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고등학생 자녀가 쓴 논문이 게재된 해외 학술지가 학계에서 투고가 금지된 ‘약탈적 학술지’인 것으로 확인됐다. 약탈적 학술지는 돈만 내면 별다른 심사 없이 논문을 게재해 주고, 출판 윤리를 어기는 학술지를 뜻한다. 전 세계 학계에서는 약탈적 학술지에 대한 논문 투고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한동훈 후보자의 고등학생 장녀가 논문을 투고한 해외 온라인 학술지는 각각 말레이시아와 방글라데시 등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미국의 데이터베이스 제공 업체인 카벨은 블랙리스트(Cabell’s Blacklist)를 작성해 약탈적 학술지를 공개하고 있다. 이 블랙리스트에 두 개 학술지가 모두 등재돼 있다. 카벨의 블랙리스트는 한국연구재단이 의심 학술 출판 관련해 가이드라인으로 삼는 자료 중 하나다.
한동훈 후보자의 큰 딸은 현재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국제학교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다. 그런데 뉴스타파 확인 결과, 한 후보자의 장녀는 지난해 각기 다른 주제의 논문 4편을 작성해 해외 학술지(저널) 2곳에 투고해 게재했다.
먼저, 코소보 지역에서 교육과 의료 개혁을 다룬 영어 논문, “Education and Healthcare Reforms in Post-Conflict Setting: Case Studies in Kosovo”는 Asian Journal of Humanity, Art and Literature”라는 곳에 실렸다. 이 해외 학술지 소재지는 말레이시아이다.
한 후보자의 장녀는 또 지난해 ‘ABC Research Alert’이라는 또 다른 해외 학술지에도 논문 3편을 투고해 게재했다. 이 학술지는 말레이시아와 방글라데시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실린 논문은 미국 반독점법의 역사를 다룬 논문 “Sherman Act 1890: Modernization and Impact on Markets”, 국가의 부채 문제를 정리한 “Does National Debt Matter? -Analysis Based on The Economic Theories”, 그리고 코로나19 대유행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논문 “An Analysis of Covid-19 Supply and Demand, and Impacts on the Post-Pandemic World”이다. 이 3편의 영어로 된 논문은 모두 2021년 9권 3호(Vol. 9 No. 3 2021)에 동시에 실렸다.
한 후보자의 장녀가 쓴 이 논문들은 A4 용지로 4~5쪽 분량이었다. 또 초록 요약본, 서론, 본론, 결론 그리고 참고문헌까지 논문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고, 학술지를 자처하는 해외 저널에 실렸다.
하지만 내용과 형식은 학술지 논문이라고 보기에는 함량 미달이었다. 고등학생이 쓴 에세이 수준이었다. 한 후보자의 장녀가 고등학생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논문 투고의 목적이 미국 등 해외 대학의 진학을 위한 ‘이력서 꾸미기’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뉴스타파 취재 결과, 이들 논문이 게재된 두 개의 해외 학술지의 정체는 학계에서 투고를 제한하고 금지하는 ‘약탈적 학술지(predatory journals)’인 것으로 확인됐다.
두 개의 학술지 모두, 미국의 연구 데이터베이스 제공 업체인 카벨이 제공하는 약탈적 학술지 목록(Cabell’s Blacklist) 에서 올려져 있다. 카벨의 블랙리스트는 한국연구재단이 의심 학술출판 행위를 판단하는 가이드라인으로 삼는 자료다.
▲Cabell’s Blacklist 목록의 약탈적 학술지로 ‘ABC Research Alert’가 올려져 있다. 아래에는 학술지 운영 위반 사항을 명시했다.
▲ Cabell’s Blacklist 목록의 약탈적 학술지로 ‘Asian Journal of Humanity, Art and Literature’가 올려져 있다. 아래에 학술지 운영 위반 사항을 명시했다.
약탈적 학술지(Predatory Journals)는 금전적 이익을 목적으로 돈을 내면 논문을 무조건 게재해주고, 동료 심사를 거치지 않거나 간소화해 출판 윤리를 어기는 학술지를 뜻한다. 질 낮은 연구나 성과가 의심스러운 논문을 양산하는 부작용이 심각했다. 그러나 논문 게재가 쉽다는 이유로, 일부 연구자들이 악용하면서 근절되지 않았다.
카벨 블랙리스트(Cabell’s Blacklist) 자료에 따르면, ‘ABC Research Alert’를 약탈적 학술지로 규정하면서 위반 사항(“violation”)을 적시하고 있다.
먼저, 동일한 논문을 여러 곳에 중복 게재하고, 논문 심사에서 동료 평가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즉 한 명이 제출된 논문을 다 심사하거나, 평가자들도 전문 분야가 아닌 분야의 논문을 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편집인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 중에 존재하지 않거나 이미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해당 저널을 출판하는 ‘아시안 비즈니스 컨소시엄’이라는 출판사가 법인이 아닌 개인사업자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또 웹사이트에 학술지를 출판하는 출판사의 주소를 알리지 않거나, 가짜 주소를 올렸다는 지적도 있다. 하나 같이 엉터리 학술지의 대표적인 사례다.
카벨 블랙리스트는 또 다른 약탈적 학술지인 Asian Journal of Humanity, Art and Literature의 문제점을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정리하면, 웹사이트에 학술지를 출판하는 출판사의 주소를 기재하지 않거나 가짜 주소를 올려놨다가 지적을 받고 시정조치 했다. 또 저작권 등 디지털 아카이브 정책이 부재하고, 출판사 또는 저널의 운영을 수수료 지불(fee payment)에 너무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ABC Research Alert’의 논문 투고료는 미화 50달러였다. 돈을 내면 거의 모든 분야의 논문이 실릴 수 있다. 리서치 페이퍼, 워킹 페이퍼, 서평, 인턴십 리포트까지 가능하다.
대신, 일반적으로 학술지가 요구하는 동료 평가 등 논문 심사 절차는 따로 없다. 편집자의 평가 절차만 있을 뿐이다. ‘Asian Journal of Humanity, Art and Literature’의 경우, 논문 투고료가 미화 30달러다. 여기에 게재가 확정되면 120달러를 추가 내야 한다.
뉴스타파는 2018년 해적 학술지, 가짜 학술대회 등 돈을 받고 심사 과정도 없이 학술대회 발표 기회를 주고 논문을 실어주는 사이비 학술단체와 그들이 운영하는 약탈적 학술지를 취재 보도한 바 있다. 한국인 교수와 학자 수백 명이 엉터리 논문을 만들고 세금 등 연구비를 오·남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각 대학과 과기부, 교육부 등이 진상 조사에 나섰고 징계 처분과 대책 마련 등 후속 조치를 내놨다.
이렇게 교육 당국과 범정부 차원에서 약탈적 학술지 근절에 나섰던 시점에 한동훈 후보자의 장녀가 약탈적 학술지를 이용해 논문을 양산한 것이다.
그동안 약탈적 학술지가 학계에서 '업적 부풀리기'로 악용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 후보자의 장녀도 해외 대학 입학을 위한 스펙 쌓기로 이들 엉터리 학술지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게다가 편당 50달러 이상의 비용이 들어가는 장녀의 논문 투고가 ‘학교 숙제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는 한 후보자의 해명은 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뉴스타파는 한동훈 후보자 측에 장녀가 지난해 논문을 투고해 게재된 학술지가 학계에서 투고를 금지하고 있는 ‘약탈적 학술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말레이시아와 방글라데시에 사무실을 둔 ‘엉터리 학술지’에 장녀가 논문을 무더기로 투고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나 답변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