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선언으로 당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당했습니다. 일터를 잃은 언론인들은 출판,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언론 현장을 떠난 그들 개개인의 삶은 남모를 설움과 고달픔에 시달렸습니다. 뉴스타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해직 이후의 생활 등을 담습니다. 이 릴레이 회고록은 기자협회보와 동시에 게재됩니다. 일곱번째 글은 권영자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전 위원장(전 정무2장관)이 과거 작성한 기고글을 동아투위가 보완한 글입니다. - 편집자주
나의 기자 시절에 대한 기억은 까마득한 옛날의 일처럼 아득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제 일처럼 한편의 영화가 되어 생생히 떠오르기도 한다. 그만큼 나의 삶에서 기자 시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고 의미가 깊다.
1959년 봄 대학을 막 나온 나는 구름떼처럼 몰려든 경쟁자를 뚫고 동아일보 수습기자 1기생이 되어 종이와 먼지, 그리고 사람의 소음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편집국에 첫발을 디뎠다.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면서 대학가의 낭만을 만끽하던 나에게 편집국 풍경은 충격적이었다. 생소한 만큼 도전해 봄직한 곳이기도 했다.
신문사의 편집국은 언제나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다. 시시콜콜한 세상사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읽기도 하고 굵직굵직한 사건을 통해 역사의 줄기를 잡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신문사 편집국이라 나는 시간이 갈수록 이 직업에 매료되어 1975년 해직될 때까지 정말 모든 정성을 다 부어 넣으면서 일을 즐겼다.
그 옛날 동아일보 정규 1기로, 아이를 낳아 기른 기혼 여기자로, 프랑스에서 언론 연수를 받은 첫 여기자로, 모든 첨단적인 것을 다 누린 나였다.
1959년 치마저고리 입은 수습기자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으로 마침 자유언론운동이 열화와 같이 일어나던 1974년을 전후하여 막다른 길을 치달음으로써 아쉬운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후회 없는 16년간의 기자 생활로 아직도 모든 것이 어제 일처럼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다.
수습 시절이었다. 그때는 수습을 견습이라고 하여 선배들을 감탄의 눈으로 우러러보며 힘들게 따라다니던 시절, 나는 어울리지도 않게 사회부로 첫 배치를 받았다.
처음 출입처는 종로경찰서였다. 종로서는 나중 나의 동아투위 위원장 시절 동료들의 잦은 연행 때문에 여러 번 들락거리던 곳으로 지금도 안국동을 지나면 감회가 새롭다.
△ 동아투위 출범 후 보름만에 신문회관에서 동아일보 창간55주년 기념식을 별도로 가졌다. 오른쪽부터 고 이계익, 고 안성열, 고 안종필, 권영자위원장, 고 배동순, 이규만, 고 김창수.
나의 존경하는 캡은 나를 대뜸 취조실로 데리고 갔다. 파출소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나에게 험상궂은 피의자와 형사 같아 보이는 취조실의 분위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내게로 쏟아지던 시선에 담긴 그들의 호기심은 나를 원숭이로 전락시키기에 족한 것이었다. 나는 즉시 다른 출입처를 간청했고 법원으로의 이동 명령을 받았으나 분위기는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였다.
예의 그 짓궂은 선배가 이번에는 나를 숫제 법원 청사 앞에다 내동댕이치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나는 별 수 없이 기자실을 찾아 들었으나 어느 누구 한 사람 아는 체해줄 리가 없었다. 여기자 그것도 한복 차림으로 나타났으니 이 여자를 아무도 동료 기자로 도와줄 리가 없었고 비위가 약한 나는 내심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견습기자 생활은 비슷한 비화를 가슴에 묻은 채 문화부 여성 담당 기자로 끝마감 되었다.
나에게 여성 페이지의 일이 주어진 것은 물론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수습 시절 내가 보여주는 한계가 더 큰 이유인 것을 나는 안다. 나를 아껴주는 선배 가운데는 편집국의 꽃은 사회부라는 말로 탈 문화부를 권유하기도 했다.
여성전문기자로 16년
결국 내 스스로 꽃 부서인 사회부가 적성에 맞지 않다는 판정을 내리고 문화부를 지망했다. 이후 15년 동안 나는 문화부를 떠나본 적이 없다. 취재 분야에서는 문학이나 미술 등 예술 분야를 두루 섭렵하긴 했지만 나의 주 분야는 늘 여성이었고 이것이 나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여성 전문기자로 활동했던 나의 기자 생활에 후회가 없다. 이후 여성 삶에 소용돌이를 가져오게 한 공업화 시대의 초입에서 여성의 문제를 조감하고 해법을 찾는 여성 전문기자로서의 경험이 내게는 그 어떤 보물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 되었다.
