회사 행동규범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비상사태 대비, 산업재해 예방, 안전보건교육(모국어 등 적절한 언어로 적절한 안전보건교육 실시)를 충실히 지키지 않는 업체와의 거래를 중단할 수 있다. 삼성 SDI의 파트너사 행동규범 내용도 유사하다. 
지난 11월 5일, 삼성 사옥 앞 추모제에 참석한 금속노조 충남지부 삼성 SDI지회 정기백 씨는 “삼성은 협력회사 행동규범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그에 대한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며 “거래 중단을 원하지만, 당장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객관적인 현장실사를 하고 같이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지적했다. 
고 이준봉 씨의 아버지, 이병렬 씨
참사로 희생된 고 이준봉 씨의 아버지 이병렬 씨도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삼성을 향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이 생각난다”며 “다시는 청년들이 참사로 죽지 않도록 삼성이 해결에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취재진은 유족들의 주장에 대해 입장을 물었지만, 삼성 측은 답변하지 않았다.

억울한 죽음이 잊혀지지 않도록

입동이 찾아온 지난 11월 7일, 취재진은 경기도 광주 농성장을 다시 찾았다. 5시 30분경. 에스코넥에서 퇴근하는 차량이 꽹과리 치는 사람들 사이를 하나둘 빠져나간다. 말을 걸거나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다. 
꽹과리 시위가 끝나고, 날이 어둑해졌다. 달 뜬 농성장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쿠팡노동조합 등에서 온 노동자들이다. 
△ 11월 7일, 경기도 광주시 양벌동 에스코넥 앞에 설치된 아리셀 참사 유가족협의회 농성장에서 추모제가 진행되고 있다.
 
 
 
 
추모제는 조촐하다. 유족들은 연대 속에서 위안을 찾고, 또 상실을 느낀다. “매일 농성장에 오고,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좀 위안이 되지만, 늘 곁에 있던 아내를 대체할 순 없죠. 너무 그립고, 너무 보고 싶고, 미안하고…”. 고 강순복 씨의 남편 허현우 씨의 말이다.
늦가을 차가워진 날씨, 유족들이 핫팩을 손에 쥐고 밤을 맞을 준비를 한다. 모여든 사람들은 시흥 정왕동으로, 충북 청주로, 경기도 화성으로 흩어진다. 일부는 천막으로, 또 일부는 천막 밖에 머문다. 한뎃잠을 잔다. 
지난 18일, 아침 기온은 영하로 떨어졌다. 초겨울 한파가 예보됐다. 농성장에는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아픈 사람들도 하나 둘 늘고 있다.
오늘은 손이 얼어서 꽹과리를 치는 데 애 먹었네요. 너무 추워서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가 하면서 버티고 있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버텨야지요. 참으면서 버텨야지요.

이승철 / 아리셀 참사 희생자 고 박영화 씨 유족
참사가 발생한지 5개월 가까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부쩍 줄었다. 추모제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줄었다. 이대로 아리셀 참사가 잊힐까 유족들은 두렵다. 취재진을 만난 유족들은 "잊혀지지 않게 언론이 힘써 달라”고 말했다. 
농성장에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사고가 언제 일어났어요?’ 하고 묻기도 해요. 아직도 아리셀 참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아직 해결된 게 하나도 없는데, 사고가 왜 일어났는지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잊혀지는 거 같아요.

여국화 / 아리셀 참사 희생자 고 이해옥 씨 사촌언니
우리 유가족들 매일매일 피눈물 흘리며 살고 있는데, 유족들이 돈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알아주세요.  우리 애들한테 미안하다는 그 사죄라도 받고 싶어요. 회사가 뭘 믿고 이렇게 버티는지 진짜 모르겠어요. 언제쯤 이게 해결되고, 언제쯤 애들 편안하게 보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다시는 우리나라가 이런 참사가 없고, 국민들 상처가 없고, 평등한 나라가 됐으면 좋겠어요.

김신복 / 아리셀 참사 희생자 고 김재형 씨 고모
지금 저희가 싸우는 싸움은 단순하게 우리 유가족들만을 위한 게 아니에요. 불량, 불법으로 만들어진 배터리들이 또 다른 누군가한테는 참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진상을 규명하자고 저희는 싸우고 있는 거니까요. 유족들이 고통스럽게 싸우고 있다는 거 기억해 주시고, 응원해 주셨으면 해요.

김태윤 / 아리셀 참사 유가족협의회 공동대표
뉴스타파는 아리셀과 에스코넥 측에 사과와 보상 등을 위한 유족의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언론에 발표된 수사결과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는지 등을 물었다. 아리셀 측은 답변하지 않았다. 에스코넥 측은 “아리셀과 에스코넥은 무관하다”고 답했다. 
아리셀 참사 관련 박순관 대표 등의 두 번째 재판은 오는 25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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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홍여진
촬영기자김기철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