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함께재단>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은 지난해 말 ‘2021 뉴스타파-세명대 보도기획안 공모전’을 열었다. 기존의 ‘뉴스타파 대학생 탐사보도 공모전’과 ‘세명 시사보도 기획안 공모전’을 통합한 것이다. 국내 유일의 탐사보도 전문 매체인 뉴스타파와 역시 국내 유일의 실무형 저널리즘 대학원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힘을 합쳐 예비 언론인들이 취재, 제작의 실무와 함께 저널리즘의 공익적 가치와 취재윤리 등을 함께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엄정한 심사를 거쳐 네 편의 기획안이 선정됐고, 뉴스타파 제작진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진이 두 편씩을 맡아 데스킹을 진행해왔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취재가 끝난 안효정, 유하영의 “남겨진 사람들”을 세 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 주)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화재 참사 발생 후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유가족들이 머물던 서희청소년문화센터에 속옷, 수건 등이 담긴 지원 물품 상자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가족 김선애(42) 씨가 센터에 있는 공무원에게 물품이 다 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지만 “이제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때부터 김 씨는 센터 내 이천시 관계자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제 나가달라’는 것 같아서다. “평소 같으면 ‘채워 놓을게요’라고 말하거나 물품이 동나기 전에 채웠을 텐데.” 김 씨는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5월 말에서 6월 초에 마치 ‘이제 그만 정리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시죠’하고 압박받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매일같이 분향소로 나오셔서 도움 주신 이천시 공무원분들께 항상 감사했어요. 존재만으로도 도움이 됐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도 많이 여쭤봤어요. 그런데 5월 말부터 자꾸 빨리 처리하려는 낌새가 보이니까...” 김 씨는 심증밖에 없어 조심스럽다면서도 자신뿐 아니라 다른 유가족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분위기를 느꼈다고 얘기했다.
김 씨는 이런 상황에 대한 불만을 유가족 전담 공무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유가족 전담 공무원들도 결국 이천시에서 일하니 비슷한 입장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우리가 계속 있으면 이천시에도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면서 “‘우리가 너무 오래 버티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김 씨가 전담 공무원에게 말하지 않은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김 씨는 참사의 책임이 있는 HDC현대산업개발(현산)에 분노했지만 전담 공무원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다. “이분(전담 공무원)이 좋은 분인 건 아는데, 혹시나 우리끼리 대화하는 것을 듣고 오해하고서 다른 사람에게 잘못 전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어요.” 서류를 떼기 위해 전담 공무원과 시청으로 이동하는 차 안, 김 씨와 김 씨 가족은 입을 닫았다. 현산에 관한 이야기는 전담 공무원이 없을 때만 했다.
광주 학동 참사 유가족협의회 대표 이진의(38) 씨는 유가족 전담 공무원 외에 중앙 정부와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참사 직후 가장 큰 문제는 부검이었다고 말했다. 부검 여부를 두고 유가족과 검찰의 입장이 부딪혔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상 참사로 사망했다는 점을 확인하려면 부검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다. 이를 두고 당시 “돌아가신 분께 왜 또 칼을 대야 하느냐”는 유가족들의 반발이 심했다.
이 씨는 부검 문제를 논할 때 “전담 공무원으로 활동하는 광주 동구청 공무원들이 청소년과, 회계과 등 참사 처리와 연관성이 떨어지는 부서 소속이라 다른 부서에 물어보고 확인받아야만 우리에게 (진행 상황을) 얘기해 줄 수 있는 게 답답했다”고 토로했다. 이 씨는 “중앙 정부를 상대로 얘기하려고 보니 동구청은 힘이 없더라”며 “결국 우리가 직접 대통령비서실장 등 윗선을 만나는 방법밖에 없다고 느꼈다”고 전했다. 이진의 씨는 지난해 7월 15일 올린 청와대 청원 게시판 글에서 “(유족의 이야기를 들은) 고위 공직자들이 나서서 부검을 거치지 않을 방안에 대해 논의하겠다고 했지만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유족들은 최소한의 부검만 해달라고 부탁하며 동의했고 부검을 거친 후에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밝혔다.
김 씨와 이 씨의 이야기는 전담 공무원 배치 그 이상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김 씨와 이 씨 모두 유가족 전담 공무원에게 감사함을 표했지만, 전담 공무원의 존재만으로는 유가족들이 온전히 회복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말이다. 김 씨가 눈치를 보며 체육관을 나서고 차 안에서 침묵한 것도, 이 씨가 부검 문제에서 답답함을 느낀 것도 참사 후 남겨진 사람들의 회복을 위한 우리 사회의 노력이 여전히 부족함을 의미한다.
그럼 유가족의 회복을 위한 ‘그 이상’이란 무엇일까. 재난 참사 전문가들은 공감과 믿음을 꼽는다. 우리 사회가 유가족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김 씨와 이 씨의 경우처럼 회복 과정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일이 줄어들 것이란 얘기다.