자랄 때는 가정에서, 기자 시절에는 신문사에서, 여성이란 이유로 차별을 받아왔기에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와 함께 여성 차별의 문제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나는 여성담당자로서 그때 두 가지 문제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나는 여성의 가사 노동을 가볍게 해주는 새로운 상품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성의 이력 현장에 대한 것이었다. 여성의 가사 노동 경감에 대한 나의 관심은 11남매 맏며느리셨던 어머니의 허리가 휘도록 일해도 시간이 부족한 그 일의 양에 대한 나의 적개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자녀 양육과 가사 노동의 부담에서 헤어날 수 없는 여성의 운명은 좀처럼 바꿔질 것 같지 않았지만 새로운 주택, 세탁기, 청소기 같은 신제품의 출시는 여성해방의 희망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디어 상품을 찾아 여러 시장을 돌아다녔고 좋은 상품을 만나면 지면에 소개하는데 앞장섰다. 가사노동 경감 차원에서 아파트 보급을 제일 먼저 가정란에 소개한 것도 나로 기억된다.
두 아이의 어미로, 주부로, 아내로, 그리고 신문기자로 1인 다역 일 가운데 생략하거나 적당주의로 넘길 수 있는 것은 이 가사 노동뿐이었다. 때문에 그 일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것은 취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시장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변화를 몸소 체험하기에 좋은 곳이 아닌가. 한창 경공업 부문의 개발이 눈이 부시던 그때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시장 취재를 다녔던 것은 지면의 가정란 담당 기자로만이 아니라 이후 여성전문가로 나를 키우는 데 매우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때 나는 여성의 직업 훈련 현장과 그들의 일터를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된 뉴스거리가 있는 곳이라면 취재하러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는 자부심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한평 남짓한 어둠침침한 방 안에서 구슬백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는 여성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서 부업으로부터 시작된 여성 직업 훈련의 현장을 경험했고 영등포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근로자들의 현장 면담을 통하여 여성 인력의 차등 활용이라는 여성차별 문제의 핵심을 접할 수도 있었다. 가족계획 사업의 도입과 가족의 변화, 여성의 고학력화, 사회 진출 요구 등 여성의 문제가 시발되는 그 시기에 여성담당 기자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일생일대의 행운이요 보람이다.
성차별에 맞선 투쟁, 동아투위로 이어지다
물론 어려운 일도 적지 않았다. 첫째는 사내 남녀 차별 문제였다. 남녀평등 사회 실현의 강한 의지를 가졌던 나였고 그래서 남녀공학 대학을 택했던 나였다.
대 동아(大 東亞)의 견습기자로 그 점에서 어깨를 폈던 나는 얼마 못 가서 기절할 일에 부딪치고 말았다. 수습 기간이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봉급 인상이 있었는데, 나와 또 한 여성 동기인 박동원은 여자라는 이유로 봉급이 남자들보다 낮게 책정된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때의 분노란 이루 말할 수가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강화되어 나중에는 숫제 수습에서부터 남녀 간의 호봉 차이를 둘뿐만 아니라 결혼 퇴직 제도까지 도입하는 전형적인 성차별을 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좌절과 분노는 결국 나를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간부급 여성 기자가 되게 하였고 그것이 불씨가 되어 뒤에 동아투위의 위원장직을 맞는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사연이 있음에도 나는 지금도 동아일보에 애정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일한 시절을 사랑한다. 특별히 동아일보에 감사하는 것은 프랑스 정부 초청 언론 연수생으로 내게 10개월간의 유학을 허락한 점이다.
봉급 호봉의 차이는 두었을망정 기자의 자질을 높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 기회를 얻은 나는 3, 4세짜리 두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나의 짧은 연수 기회는 유럽 전역을 돌아보고 그들의 문화를 느낄 수 있었던, 내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값진 경험을 얻게 했다.
성깔이 칼날같은 내가 보다 느긋하게 바뀐 것이 이때부터인가 싶다. 나는 그때 하루아침에 흉내 낼 수 없는 그들의 문화 전통에 감탄하면서 한편으로 부끄럽고 그들 문화의 깊이에 기가 죽었던 것이다. 하루도 쉬지 않고 박물관과 오페라하우스로 다니는 동안 나의 자만에 겸손이 조금 덧씌워진 듯 호흡을 고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동아투위 위원들은 매일 아침 회사 정문 앞에 도열하여 '우리의 주장'을 담은 유인물을 출근하는 동료 기자들에게 배포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 도열시위는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 발동에도 만 6개월 간 계속됐다.
