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학자들도 가짜 국제학술지에 논문  무더기 게재

2018년 07월 20일 21시 02분

북한의 최고 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와 연구자들도 이른바 해적 학술단체가 운영하는 가짜 학술지에 무더기로 논문을 게재한 사실이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와 독일공영방송 NDR,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의 공조취재 결과 확인됐다.

※ 관련 기사 : '가짜 학문' 제조공장의 비밀

뉴스타파는 해적 학술단체 산하 학술지와 이들이 운영하는 사이비 학술대회 문제를 함께 취재하던 중 대표적인 해적 학술단체인 ‘오믹스(OMICS Publishing Group)’와 ‘사이언스 퍼블리싱 그룹(SPG, Science Publishing Group)’ 사이트에서 북한 학자들이 작성한 논문 31편을 발견했다. 이 논문들은 대부분 2016년과 2017년에 투고 및 게재됐다. 이 논문에 저자로 이름을 올린 북한 학자들은 85명으로 모두 김일성종합대학 소속으로 확인됐다.

▲ 김일성종합대학 출처: 데이비드 스탠리/위키피디아

가짜 학술지 2곳에 31편, 저자 85명은 전부 김일성종합대 소속

북한 학자들의 논문 31편 가운데 3편은 오믹스, 나머지 28편은 SPG가 운영하는 가짜 국제 학술지에 게재됐다. 오믹스와 SPG는 각각 수백 개의 온라인 학술지와 국제학술대회를 운영하는 조직으로, 수년 전부터 국제 학계에서는 이들을 제대로 된 논문심사 없이 연구자의 논문 투고료를 받아 이윤을 챙기는 ‘약탈적 학술출판업자(predatory publisher)’로 지목했다.

▲ 오믹스(OMICS) 홈페이지 갈무리

출판 시기 별로 보면 북한 학자들은 2016년에 논문 13편, 2017년에 15편을 SPG가 운영하는 가짜 국제 학술지에 게재했다. 오믹스에는 2015년에서 2017년까지 매년 한 편씩 게재한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 학자들이 가짜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은 분야가 다양했다. 그러나 소속 단과대와 학부를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 85편의 논문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2편이 의과대에서 나왔다. 그 다음으로 외국어, 문학, 경제학부가 8개로 많았고, 화학과 전기재료공학부에서 각각 4개의 논문이 나왔다.

가짜 학술지에 논문 저자로 이름을 올린 85명의 북한 학자 중 반복적으로 게재한 저자는 없었다. 대부분의 저자들은 1~2번 논문을 게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의학 분야의 리은경과 전기재료공학 분야의 박명일을 포함한 9명의 학자들이 2번씩 게재한 것으로 나왔다.

비올의 약탈적 학술저널 목록(Beall’s list of predatory journals and publishers)을 만든 미국 덴버 오라리아 도서관 학술사서 출신 제프리 비올(Jeffrey Beall)에 따르면, SPG는 “카르마(karma)법칙의 수학적 증거"와 같이 제목만 봐도 사이비 과학으로 보이는 논문을 출판하는 대표적인 해적 학술출판 단체다. 오믹스는 지난 2016년 “심사 행태와 출판 수수료, 편집위원회의 성격”에 대해 연구자들을 기만한 혐의로 미국 연방거래위원회로부터 피소되어 2017년 미 연방 법원으로부터 ‘허위정보 게재금지’ 가처분명령을 받은 단체다.

김일성 주석 어록만 채워넣은 논문도 가짜 국제학술지에 투고

뉴스타파 취재진이 실제 이 해적 국제 학술지에 게재된 북한 학자들의 논문을 살펴보니 학술논문으로 보기 힘든 내용을 담았거나 학술지 이름과는 동떨어진 주제를 다룬 것들이 발견됐다. SPG가 운영하는 ‘국제유럽학저널(International Journal of European Studies)’에 실린 한 논문은 ‘령도자를 중심으로 위대한 국가적 단결을 이뤄낸 역사적인 대화(Landmark Confab that Broke New Ground for Achieving Great National Unity Around Leader)’라는 제목으로 1948년 4월 이뤄진 남북협상을 다루고 있다.

다음은 이 논문 초록이다. “1948년 4월 역사적인 남북협상이 이뤄진 지 거의 70년이 되었다. 70년은 사람에게는 많은 나이를 뜻하고, 100년에 비춰보면 거의 한 세기와 같다.” 실제 해당 논문의 본문은 유럽학과 관계됐다고 보기 어려운 김일성 주석의 어록으로 채워져 있다.

역시 SPG가 운영하는 ‘아랍어, 아랍문학과 문화(Arabic Language, Literature & Culture)’라는 저널에 실린 김일성종합대학 소속 학자들의 논문은 아랍어와 전혀 상관없는 프랑스어와 조선어 간 비교 연구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정상적인 학술저널이라면 거쳐야 할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동료평가(peer review)를 거쳤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 사이언스퍼블리싱그룹(SPG) 홈페이지 갈무리

북한 저자들 이메일 주소는 모두 ‘ryongnam<숫자>@yahoo.com, 룡남산에서 따온 듯

흥미롭게도 북한 학자들의 논문에 적혀있는 저자 이메일 주소는 대부분 ‘ryongnam1@yahoo.com’,  ‘ryongnam2@yahoo.com‘ 식으로 ryongnam(숫자)@yahoo.com과 같이 ryongnam 다음에 숫자만 바꿔 넣은 야후 메일을 사용한 특징을 보였다. 이는 김일성종합대학 홈페이지(www.ryongnamsan.edu.kp) 도메인 네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학교가 위치한 평양시 룡남산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적인 국제학술지에 실린 김일성종합대학 소속 학자들의 이메일 역시 이와 같은 형식인 것으로 확인됐다. 대학교에서 각 단과대 또는 학부가 이메일 주소를 하나의 이름에 일련번호를 붙여서 사용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경우다.

북한 학자들의 해적 국제 학술지 논문 게재가 2016년 이후 집중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은 북한 정권의 동향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는 집권 전부터 과학기술 발전을 강조해 온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KDB산업은행 미래전략연구소는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 4월 과학기술사업을 통한 전면적 경제발전 방안을 제시하였고, 과학교육 분야의 세계화와 과학기술부문의 예산지출을 지속적으로 늘려왔다는 분석을 내놨다.

북한 김정은 정권이 국가 차원에서 과학 분야 세계화를 장려하자 실적 압력을 느낀 북한 학자들이 투고와 게재가 손쉬운 가짜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내기 시작했다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다.

국제 사회에서 폐쇄적이었던 북한이 2016년부터 가짜 국제 학술지에도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북한의 개방 정책을 보여주는 작은 신호의 하나일까? 아마 그 해답은 남북, 북미 간 평화 프로세스의 향방에 달려있을 것이다.

취재: 임보영, 최윤원, 김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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