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국100년 특별기획] 족벌사학과 세습⑤ 일본 '제국대학' 출신의 부역자들(상)
2019년 07월 17일 08시 01분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民國 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시리즈를 2018년 8월부터 2019년 하반기까지 계속해서 보도합니다. 올해는 1919년 3.1 혁명 100년,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뉴스타파는 지난 100년을 보내고 새로운 100년을 맞는 중요한 시점에서 이 특별기획을 통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을 지배해 온 세력들을 각 분야 별로 분석하고, 특권과 반칙 및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통찰을 99% 시민 여러분과 함께 이끌어 내고자 합니다. 뉴스타파는 <民國 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프로젝트를 통해 일제와 미 군정, 독재, 그리고 자본권력의 시대를 이어오면서 각 분야를 지배해온 세력들이 법과 제도를 비웃으며 돈과 권력을 사실상 독점하고 그들만의 특권을 재생산한 현재의 지배계급 시스템을 가감없이 들춰내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미래 세대가 과거 지배 체제가 극복된, 그래서 보다 정의롭고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나라에서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며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시스템을 함께 모색해 나가려 합니다. -편집자 주 |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가 공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는 사학 설립자나 교육계 고위 인사도 적지 않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과 이를 계승한 전두환 군부정권에 적극 협력하며 승승장구했다.
일제 강점기 이광수·최남선 같은 이는 ‘민족개조론’이란 이름으로 자신들의 일제부역 행위를 호도했고, 다른 이들은 ‘실력양성’ 운운하며 자신들의 반민족·매국 행위를 정당화했다. 일본 제국주의 압제에서 해방되고 7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이른바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망언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들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거대한 ‘또 하나의 가족’을 만나게 된다.
수많은 친일파들이 2차대전 당시 일제가 연합군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이는 동안, 영미(영국과 미국)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며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해방 이후 국제정세가 바뀌자, 이번엔 ‘맹목적’ 친미사대주의로 돌아서 반공을 앞세운 (군부)독재정권에 충성해 온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저들의 자기망상은 전 세계의 제패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우리 동아(東亞) 천지(天地)에서는 저들의 부당한 간섭과 오만한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실로 우리 제국의 존립상 절대적인 것이요, 동아 신질서의 건설을 위한 성전(聖戰)의 이름이 완전히 도의적인 까닭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들’은 미국과 영국이고 ‘우리 제국’은 일본이다. 이것은 백낙준이 1941년 12월 <동양지광사>에서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해 주장한 내용이다. 1년 뒤인 1942년 기독교신문에는 징병을 적극 찬양하는 글도 발표한다.
오늘의 미영(米英) 등국(等國)은 폭력행사자요. 우리 제국의 궐기는 대동아의 공존공영과 세계평화를 위한 정의의 옹호입니다. 이러한 성전(聖戰)에 몸과 정성을 받들 수 있는 것은 황국의 생을 향유할 수 있는 우리 신민된 자에게 무한한 영광이올시다. (중략) 병역은 국민의 가장 숭고한 의무입니다. 아니 의무만이 아니올시다. 영광이올시다. 우리에게 병역의 의무를 주신 천황폐하께옵서 우리를 신뢰하신다는 분부이옵니다. 그 얼마나 황송하옵고 감격스러운 일이옵니까? (중략) 우리는 조국 일본을 결사수호하고 황화(皇化)를 우내(宇內)에 펴고 황위(皇威)를 사해(四海)에 떨치옵시다.
백낙준(白樂濬: 1895-1985)은 황민화 정책과 일제 침략전쟁을 적극 선동했다. 그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장로교 목사다. 194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애국기헌납기성회 부회장으로 비행기헌납운동에 앞장섰고 신도들로부터 취합한 헌납금을 전달하기 위해 기독교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일본군 사령부를 방문해 헌납하기도 했다. 그의 창씨명은 시라하라 라쿠준(白原樂濬)이었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다.
대부분의 ‘친일파’가 그렇듯, 백낙준도 해방 이후 ‘친미파’로 변신했다. 백낙준이 1949년 2월 <새교육>에 “민족적 이상”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의 일부다.
