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들] 리영희 연작 다큐멘터리 2부 〈기자〉

Dec. 09, 2020, 07:16 PM.

12월 5일은 우상과 권력에 맞서 진실을 추구한 언론인이자 지식인이었던 리영희 선생의 10주기입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는 리영희의 삶과 그의 글쓰기를 다시 비춰보는 연작 다큐멘터리를 방송합니다. 이성의 힘으로 평생 진실을 좇았던 그의 삶이 가짜 뉴스가 난무하는 '탈진실'의 언론 생태계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두 번째, 그의 기자 생활을 정리한 2부 <기자>편입니다.
1957년 리영희는 7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합동통신사 기자로 입사합니다. 당시 응시생 293명 가운데 5명을 뽑았는데, 5등 꼴찌였다고 합니다. 그 때 나이 29살. 리영희는 영어와 프랑스어 등 외국어에 능숙해 외신부(국제부)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국제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 나갔습니다. 
당시 기자 리영희의 주 관심사는 "제국·식민주의 국가들이 지배하는 구질서에 대항하는 각 대륙 인민의 '현상타파' 운동"이었습니다. 즉 "1950년대 후반 치열하게 전개됐던 베트남 민족의 반식민지 민족해방 투쟁과 사회혁명의 몸부림, 미국 자본가들의 뒷받침을 받는 쿠바의 오랜 괴뢰 정권과 착취 체제를 타도하려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주도하의 쿠바혁명 투쟁과 승리" 등이었습니다. (대화 2005년 192쪽) 
▲ 합동통신 기자 시절 풀브라이트 장학 미국연수 중인 리영희 ( 하버드대, 1959년)
전 세계의 피압박 인민의 백인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들에 나는 열정적인 공감을 느꼈어요. 그런 전 지구적이고 전 인류적인 세계사적 대변혁의 관한 뉴스를 만들고 알리고 하는 외신기자로서의 역할에 나는 완전히 몰두했어

리영희 <대화> 2005년 , 한길사 
젊은 기자 리영희가 마주한 한국의 현실은 이승만 독재 정권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리영희는 이승만 정부의 독재와 부패에 분노합니다. 그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익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고발하는 평론기사를 여러 차례 기고합니다.    
▲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이승만 자유당의 폭정을 알리는 리영희 기자의 평론기사 
그거 예삿일이 아니죠. 상상도 못 할 일이지. (워싱턴포스트) 사람들하고 어떻게 연을 맺어서 거기다 글을 보냈는지, 그 것 자체가 보통이 아니죠. 그걸 어떻게 했는지 과정은 모르겠어요. 한국 사태를 미국에 알려야겠다고. 그 사람(리영희) 이승만 독재에 대한 반감이 대단했으니까 어떻게든 미국에 가서 알려야겠다. 이런 게 있었으니까 그렇게 한 거죠

이왈수 전 한국경제 논설위원 (합동통신사 시절 동료기자)
1959년 진보당 당수 조봉암 씨를 간첩혐의를 뒤집어씌워 사형에 처하는 천인공노할 이승만의 장기집권 야욕을 확인하고 국민의 반독재 여론을 대표했던 경향신문을 폐간 처분하는 것을 보면서, 그때 그때 그런 문제들을 중심으로 이승만 정권의 포악성을 고발하는 평론기사를 써 보냈어요. (중략) 원고를 그냥 우편으로 보낼 수는 없지. 한국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미군 장교들이나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서 미국에 가면 우편함에 넣어달라고 부탁했지 

리영희 <대화> 2005년 , 한길사 205-206쪽 
마침내 이승만은 권좌에서 쫓겨납니다. 민주주의가 승리합니다. 4 ·19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리영희는 ‘한국에 새날의 여명이 밝았다’는 제목으로 워싱턴포스트에 기사를 보냅니다. 
 ▲ 리영희 기자의 워싱턴포스트 기고문 (1960년 7월 8일)
하지만 4 ·19혁명은 1년 만에 역풍을 맞습니다. 1961년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합니다.  그해 11월 박정희는 미국을 방문합니다. 미국 정부로부터 쿠데타를 승인받을 요량이었습니다. 박정희의 수행기자단 가운데 기자 리영희도 있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이 끝난 후 박정희 측은 회담이 성공적이었다고 발표합니다. 수행 기자들은 박정희의 의도대로 기사를 작성합니다. "미국, 한국경제5개년개획 적극 지원을 확약" "미국 강력한 원조 확약" 등 박정희의 방미가 성공적이었다는 상찬보도 일색이었습니다. 
▲ 박정희와 케네디 회담 (1961년 11월 13일)
하지만 기자 리영희는 달랐습니다. 미국 정부 관계자를 상대로 회담에서 실제 오고 간 내용이 어땠는지 취재했습니다. 당시 리영희 기자가 워싱턴에서 보낸 기사에 "케네디 대통령은 박의장에게 한국 5개년 경제계획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미 의회에서 얻기가 힘들 것"이라는 내용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경향신문에 실린 리영희 기자의 기사 ( 1961년 11월 16일 )
다른 사람들은 다 수행기자들이라는 게 공보관 이야기만 듣고 쓰는데 이 양반은 딱 와서 워싱턴포스트 가서 주필과 국제부장한테 물어보니까 아닌 거야. "이게 니네 뭐 아무것도 없어. 그거 빈손이고 파병해야 될지도 모르고 니네 원조 계획이라는 건 전부 조건부야. " 거기서 대통령 방미 취재하면서 특종을 보내잖아요. 그러니까 그때 합동통신 있을 때니까 그러니까 이제 미치겠는 거죠. 저런 기자가 따라와 갖고 수행 취재하면서 문제가 많다는 걸 기사로 보낸 거죠 그걸 모든 신문이 받고

최영묵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 리영희 (1966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입맛대로 기사를 쓴 기자들은 이후 정부 요직으로 진출하는 등 승승장구합니다. 하지만 리영희 기자는 권력에 야합하는 대신 진실 보도의 길을 택했습니다. 기자로서 진실을 찾아가는 험난한 가시밭길의 시작이었습니다.
내가 출세하는 머리가 있는 젊은이였다면 (기사에) 소금도 치고 간장도 치고 적절히 했을텐데 . 그대로 써버렸단 말이야. 그러니까 국내 모든 신문 방송이 내 특종을 받아 가지고 했으니 내가 안전하겠어요? 본국(한국)에서 소환장이 왔다고 보여주더라고요. 그때 이제 내가 큰일 당하겠구나 그대로 소환 당했죠.

리영희 (2005년 광주MBC 대담)
베트남 전쟁과 국군 파병에 비판적이었던 기자 리영희는 1969년 박정희 정권의 압력으로 조선일보에서 강제로 해직 당합니다.  첫 번째 해직이었습니다. 훗날 리영희는 그의 자서전이자 회고록인 <대화, 2005년>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리영희 연작 다큐 3부 <진실>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취재 기자는 세 가지 스타일이 있어. 발로 뛰는 기자, 남의 기사들을 모아서 쓰는 기자, 안건의 연구를 통해서 접근하는 기자, 이 세 가지예요. 나는 이 세 번째의 연구·조사하는 방식이 주특기였기 때문에 혼자 정보원을 만나는 그런 취재는 필요가 없었어요.   

<대화> 2005년 한길사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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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작가이경은
글 구성 정재홍
연출김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