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변론 :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 – 고 장준하 선생
2013년 04월 03일 14시 00분
권력이 못다 지운 역사 속 장준하 선생은 독립투사이자 통일에 앞장 선 언론인 그리고 정치가였다. 이 시대는 흐릿하게나마 이런 면모의 장준하 선생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를 사랑했던 아내와 아이들에게 장준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희숙 여사는 장준하 선생을 애정표현에 서툴렀던 남편으로 기억하고 있다. 무뚝뚝한 성격에 웃음소리 한 번 크게 낸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청렴하고 강직하게 살았던 사람. 너무나도 청빈한 남편 때문에 가난을 면한 날이 없었다. 그런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원망보다는 존경하는 마음이 더 컸다.
영화 제목처럼 ‘한 번의 결혼식과 두 번의 장례식’을 치른 김희숙 여사.
‘인터뷰 타작’ 3회에서는 고 장준하 선생의 아내 김희숙 여사의 영화 같은 삶을 담는다.
우리 결혼할 때에는 반지도 없었거든.(아 정말요? 결혼식 때 뭐 못 받으셨어요?) 없어. 까만 고무신 신고 결혼했어. 그리고 악수 한 번 하고... 가락지가 어디 있어? 그런데 교회 장로님들이 3돈 짜리 가락지를 가져다 줘서, 너무 너무 좋아서 따로 모셔 놨는데 일주일 있더니 비서가 들어와서 그 금가락지를 달래. 그래서 “왜?” 그랬더니, (장 선생님이) 그것 좀 내오라시던데요. “왜?” 이랬더니, “글쎄요. 하여튼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내가 큰 가락지 낄 팔자는 아니니까, 줬어. 그리고 저녁에 ‘그건 어떻게 했어요?’ 하니까 선거운동할 때 운동해 준 사람이 며느리를 얻는데 코트를 해주려고 맡겼는데, 돈이 없대. 그래서 그 사람한테 가락지를 줬대. 잘 하셨어요. 그랬어요. 내가 나이가 어려도 꼭 나를 대접을 해줬거든. ‘그랬어요, 이랬어요, 그거 미안해요’ 이러지. ‘어쩌구 저쩌구’ 이런 거 없어. 보통 사람들 같이 ‘여보, 이거 어찌 어찌해’ 라고 하면 참 좋겠어. 부부싸움이라도 한 번 해보면 좋겠는데, 싸워 볼 건더기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한 번 싸움을 해보려고 시비를 붙었다가 내가 더 미안해서 혼났다니까...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새 옷을 다 입혀 드리면 ‘고마웠어’ 하고 이렇게 껴안아 주잖아? 아무 말도 안 해.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답변도 없고 다 입고 그냥 쭉 가는 거야. 아무리 우스운 일이 있어도 ‘하하하’ 이렇게는 안 웃어. 코만. 그래서 애들이 엄마, 엄마, 아버지 코 벌렁 벌렁 했다, 코가 움직였다, 고 우리 딸들이... 딸들이 이쁘다고 해서 이렇게만 했지. 막 살갑진 않았어. 내가 하도 속상해서 그때가 사상계를 할 때야. 나도 한 번 월급을 좀 타봤으면 좋겠어요, 그랬더니 그래요? 그러더니 그 이튿 날 돈을 10만 원을 가져다 줬어요. 봉투를 31개를 만들고, 가계부 이만한 거 하나 사서 금전 출납부에다가 날짜 쓰고 신났어. 봉투에다가 전기료, 무슨료, 무슨료 다 썼었어.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더니, 여보 그저 미안하지만 그거 나한테 다시 빌려줄 수 없어? 그래서 이렇게 쳐다 보니까 내가 며칠 있다가 드릴게요, 그래. 그러니까 나는 가계부에 1월 몇 일 날, 그거만 몇 개 써 놓고는 봉투도 서른 한 개 써 놓고는 가만히 있었어요. 그 다음에는 받아 본 일이 없거든.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장준하 선생님 부인으로 다시 살라고 하면 다시 사시겠어요?) 아이고. 사는 건 속도 안 썩이고 좋기는 한데 그놈의 돈. 그래서 그거 생각하면.... 다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돈을 준다면 살겠어.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한 달치만 줬어도... 그때 산에서 떨어질 때, 산에 갔었을 때 이거 끼고 갔었거든? 고대로 있어. (사건이 벌어진 날, 돌아가셨던 날. 그 날 기억하세요? 어떤 일이 있었어요?) 그전부터 자신도 아마 뭐가 있었는지 준비를 했었어. 마을에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산소가 있거든요. 거기 가서 다 손질하고. 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전에 와는 다르더라고요. 저 양반이 또 뭘 하려고 저렇게 저러나. 박정희와 어울리던 사람이 약간 힌트를 줬어. 조심하라고. 날 더러 조심하라고 그러대요, 하길래 그래요, 조심 좀 하세요, 그거 너무 그거 하지 마시고요. 알았어요. (장준하 선생님 돌아가시고 나서 되게 고생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말도 못하지요. 우리 큰 애는 돌아가신 지 일주일 만인가? 들어오는데 테러 당했어. 그래서 턱이 다 부숴졌었어. 그래서 걔가 지금 턱이 이래요. 장례식 끝나고 집에 들어 와서는 그 다음부터는 우리 24시간 감금이야. 문 앞에서 지키고 있는 거야. 태릉에 그 형사들인가? 정보원들인가? 정보원들이지. 사복하고 그래서 어디 못 나가게 하는 거지. (자식들 생각하면 제일 눈물 나는 순간이 언제에요?) 배고플 때. 먹을 거 아무 것도 없을 때. 밥이 조금 되면은 애들 죽 쒀 먹이고, 아니면 밥 한 숟갈도 먹이고, 나는 안 먹는 거지. 내가 한 숟갈 들면 애들은 어떻게 해. 엄마는? 난 먹었다, 이랬어. 그러니까 물 한 사발 먹고 허리띠 졸라멘다는 말이 거기서 나온 소리야. 영감 하여튼 희한하오, 내가 그랬어. 영감 참 희한하오, 살아서도 그렇게 나를 놀래키고, 이상 야릇하게 하더니만 하여튼 이상도 하오. 하여튼 이상도 한 영감이오. 39년.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까도 그랬지만. 여보, 이게 39년이 이것이 몇 개째인지 알어? 39개 들어가 있어. 가슴에. 이거 어떻게 해? 누구 말마따나 소화는 살아있으니까 소화는 잘 되고. 나오는 신진대사는 잘 되는데. 요놈이 가슴에도 있지만 머리에도 있어. 여기에서 밤낮 이렇게 골치 아프게 해. 그래 돌이 요만해졌소. 주먹만 하던 게 작아졌는데 그것도 담아 없애 주시오, 그래 그러겠소. 그래서 (겨레장에서 사진보며) 영감하고, 영감 알죠? (장준하 선생님 존경하세요?) 영감을 존경하냐고? 그러니까 지금까지 붙어 살았지, 살아줬지. 기사 곱게 써, 내가 한 말 막 쓰지 말고. 존경하니까 내가 그래도 쳐다보고 영감, 고맙소, 하여튼 수고했소, 이렇게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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