우리 민족이 위기를 당한 것은 일본의 침범과 도적질입니다. (중략) 우리가 근래 접촉한 나라 가운데에 170년 역사를 가진 미국은 제일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짧으나마 안으로 부하고 밖으로는 강한 힘을 떨치어 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불과 7년 전, ‘미영 제국주의 타도’와 ‘천황폐하’를 외치며 일제의 침략전쟁(대동아전쟁)을 찬양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이제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도적질’로 비난하고 미국의 강력함을 찬양하고 있다. 같은 사람의 생각과 글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의 변신이다. 이 같은 백낙준의 표변은 강자 중심주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으로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 시대를 보냈던 백낙준을 포함한 수많은 ‘친일파’들의 처세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백낙준은 해방 직후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교장을 거쳐 1960년까지 연세대 총장과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50년부터 이승만 정권에서 문교부 장관을 2년 가까이 지낸 뒤에는 국사편찬위원장까지 맡았다. 이후 서울시교육회 회장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약칭 교총)의 전신인 대한교육연합회회장(1956-1958)도 지냈다.
다시 연세대로 돌아간 백낙준은 총장과 이사장을 지내다 4·19 직후에는 참의원 의장도 맡았다.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국토통일원 고문과 국정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국정자문위원직은 전두환 독재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돼 그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했다.
연세대에는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경영관 지하층은 그의 호를 따 ‘용재홀’로 명명됐고 용재기념사업회는 해마다 용재학술상을 시상하고 있다. 또 대학 도서관 앞에는 백낙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동상에는 “교육과 학문 민족봉사와 자유정신의 구현에 뜻을 두시고 일생동안 연세와 민족을 붙들고 키운 연세의 정신적 지주시며 민족교육의 스승이시며 겨레의 지도자시고 하나님의 종이시다.”라고 백낙준을 기리고 있다. “조국 일본을 결사수호하고” ‘천황폐하”를 찬양하던 백낙준의 친일 행적에 대한 언급이나 반성의 문구는 없다.
백낙준의 네 아들과 손자들 대부분은 일찍이 미국으로 이주해 성장하고 생활했다. 그의 장남(백순욱; 1933년생; 작고)은 작곡가 현제명(玄濟明: 1902-1960)의 셋째딸(玄海玉: 1934년생; 줄리어드음대 졸)과 결혼했다. 현제명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됐다. 서울대 음대 학장을 지낸 현제명의 맏사위는 박정희 시절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낸 장창국(張昌國: 1924-1996) 예비역 육군 대장이다. 백낙준의 부인(최이권: 1905-1990)은 YWCA 회장을 지냈고, 그의 처제(최이순: 1911-1987)는 연세대 가정대학장과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냈다.
유억겸(兪億兼: 1896-1947)은 김성수(金性洙: 1891-1955; 고려중앙학원 이사장·부통령), 김활란(金活蘭: 1899-1970; 이화학당 이사장; 이화여대 총장), 백낙준 등과 함께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 교육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학무국장, 즉 지금의 교육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는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부터 시작해 도쿄(東京)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제국대학 대학원에서 1년 더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할 때까지 12년 동안 일본에서 살았다. 전편에서 소개했듯이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제국대학에 입학해 졸업하려면 중학교부터 시작해 10년 이상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유억겸은 1923년 귀국해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경성지방법원 변호사로 등록하고, 중앙고보 교사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교수 및 부교장 등을 거쳤다. 또 조선인의 전쟁 협력을 이끌어내 위해 만든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로 활동하면서 일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그의 일제 친일행적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것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를 포함해 4촌 이내의 친인척 중에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된 사람이 8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유억겸의 아버지는 대한제국 내부대신(요즘의 행정안전부장관)을 거친 개화파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다. 유억겸의 형 유만겸(兪萬兼: 1889-1944)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경제과를 졸업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충북도지사 등을 지냈다. 그는 일제 식민통치에 적극 부역하며, 많은 돈(수당)과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유만겸 역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된다.
유억겸의 장인 윤택영(尹澤榮: 1876-1935)과 그의 둘째형 윤덕영(尹德榮: 1873-1940) 형제는 나라를 팔아넘기는데 이완용 못지않은 역할을 한 매국 수작이다. 윤택영의 큰딸(尹曾順: 1894-1966)이 순종(純宗: 1874-1926; 결혼 당시 황태자)의 둘째부인인 순정황후(純貞皇后)다. 고종이 강제퇴위당한 뒤 순종이 즉위하면서 윤택영은 국구(國舅: 왕의 장인)로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칭호를 받는다.
