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기업으로 간 언론인들

2020년 03월 10일 08시 00분

언론의 생명은 신뢰다. 언론 사업은 뉴스와 프로그램 등을 통해 정보를 판매하는 비즈니스지만 사실은 그 속에 담긴 신뢰를 판다고도 할 수 있다. 올해 영국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공개한 세계 38개 국가 언론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언론 신뢰도는 22%였다. 조사 대상 국가 중 꼴찌다. 그것도 4년 연속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망하는 언론사가 거의 없다. 왜일까?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한국 언론의 기이한 수입구조에 주목했다. 그 중 하나가 기사를 가장한 광고다. 또 하나는 세금으로 조성된 정부의 홍보, 협찬비다. 이 돈줄이 신뢰가 바닥에 추락해도 언론사가 연명하거나 배를 불리는 재원이 되고 있다. 여기엔 약탈적 또는 읍소형 광고, 협찬 영업 행태가 도사리고 있다. 이런 비정상적인 구조가 타파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서 언론이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게 불가능하다. 뉴스타파는 이 시대 절체절명의 과제 중 하나가 언론개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관련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추적 결과물은 언론개혁 계기판 역할을 할 뉴스타파 특별페이지 ‘언론개혁 대시보드’에 집약해서 게재한다. -편집자 주

기자 L은 자신의 책을 이렇게 맺는다.  

검사가 허무한 것처럼 기자도 허무하다. 정말 세상이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오프 더 레코드』, 2001

‘최고의 법조기자’라는 찬사에 어울리지 않는 결론이다. 

기자L은 기자 생활 15년간 주로 법조를 다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씨 비리사건 추적보도, 의정부 판사 금품수수비리 보도, 옷로비의혹사건 사직동팀 보고서 추적보도, 안기부 선거자금유입사건 보도, 춘천초등학생 강간살인범 무기수 재심 보도 등 굵직한 사건 기사들이 그의 펜을 거쳤다. 특종에 대한 남다른 집념은 동료 기자들 사이에서 회자가 되기도 했다. 그의 책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다. ‘기자에게 특종은 진리다’.   

▲ 이수형 전 동아일보 기자의 저서 '오프 더 레코드' 중

기자L은 2001년 책을 내고, 2006년 언론계를 떠났다. 삼성그룹 법무실이 새 일터였다. 2014년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로 자리를 옮겼다. 2017년에는 국정농단 사태의 삼성 측 참고인으로 소환돼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무엇이 그의 기자 인생을 허무하게 만들었는지, 왜 언론을 떠나 재벌의 손발 역할을 맡게 됐는지 기자 L이 책에 남긴 여운은 오랫동안 물음표로 남는다.

기자에서 삼성의 해결사로..."후배들에게 부끄럽다"

기자 L은 동아일보 출신으로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기획팀장을 지낸 이수형이 자신의 책에서 사용한 작중 이름이다. 뉴스타파는 2017년 2월 미래전략실 해체 이후 삼성을 떠난 이수형 기자를 만났다.

언론계를 떠날 때인 2006년, 이수형 기자는 지쳐 있었다. 다른 부서 배치를 원했지만 편집국장은 허락하지 않았다. 취재는 쉬웠다. 법조계 인사철이 되면 사람들은 이수형을 찾아 귀동냥을 청했다. 뉴스는 저절로 따라왔다. 낙종을 해도 전화 몇 통이면 '반까이'(만회)가 됐다. 미국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시야는 넓어졌지만 언론계, 법조계의 생태는 그대로였다.

삼성은 이수형 기자에게 공을 들이고 있었다. 법조계 지인을 통해 수차례 이직을 제안했다. 이수형은 홍보 쪽 자리는 고사했다. 하지만 기자 직무와는 무관한 신규 사업분야에서 일할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기울었다.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삼성행을 결정한 뒤, 법조기자 이수형은 원칙을 세웠다. ‘일 문제로는 한강 다리를 건너지 않는다’는 것. 원칙대로 한동안은 취재원과 선후배 언론인을 만나는 일을 삼갔다. 삼성도 불편한 상황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2014년 미래전략실로 발령이 난 뒤 상황이 달라졌다.

▲ ‘삼성맨’이 된 이수형 기자는 2014년 미래전략실 발령 이후 이재용 부회장 승계 작업과정에서 해결사 역할을 맡았다.

2017년 8월 선고된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1심 판결문에는 그가 삼성 미래전략실에서 한 일들이 설명돼 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앞둔 2015년, 그는 한마디로 언론계와 정관계, 그리고 삼성을 잇는 ‘메신저’였다.

기자 시절 쌓아 놓은 네트워크가 가동됐다. 언론계 인사와 소통하며 여론 동향을 파악했고, 합병 성사의 ‘키맨’에게는 학맥을 이용해 줄을 댔다.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 때는 청와대와 직접 소통하며 이른바 ‘VIP’의 의중을 해석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에 대한 주요 국면에서 막힌 곳을 뚫어주는 이른바 ‘해결사’ 역할을 도맡은 셈이다.