보람과 자긍심이 가득한 나의 기자 생활에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은 엄청난 파란을 가져왔다. 같은 문화부에 근무하던 기자협회 동아일보 장윤환 분회장이 차장급 간부들의 언론운동 참여를 위해 나에게 분회장직을 간청하는 것이었다. 공채 1기와 수석 차장이라는 상징성에다 평소 후배들과 소통이 좋다는 이유로 적임자라는 것이다.
3월 8일 내가 분회원들의 만장일치 투표로 분회장에 취임하는 날 동아일보는 경영난을 이유로 과학부, 기획부, 출판부를 없애고 18명을 해직하더니 12일 밤에는 나를 포함해 이부영, 성유보, 심재택, 박종만, 홍종민, 서권석 등 언론운동 핵심 간부 17명을 무더기 해임했다.
회사서 쫓겨난 후 3월 17일 신문회관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발족하면서 내가 초대 위원장을 맡게된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이로부터 시련과 고난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동아투위 멤버들은 모두 투지도 강하고 유능한 인재들이었기 때문에 각 분야별로 맡은 업무들을 잘 처리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 내가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130여 명에 이르는 구성원들의 최소한의 생활비를 보전해 주는 것이었다. 그동안 격려광고에 앞장섰던 민주시민들이 배신한 동아일보 대신 동아투위 쪽으로 지원해왔으며 더러는 해외서도 성금 기탁 연락이 있었지만 정부 당국이 무슨 올가미를 씌울지 몰라 호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엄혹한 군부독재시대라서 성금 기탁에 관한 자료는 철저한 보안 속에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아쉬움이 많다. 당시 우리를 지원하고 뒷바라지해 주셨던 분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셨으며 동아투위는 이분들에게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초대 동투 위원장으로 겪은 탄압과 상실
1975년 여름은 내 생애 가장 무덥고 지루한 나날이었다. 4월 30일 베트남의 패망과 공산화를 기화로 정부는 민주화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극심한 탄압을 시작했다. 종로경찰서장은 매일 아침 동아일보사 앞의 침묵시위와 유인물 배포가 집시법 위반이라며 나에게 20여 차례 경고장을 보내왔지만 우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열과 행진을 계속했다. 그 무렵 우리 동지들 18명이 구속되거나 연행되어 구류 생활을 하는 등 시련의 연속이었다. 우리 모두는 불법체포와 생계난 등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외부 지원에 의존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6개월간의 침묵시위를 끝내고 각자 생업으로 돌아가야 했다.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출신인 우리는 20명 정도가 출판이나 번역, 편집 일에 종사했고, 시장에서 옷이나 실, 등산용품 등을 파는 장사꾼으로 변신한 위원들도 있었다. 사농공상 직업 중 생소한 농공상에 들어간 동지들은 과로로 병마에 시달리거나 경제적 손실만 겪고 말았다.
최초의 희생자는 1977년 1월 16일 35세로 별세한 동아방송의 조민기였다. 이해동 목사의 집례로 치러진 장례식장에 민주인사들이 모두 모였으며 우리는 설움에 목이 멨다. 나는 조사(弔詞)를 통해 “자유언론을 실천하려고 몸부림치다가 동아의 사기극에 제물이 된 우리가 붓과 마이크를 빼앗겼지만 언젠가 진정한 언론인으로 복귀하자”라고 다짐했다.
△ 지난해 권영자 위원장을 방문하여 함께 오찬을 했다. 오른쪽부터 김동현, 권위원장, 조강래, 박종만, 이부영.
어둠이 빛을 이긴 역사가 없고, 불의가 정의를 끝까지 짓밟은 역사가 없다고 믿으며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채찍질하면서 언론투쟁을 이어갔다. 나는 초창기 2년 여간 동아투위를 이끌어 오다가 1977년 5월 17일 안종필 차장에게 위원장직을 넘겼다. 그러나 내가 천직으로 생각해왔던 언론인으로의 복귀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여성개발원 원장으로 있을 때나 정무장관으로 있으면서 여성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내가 취재 대상이 아니라 취재하는 기자라는 착각을 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것은 내가 다루고 있는 문제가 나의 기자 시절에 다루던 것과 같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도 하차한 기자 생활에 대한 향수가 남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후배 기자들을 각별히 아껴주었던 것도 그런 나의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만약 내세가 있고 또 그때에도 여자로 태어난다면 난 기꺼이 세계를 누비는 기자가 될 것이다. 유신 이전의 그 동아일보 기자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