노다 마사아키 일본 정신병리학자는 저서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에서 심리적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책에서 “자신의 자녀가 갑자기 죽으면 마음이 어떨지, 혹은 자신이나 아내가 죽으면 남겨진 자녀들은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으면 한다”며 “피해자와 유족의 아픔과 고통에 닿아보지 않고 안전대책을 논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적었다. 박성현 4.16재단 팀장은 유족과 교감하는 방법으로 유가족이 다른 참사의 유가족을 직접 돕는 방식을 제시했다.
유족이 돕는 유족... 회복을 위한 협력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석 달쯤 됐을 때, 춘천 산사태 참사로 목숨을 잃은 대학생들의 가족이 광화문 광장에 있던 세월호 유가족을 찾아왔다. 춘천 산사태 참사는 세월호 참사 3년 전인 2011년 7월 강원도 춘천으로 봉사활동을 갔던 인하대학교 학생 10명 등이 산사태로 사망한 참사다.
이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광화문 광장에서 외부에 적극적으로 참사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기도 안산시 주민을 설득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원인 규명을 위해 오랫동안 싸우려면 또 다른 재난 피해자인 지역사회 주민들의 공감도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박성현 팀장은 “(춘천 산사태 참사 유가족들의 조언은) 세월호 유가족들이 안산에서 활동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 등으로 구성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가 안산에서 추모활동, 시민참여 캠페인을 지속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춘천 산사태 유가족이 내민 도움의 손길은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사고 유가족으로까지 이어졌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은 고 김용균 씨의 장례식장을 찾았다. 장례식장에는 고 김 씨 어머니인 김미숙 씨에게 ‘식사하셔야 한다’고 계속 권하는 이들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은 김미숙 씨에게 “한 끼 안 먹는다고 안 죽는다. 지금은 부모가 밥을 삼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운지 안다. 밥 먹지 않아도 괜찮다”고 얘기했다. 박 팀장은 “그때 김미숙 씨가 ‘이제 살 것 같다, 숨 좀 쉴 것 같다’고 했다”라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박 팀장은 “(유가족들이) 장례식장에서, 분향소에서 어떤 위협과 압박을 느끼는지, 어떤 게 필요한지를 먼저 경험했기 때문에 유가족을 옹호하고 마음을 알리는 활동은 유가족이었던 당사자가 가장 잘한다는 점을 느꼈다”고 했다.
▲ 박성현 4.16재단 팀장이 지난 1월 18일 경기도 안산시 4.16재단 사무실에서 취재팀과 인터뷰하고 있다. ⓒ 유하영 기자
전재영 2·18 안전문화재단 사무국장 역시 유가족의 아픔을 같은 유가족이 보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사무국장은 “과거 참사를 겪은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그때 당시에 이랬으면 좋았을 걸, 그때는 이런 걸 놓쳤네’하고 본인은 실천하지 못한 것이 생각난다”며 “그런 경험을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지난 1월 광주 화정 아이파크 붕괴 참사 때에도 광주 학동 참사의 유가족들이 사고 현장을 찾아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미·영·프·독, 해외의 유가족 지원
“La Fenvac est une organisation créée par des victimes pour des victimes.”
(펜박은 희생자들을 위해, 희생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해외에서는 유가족이 다른 유가족을 돕는 형태의 지원이 이미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프랑스 재난피해자협회 ‘펜박(Fenvac)’이 대표적이다. 펜박은 1988년 리옹역 철도 충돌 사건, 1991년 바르보탕(Barbotan) 온천 화재 사건, 1994년 본(Beaune) 버스 참사 등 1980~1990년대 프랑스에서 발생한 참사의 희생자 유가족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다. 새로운 재난이 발생하면 펜박 회원들은 유가족들을 찾아가 자신이 겪었던 슬픔을 공유한다. 유가족이 유가족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펜박은 참사 피해자들을 주기적으로 만나고, 피해자들끼리 연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유가족들 스스로 권리를 지킬 수 있도록 심리적인 지지를 제공한다. 참사의 수사 과정에도 관여한다. 펜박은 프랑스 법무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지침’에 따라 재난 발생 이후 48시간 이내 사건 관련 보고에 참여할 수 있다. 그렇게 지난 28년 동안 프랑스 안팎에서 발생한 120여 개 재난의 유가족들을 지원했다.
▲ 프랑스 재난피해자협회 ‘펜박(Fenvac)’ 홈페이지 (사진 출처: 홈페이지 캡쳐)
영국에도 유족을 돕는 유족 단체가 있다. 자연재해, 테러 등 영국과 해외에서 발생한 30개 재난의 유가족들로 구성된 비영리단체 ‘디에이(DA, Disaster Action)’다. 디에이 회원들은 1980년대부터 유가족들에게 자신의 지난 경험과 감정을 토대로 조언하고,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이 단체는 2002년 발리 폭탄 테러, 2004년 동남아 쓰나미 참사, 2008년 뭄바이 테러, 2014년 MH17 여객기 격추 사건 등 28개가 넘는 국제 재난의 피해자들을 지원했다.