뉴스타파와 만난 ‘전직기자 이수형’은 삼성 미래전략실 팀장으로 이재용 부회장 승계 작업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지적에 선을 그었다. 자신 역시 삼성의 수뇌부에 속하지 못했고 승계 작업의 전말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언론계, 정관계와 소통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도 오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누차 자신의 말에 자기합리화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행적에 아쉬움이 많았고, 그에 대한 지적도 감수하겠다고 했다. 언론계의 혜택을 많이 봤지만 결과적으로 누를 끼쳐 후배들에게 부끄럽다고도 말했다.

미래전략실 해체 이후 이수형은 삼성과 연을 끊었다. 퇴직 임원이 된 이수형에게 삼성은 복지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재용 부회장 기소에 대한 일종의 문책성 조치구나”, 이수형은 그렇게 이해했다. 그는 현재 한 복지재단 상임이사로 재직 중이다.

기업으로 간 언론인 343명 분석..."기업의 여론 방패막"

뉴스타파는 이수형 기자와 같이 기업으로 이·전직한 전직 언론인들의 행적을 분석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나타난 주요 기업 임원 중 언론사 이력이 기재된 임원 343명을 추려냈다. 10대 일간지, 3개 지상파 방송사, 4개 종편사 출신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기업행이 가장 많은 언론사는 KBS로 나타났다. PD, 기술직 출신 포함 56명이 기업 임원직을 맡았다. 동아일보(41명), 조선일보(37명), 중앙일보(34명)가 뒤를 이었다. 진보 성향의 신문사인 경향신문과 한겨레 신문 출신도 각각 20명이 넘었다.

기업이 선호하는 영입 대상은 언론의 논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국장급(31.8%)이나 언론사의 속 사정을 알고 있는 경영진(27.7%)이다. 언론인 출신 임원들이 주로 맡게 되는 보직은 사외이사, 감사, 고문(60.3%) 이었다.

▲ 재벌 그룹의 언론인 출신 임원 영입은 '오너리스크'가 불거진 시기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재벌 그룹 가운데 언론인 출신 임원이 가장 많은 곳은 SK(15명)다. 삼성(11명), CJ(7명), 현대차(6명)가 뒤를 이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효성·태광(각 5명)도 언론인 영입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재벌 그룹이 언론인 영입에 나선 시기는 ‘오너리스크’가 불거진 시점과 일치했다. 삼성의 경우,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배정 사건(2003년 기소, 2005년 1심 판결)으로 총수 일가가 수사선상에 오르면서 언론인 영입이 많아졌다. MBC 메인뉴스 앵커 출신인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을 비롯, 이수형(동아일보), 박효상(한겨레신문), 박천호(한국일보) 등이 영입된 것이 모두 이 시기다.

2014년 미래전략실을 개편하고 본격적인 승계 작업에 나섰을 때도 언론계 출신들이 영입됐다. 이준 TV조선 보도본부 부본부장, 이형섭 한겨레신문 기자가 이 시기 삼성행을 택했다.

CJ그룹은 이재현 회장 구속 시기 언론계 인사를 영입했다. 오너의 사면 복권을 위해 그룹이 전방위 노력을 기울이던 시기, 김종율 KBS 보도본부장, 김상영 동아일보 전무가 CJ로 자리를 옮겼다.

기업의 생리는 간단합니다. 절대 이익이 안되면 하지 않아요. 언론인을 영입하는 것은 필요하니까 하는 겁니다. 사외이사, 감사로 기업에 들어오지만 이들의 역할은 감시자의 역할이 아닙니다. 다른 권력기관 출신들을 뽑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패막 역할을 할 사람인 거죠.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하는 일은 주주들에게 이윤을 창출하고 사회에 긍정적 역할을 한다는 기업의 역할에도 맞지 않습니다. 주로 오너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이익 극대화를 위해 그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기업의 이익에도 맞지 않는 자기모순, 이율배반입니다.

박주근 / CEO스코어 대표

공기업 한직에도 부역 언론인들..."언론계 가신 많다는 방증"

기업으로 간 언론인 10명 중 1명 이상은 정부의 입김이 강한 공기업이나 금융기업에 몸담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권 교체기마다 이른바 ‘낙하산 인사’, ‘논공행상 인사’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곳들이었다.

가장 많은 언론인 출신 임원이 거쳐간 기업은 KT스카이라이프다. 총 14명의 언론인이 거쳐갔다. 특히 이 회사의 대표에는 줄곧 정치색 강한 전직 언론인들이 내리 꽂혔다. 노무현,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대통령 후보 캠프의 언론특보가,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홍보수석 출신이 대표에 취임했다.

▲ 친정부 성향의 언론인 출신들이 연이어 KT 스카이라이프 대표에 취임했다.

금융계에도 친정부 성향 언론인들이 포진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무총리실 공보실장을 지낸 김왕기 전 중앙일보 영어신문본부장을 비롯해, 전문성 없이도 임원 자리에 오른 언론인 출신이 21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언론인이 정권의 가신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정부와 관련된 기업이 많은 우리나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한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 정치권과 관련된 주요 가신들이 배치되는 것이고, 언론인들이 그 자리로 간다는 것은 곧 언론 또한 정치 권력의 주요한 가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정준희 /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

제작진
취재오대양
촬영김기철 정형민
편집정지성
CG정동우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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