특히 윤덕영은 ‘매국노 중의 매국노’였다. 비서원승(秘書院丞)을 거쳐 1908년 황후궁 대부(皇后宮 大夫: 지금의 청와대 제2부속실장)와 시종원경(侍從院卿: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까지 겸했다. 1910년 8월 26일, 강제합병을 조인하던 어전회의에 참석해 조약에 동의했다. 그는 조카인 순종과 황후를 협박해 국새를 빼앗은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순종은 유억겸의 동서다.
윤덕영은 이런 ‘공로’로 일제로부터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직과 자작 작위를 받았고 5만 원의 은사공채를 하사받았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윤덕영은 인왕산 자락(지금의 옥인동)에 3천여 평이 넘는 대저택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짓고 조선의 왕들이 거처하던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살았다. 1940년 윤덕영이 죽자 그의 귀족 작위는 양손(養孫)인 윤강로(尹强老: 1919-1965)가 이어받았다. 윤강로 역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됐다.
유억겸의 장인 윤택영도 1910년 강제병합 직후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와 함께 50만 원이 넘는 막대한 은사공채를 받았다. 그는 사치스러운 호화생활을 하다 빚을 졌고 1928년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파산 처분을 받기도 했다. 중국으로 도피해 살다가 1935년 늑막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작위는 차남 윤의섭(尹毅燮: 1912-1966)이 이어받았다. 윤택영, 윤의섭 부자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됐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한 유억겸의 친인척을 간단히 살펴보자. 유억겸의 큰아버지의 장남 유빈겸(兪斌兼: 1868-1932)은 일제 때 중추원 참의와 군수 등을 지내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유억겸의 작은아버지(숙부) 유성준(兪星濬: 1860-1934)도 중추원 참의와 강원도지사 등을 지내며 훈3등 서보장을 받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유성준의 2남 2녀 중 장녀인 유각경(兪珏卿: 1892-1966)은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과 기독교여자청년일본동맹 조선연합회 총무 등을 지내며 각종 강연과 기고 등으로 조선 여성들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고 참여하자고 선동했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됐다.
해방 이후 유각경은 여러 여성단체와 행정부·정당에 참여했다. 1949년 5월 여러 여성관련 단체들을 통합한 대한부인회가 창설될 때 부회장을 맡았다. 대한부인회의 총재는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회장은 박순천(朴順天: 1898-1983; 2-7대 국회의원)이었다.
유각경은 1956년 이승만의 자유당 중앙위원, 1959년에는 당무위원을 지냈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거대책위원회 제4부장(부녀부장)과 기획위원을 맡아 3·15부정선거를 기획·집행했다. 일제강점기 친일부역행위에 이어, 또 다시 대한민국 역사에 가해자가 된 것이다. 유각경은 3·15부정선거에 연루된 혐의로 4·19혁명 이후 재판에 회부돼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61년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 이후 석방됐다.
일제강점기 거대한 일제부역 족벌 중의 하나인 유억겸 가문의 8번째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된 인사는 고모부 유정수(柳正秀: 1857-1938)다. 강제합병 3년 전인 1907년 탁지부 차관(이전에는 협판·協瓣으로 불렸음)에 임명됐다. 유정수는 강제합병 직후인 1910년 10월부터 1921년까지 11년 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1921년부터 1938년 사망 때까지 약 18년 동안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일제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유정수의 손녀(유갑경, 柳甲慶: 1917-1990)의 남편, 즉 손녀 사위가 이재형(李載灐: 1914-1992) 전 국회의장(1985.05-1988.05; 7선 국회의원)이다. 이재형 전 국회의장은 독특한 성격과 정치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1979년 12·12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이 기존 정당을 전부 해산하고, 기성 정치인들을 대부분 정치규제에 묶어놓고,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을 창당할 때 간판으로 내세운 인물이다.
그는 1967년 6월 치러진 제7대 총선(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전국구 의원이 된 이후 국회의원을 지내지 않아 보통사람들에게는 거의 잊힌 인물이었다. 경기도 시흥(지금의 군포)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1938년 일본중앙(주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해 금융조합 이사를 지내다, 1948년 치러진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국회 재경위원장과 이승만 정부에서 상공부 장관까지 지낸다. 이어 4-5대와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신민당 부총재를 맡기도 했다.