미국과 독일은 유가족 지원 프로그램을 제도화했다. 미국은 항공, 철도, 해양 등 교통 분야 참사의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 아래 가족지원부서(TDA)를 운영하고 있다. TDA는 미국 연방 정부와 각 주, 적십자사 등과 교류하며 유가족들에게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독일에는 국외에서 발생한 참사의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제도도 있다. ‘독일인 희생자와 유족을 위한 조정국(NOAH)’은 외국에서 근무나 여행 중 재난, 테러 공격 등을 겪은 독일인들을 돕는다. 독일 연방 정부, 외무부와 협력해 유가족들에게 적절한 정보와 심리 치료를 제공하며 독일 사회의 재난 관리 대응력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
결국 해답은 ‘믿음’에 있다
백춘승 이천시 민원봉사과 팀장은 유가족 전담 공무원으로 활동하면서 아쉬웠던 점으로 유가족과 유대를 쌓을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을 꼽았다. “가족을 잃었고 상심한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위로가 먼저니까. 그런데 그게 부족했다. 행정 절차를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대관계가 먼저 만들어져야 그 다음에 도움도 드릴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유경근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도 참사 피해자 지원이 제대로 되려면 유가족과 전담 공무원 간의 유대관계가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서로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유 위원장은 세월호 참사 발생 이후 배치된 전담 공무원이 감시하러 온 사람들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는 “교감과 공감의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우리 유가족들과 (전담 공무원의) 교류가 거의 없었어요. 누가 나를 담당하는 공무원인지도 몰랐고요. 특히 참사 직후에는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을 때였기 때문에 ‘우리를 1 대 1로 감시하려 하는구나’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유 위원장은 세월호 참사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도 전담 공무원 체계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정부가 유가족의 슬픔에 공감하고 도울 의지가 분명하다는 점을 보여줘서 유가족의 믿음을 얻어야 전담 공무원의 ‘맞춤형 지원’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며 “도우려는 사람과 도움받는 사람 사이에 공감대와 믿음이 생기기 힘든 지금의 전담 공무원 배치 방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정 서경대 교수는 사회가 유가족을 도울 것이라는 믿음을 얻는 방법으로 ‘공동책임(Shared Responsibil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사회 전체가 재난 피해와 사후 관리 책임을 함께 지는 것, 즉 ‘참사는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공감의 시작이자 믿음을 얻는 법이라는 얘기다.
▲ 유정 서경대 교수가 지난 1월 27일 서울 서경대학교에서 ‘공동책임’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 안효정 기자
유 교수는 “‘내가 맡은 일만 잘하면 되겠지’와 같은 태도에서 벗어나 공동책임을 가져야 한다”며 “공동책임이 존재하면 참사 피해자들은 그 아픔을 이해받는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9·11테러에 대한 뉴욕시와 미국 정부의 태도를 좋은 사례로 소개했다. 미국 뉴욕에서는 매년 9월 11일 기념행사가 열린다.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것으로 시작해 무역센터에 비행기가 충돌한 시각인 오전 8시 46분에 맞춰 묵념하는 게 관례다. 도널드 트럼프 미 전 대통령도, 조 바이든 미 대통령도 ‘9·11 테러를 잊지 말자’고 강조했다. 유 교수는 “그런 태도를 보며 국민들은 함께 아픔에 공감하고,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배운다”며 “(재난이 발생해도) ‘나라가 지켜줄 거야’ 하는 믿음도 얻게 된다”고 했다.
“이렇게 공동책임이 있다면, 유가족에게 ‘저 사람은 보험금 더 타려고 떼쓰는 사람이야’라고 손가락질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고 회복할 권리가 있는 재난 피해자들이야’라는 생각을 좀 더 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참사 후 회복은 남겨진 사람들의 권리
참사 직후, 많은 사람이 유가족에게 지지와 추모의 말을 전하는 ‘허니문 기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짧은 허니문 기간이 지나면 우리 사회는 참사 희생자의 유가족들을 더는 살피지 않는다. 참사 직후 쏟아지던 기사들도 몇 개월 뒤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줄어든다.
취재팀이 만난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우리 모두가 참사 피해자’임을 강조했다. 유가족을 지원하고 그들의 회복을 돕는 과정은, 참사 피해자들이 침해당한 권리를 되찾는 여정이다. 이는 곧 사회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의 밑거름이 된다.
유가족도, 유가족 전담 공무원도, 그리고 우리 모두가 참사의 ‘남겨진 사람들’이다. 남겨진 사람들의 행보를 서로 살피고 적절한 지원 방법을 고민하는 사회적 연대가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참사로부터 우리 모두를 지키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