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평가원, 검정 승인 근거 '납본 증명서'도 허위 내용으로 신청

Oct. 22, 2024, 04:30 PM.

역사교과서 검정 신청 자격 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한국학력평가원이 허위 내용을 담은 신청서를 국립중앙도서관에 제출하고 국제표준도서번호와 납본 증명서를 발급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등은 그동안 이 납본 증명서를 근거로 해당 교과서에 대한 검정 심사에 절차적 문제가 없다고 주장해왔다. '납본'이란 도서관 장서로 요건을 갖춘 출판물을 발행하거나 제작할 경우 일정 부수를 법령으로 정하는 기관에 의무적으로 제출하는 것을 말한다.
뉴스타파는 지난 8월부터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검정에 합격한 한국학력평가원의 문제를 연속 보도했다. △출판 이력 조작 △교육부 공무원의 필진 참여 △베끼기 의혹 등 문제가 잇따라 드러났다.
교과서 검정을 신청하려면 '최근 3년 이내 검정출원 교과 관련 도서를 한 권 이상 출판한 실적'을 증명해야 한다. 지난해 한국학력평가원은 2007년 출판한 문제집(왼쪽)의 표지만 바꿔 발행 등록(오른쪽)하는 수법으로 이 같은 출판 실적을 조작했다.

'납본 증명서' 있으니 괜찮다?... 그것도 허위 정보로 신청

한국학력평가원은 지난해 7월 이른바 ‘표지갈이' 문제집을 만들었다. 16년 전 자신이 발행한 ‘엑시트 한국근·현대사 340제’라는 문제집(이하 '2007년 문제집')의 내용을 그대로 활용해 ‘한국사2 적중 340제’로 이름과 표지만 바꾼 문제집(이하 '2023년 문제집')을 다시 냈다. 2023년 문제집은 △속표지 △목차 △단원 해설 △수록 문항 및 연번 △총 쪽수(159쪽) △내부 디자인까지 2007년 문제집 내용과 같았다. 
출판사는 이 같은 표지갈이의 편법을 통해 ‘최근 3년 사이 검정 출원 관련 도서를 1권 이상 출판해야 한다'는 검정 신청의 최소 자격 요건을 맞췄다. 뉴스타파가 이 사실을 보도한 이후, 국회 국정감사 등에서는 해당 출판사의 교과서 검정을 취소해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을 비롯한 교육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관계자들은 여전히 해당 교과서 검정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정상적으로 발급한 납본 증명서를 제출했기 때문에 절차상 하자가 없다는 이유였다.
한국학력평가원은 2023년 ‘한국사2’라는 서적을 발행해 중앙도서관에 납본한 실적을 교과서 검정 신청 요건 증빙자료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제출했다. (강경숙 의원실 제공)
취재진은 한국학력평가원의 납본 신청 내역과 국립중앙도서관의 증명서 발급 과정을 살펴봤다. 출판사가 신규 출판물에 대한 납본 증명서를 발급받으려면 ①국제표준도서번호 ISBN 발급과 ②납본, 두 가지 절차를 차례로 거쳐야 한다. 이 절차들은 각기 독립된 절차이지만, 실무적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 ISBN·ISSN·납본 시스템'을 통해 함께 처리된다. 
국회 교육위원회 백승아 의원실이 국립중앙도서관으로부터 받은 2023년 문제집의 ISBN 신청서를 보면, 한국학력평가원은 신청서 곳곳에 허위 정보를 기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출판사는 '저자명' 항목에 회사 직원인 김 모 씨의 이름을 기입했다. 하지만 2023년 문제집이 내용물을 그대로 가져온 2007년 문제집의 실제 저작자는 당시 현직 교사 3명이었다. 
신청서의 ‘판 유형’ 항목에도 허위 정보가 기재됐다. 2023년 문제집은 2007년 문제집을 다시 펴낸 '중쇄(재쇄)본', '복원판'이지만, 출판사는 이 책을 ‘초판’으로 기입했다. 김수기 한국학력평가원 대표는 지난 8일 교육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2023년 문제집이 '복원판'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한국학력평가원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제출한 ‘표지갈이 문제집’ ISBN 신청서. 저자와 판유형 항목에 허위 정보를 기입했다.
중앙도서관은 초판이 아닐 경우 기존 도서와 중복된 판본인지, 편집상 유의미한 변화가 있는지 검토하는 실무 절차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납본 수용 여부도 판단한다. 하지만 출판사 측이 2023년 문제집을 '초판'이라고 허위 기재하면서, 중앙도서관은 별도의 검토 절차 없이 납본을 수용했다. 허위 정보를 제출해 표지갈이 책의 납본 증명서를 발급받고, 그 증명서를 토대로 교과서 검정 신청의 최소 자격까지 얻은 셈이다. 

'표지갈이' 납본 차단하는 규정·지침 있어도 무용지물

이 문제는 지난 18일 국립중앙도서관 등을 상대로 열린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도마에 올랐다.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23년 문제집은 납본 대상이 될 수 없다"라며 "해당 책의 납본을 취소하라"라고 국립중앙도서관 측에 요구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을 “(한국학력평가원이) 국립중앙도서관을 속이고 업무를 방해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김희섭 국립중앙도서관장은 “규정상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됐다”라며 “(납본) 취소 규정도 없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국립중앙도서관 자료 납본 수집 규정국립중앙도서관 납본 수집 지침, 국립중앙도서관 장서개발지침 등 관련 규정·지침에는 중앙도서관이 2023년 문제집에 대한 납본을 거부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들이 나온다. 해당 규정·지침에 따르면, 중앙도서관은 △공중 배포 및 이용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사적 출판물 △이미 공개된 자료를 편집하여 창작적 요소가 미미한 자료 등을 '납본 제외 자료'로 간주해 납본 수집에서 제외할 수 있다. 
중앙도서관 측은 한국학력평가원의 2023년 문제집이 '사적 출판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책은 납본에만 활용됐을 뿐 시중에서 판매된 적이 없다. 지난 8일 국정감사에 출석한 김수기 한국학력평가원 대표 역시 “판매하려고 만든 게 아니다”라고 거듭 주장하기도 했다.
'장서개발지침'은 사적 출판물과 관련해 '공중 배포 및 이용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개인 등이 발행·제작한100책 이하의 개인 저작물'이라는 보다 상세한 기준을 규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2023년 문제집의 실물이 확인된 것은 중앙도서관이 납본 받은 두 권이 전부다.
또 지침에는 '이미 공개된 자료를 표지, 저자, 판권지 등을 달리하면서 원본과 동일한 내용으로 편집하여 창작적 요소가 미미한 자료'를 납본 제외 자료로 적시하고 있다. 표지갈이로 나온 책에 대한 납본 절차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지침이 있지만, 실제 중앙도서관 등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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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홍우람 조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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