이렇게 유신시절 야당의원으로 있던 이재형은 ‘정치군인’이자 독재자인 전두환 민정당 총재 밑에서 형식상 제2인자로 다시 정치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재형은 ‘전두환 민정당’의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해 당 간판 격인 대표위원으로 임명됐다. 1983년에는 민정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1981년부터 4년 동안 한일의원연맹 회장과 한일친선협회 회장을 동시에 맡았고, 민정당 전당대회 의장을 거쳐 1985년 12대 총선에서 다시 전국구 의원에 당선돼 국회의장까지 지낸다.
이재형의 4남 4녀 중 장녀(李鳳姬: 1935-)의 남편, 즉 맏사위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는 원용덕(元容德: 1908-1968: 육군 중장) 헌병사령관의 아들 원창희(元昶喜)다.
원용덕은 193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재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군의관으로 만주군 중교(중령급)로 활동하다 1945년 해방 이후 군사영어학교의 보좌관 겸 부교장을 지낸다. 이어 국방경비대 참령(소령)으로 임관한 뒤 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교장과 여단장을 거쳐 1950년 6·25 때 전라북도지구 사령관까지 지낸다. 1949년 백범 김구를 시해한 안두희가 군사법정에 회부됐을 때 재판장이 되어, 검사가 구형한 총살형을 종신형으로 낮춰준다.
원용덕은 1952년 4월 현역으로 복귀해 이듬해 3월 중장으로 승진하며 헌병총사령관을 맡는다. 헌병총사령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김창룡 특무대장과 경쟁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충성하면서 ‘정치군인’으로 악명을 떨쳤다. 1960년 4·19혁명 후 구속돼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돼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박정희 대통령이 특사로 풀어준다.
1922년 휘문의숙(지금의 휘문고)을 설립한 민영휘(閔泳徽: 1852-1935)는 일제에 나라를 넘기는데 앞장 선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은 매국노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후손들은 풍문학원(풍문여고)도 설립했다. 1944년 설립 인가를 받은 풍문학원은 이듬해 풍문여학교를 개교했고, 민영휘의 증손자인 민덕기(閔德基: 1915-1980)가 이사장에 취임했다.
민영휘의 차남 민대식(閔大植: 1882-1951)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 민대식의 장남인 민병도(閔丙燾: 1916-2006)는 1938년 조선은행에 입사하여 조흥은행, 상업은행 간부와 제일은행장 등을 거쳐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은행 총재(1962.05-1963.06)를 지냈고, 휘문의숙 이사장도 맡았다.
민병도는 한국은행 총재직에서 물러난 뒤 1977년 (주)경춘관광개발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남이섬을 개발했다. 배용준, 최지우씨가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 ‘겨울연가’ 촬영지로 유명해진 남이섬을 소유·관리하는 경춘관광개발은 이후 (주)남이섬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민병도의 장남인 민웅기(閔雄基: 1943-) 씨가 대주주로 있다.
민웅기 씨의 윗동서가 신동아그룹 전 회장 최순영(崔淳永: 1939-; 전 대한축구협회장)의 동생 최순광(崔淳光: 1942-) 씨다. 또 바로 밑 처제가 이계경(李啓卿: 1950-)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17대)이다. 이계경 의원의 남편은 조임현(曺林鉉: 1941-) 전 세종대 교수다. 조 교수의 형은 노무현 정부의 초대 국방장관을 지낸 조영길(曺永吉: 1940-) 씨다. 민웅기의 막내동서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막내동생인 홍석규(洪錫珪: 1956-) (주)보광 대표이사 회장이다.
민웅기의 동생 민광기(閔光基: 1947)씨는 조선일보 방우영(1928-2016.05.08.) 전 회장의 막내동서다. 방우영 전 회장의 바로 아래 동서가 임철순(1937-2017.03.12.) 전 중앙대 총장·이사장이다. 그는 이승만 정부 시절 상공부장관을 지냈다. 임철순은 중앙대학교의 전신인 중앙여자대학을 설립한 임영신(任永信: 1899-1977) 상공부장관의 조카이자 양자다.
임철순은 전두환의 5공화국 시절 서울 관악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해 두 차례 당선(1구 2인제)됐고 민정당 정책위 의장도 지냈다. 서울대와 연세대 교수를 거쳐 조선일보 이사와 감사를 지낸 이영조(李泳朝: 1905-; 작고)가 그의 장인이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하고 1980년 10월 27일 설치한 임시 입법기구인 국가보위입법회의(약칭 국보위) 위원 으로 임명된 81명 가운데 언론사 사주로는 방우영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 유일하게 참여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회장은 연세대학교와 중앙대학교 이사장도 지냈다.
지역으로 눈을 돌려보자. 대구에 있는 계명대학교는 미국 기독교 재단의 재정지원을 받았고 신후식·신태식 형제가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신후식(申厚植: 창씨명 東原厚植; 1905-2010)은 장로교 목사로 일제 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를 일본식으로 개편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경북교구장으로 재직하며 ‘미영 격멸 비행기 헌납운동’에 관한 공문을 보내는 등 일제에 부역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그는 해방 후 대구제일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대구신명여고를 재건하여 교장을 지냈고, 1958년부터 2년 동안 영남신학교 이사장도 지내다, 대구 계성고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한 후 197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동생인 신태식(申泰植: 1909-2004)은 계명대 설립 이사로 참여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일본 도호쿠(東北)제국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신태식은 초대와 2대 학장이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학교를 떠나고 난 뒤부터 줄곧 계명대 학장을 지냈다.
이후 그의 장남인 신일희(申一熙: 1939-) 씨가 총장직을 이어받았다. 신일희 씨는 초대 총장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7번째(초대, 4-7대, 9-10대) 총장을 맡고 있다. 설립 초기 미국인 선교사들이 잠시 학교를 맡던 시절을 제외하고, 학내 문제로 학생과 교수들의 항의와 투쟁으로 잠시 물러나 있던 몇 년을 빼고는, 줄곧 신태식, 신일희 부자(父子)가 학장과 총장으로 세습경영하고 있다. 뉴스타파는 신일희 총장에게 세습에 대한 입장을 질의했지만, 대학 측은 “특별한 의견이 없다”고 답했다.
2남 2녀를 둔 신태식 전 학장의 막내사위가 합동법률사무소 김앤장의 김영무(金永珷: 1942-) 공동대표다. 김영무 대표의 부인 신수희(申水熙: 1949-) 씨는 대구 신명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교육심리학과를 나왔다. 김영무 대표의 아버지는 서울 종로구 낙원동 근처에서 내과의원을 경영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로 활동했던 김승현(1911-1993.01.01.)이고, 어머니 이현경(李賢卿: 1908-1999.01.24.)은 이왕직(李王職: 일제가 조선의 왕실 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를 없애고 격하해 만든 기구)에서 근무한 궁중 요리와 복식(服飾)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김 대표의 두 형은 미국의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살고 있고 누나 김영주(金永珠: 1935-) 씨는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과 조선 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윤치호(尹致昊: 창씨명 이토치코/伊東致昊; 1866-1945)의 5남 윤정선(尹珽善: 1928-2008)과 결혼했다. 윤치호의 부친 윤웅열(尹雄烈: 1840-1911)은 대한제국의 군부대신(지금 국방장관)을 지내고 강제병합에 기여한 공로로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아 부자(父子)가 나란히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됐다.
김영무 대표의 여동생 김덕주(金悳珠: 1945-)씨는 피아니스트, 남동생 김영욱(金永旭: 1947-)씨는 바이올리니스트다. 김영욱씨는 울산대 석좌교수와 서울대 음대 학장을 지냈다.
처음으로 돌아가 이런 질문을 떠올린다.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고 일본의 전쟁에 참여해 미국과 영국을 타도하자고 외치던 자들이 해방된 대한민국에서도 반성은커녕 태도를 180도 바꾸어 미국을 숭배하고 이승만과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정권에 아부하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이유와 배경은 무엇인가? 1919년 당시 연인원으로 전 국민의 3분의 1이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고 그 정신이 헌법 전문에 기록된 민주공화국에서 어떻게 70년이 넘도록 일제부역자들이 여전히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열쇠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뒤를 이은, 일제 만주국 장교 출신 박정희의 일제부역세력 비호와 발탁 그리고 장기독재에 그 원인과 뿌리가 있다.
친일한 일제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발본색원의 광정(匡正)이 없는 한 민족사회의 기강은 헛말이다. 민족사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임을 면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역사 독립군’ 임종국(1929-1989) 선생이 유고(遺稿)에서 우리에게 던진 준엄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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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신학림 전문위원, 박중석 기자
데이터 최윤원
데이터시각화 이도현, 임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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