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쓴 특수활동비 증빙 기록을 검찰 스스로 무단 폐기한 행위를 처벌해 달라는 시민단체의 고발 사건에 대해 서울중앙지검이 “관행적”으로 폐기됐기 때문에 죄를 물을 수 없다며 각하 결정을 내렸다. 관행을 핑계로 범법 행위를 저지른 공공기관과 공무원을 수사했던 검찰의 '내로남불'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는 검찰 예산 공동취재단에 참여하는 시민단체 3곳(세금도둑잡아라,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 함께하는시민행동)이 검찰 특수활동비 기록물 무단 폐기에 관여한 검찰 관계자를 공공기록물법 및 공용서류 무효 혐의로 수사해 처벌해 달라는 고발 사건에 대해 지난 4월 18일 각하 결정을 내렸다. (관련 기사 :‘특활비 기록 불법 폐기’ 남은 공소시효 4개월… 시민단체, 검찰에 고발)
뉴스타파가 5월 7일 뒤늦게 고발인에게 발송된 담당 검사의 불기소 결정서 내용을 확인한 결과, 검찰이 각하 결정을 내린 이유는 크게 2가지였다.
검찰의 각하 결정① 특활비 무단 폐기는 ‘실무 관행’일 뿐 ‘범의’는 없다
먼저 검찰은 고발인의 주장대로 특활비 자료가 폐기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공공기록물의 무단 폐기 내지 공용서류의 효용을 해한다는 범의(犯意)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범죄 의도를 갖고 고의로 특활비 기록을 폐기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검찰은 “(검찰총장 등) 기관장에게 (특활비) 월별집행내역을 보고한 후 그 자료를 폐기하는 실무 관행이 있었다”며 “관행에 따른 폐기와 별도로 고의적으로 특수활동비 집행 관련 자료를 폐기하거나 폐기를 지시하는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서울중앙지검이 지난 5월 7일 고발인에게 발송한 불기소 결정서.
수사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던 검찰이 고의로 자료를 폐기하거나 폐기를 지시한 정황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결론지은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특히 '불법이라도 관행이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의 논리는 일반 국민들의 법상식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하승수 변호사는 “많은 공무원 조직에서 일어나는 범죄 행위들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졌다”며 “다른 기관에서 이런 불법 행위가 일어났다면 바로 수사하고 기소 했을 검찰이 내부에서 벌어진 범죄를 묵과하는 것은 검찰의 내로남불, '검로남불'로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지난 3월 9일 서울서부지법은 학교 시험 답안지를 유출해 무단 파기한 혐의로 연세대 교수 A 씨에게 벌금 500만 원을 선고했다. A 교수를 재판에 세운 검찰의 논리는 사립대학교일지라도 고등교육법에 따라 설립된 학교이므로 공공기록물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사립대 교수에게도 적용하는 공공기록물법 위반 혐의를 국민 세금을 사용한 기록을 폐기한 자신들에게는 정작 적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사립대 교수가 시험 답안지를 유출해 파기했다는 이유로 검찰로부터 공공기록물법 위반 혐의를 적용 받아 유죄가 내려졌다는 경향신문의 지난 3월 18일자 기사.
뉴스타파가 특활비 기록 불법 폐기 문제를 처음 제기했을 당시에는 '폐기하면 안 된다는 지침이 없었다'고 주장했던 검찰이 '관행적 폐기'라며 말을 바꾼 것도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해 6월 뉴스타파 취재 과정에서 대검찰청은 “2017년 9월부터는 명확한 특활비 지침을 적용했기 때문에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라며 “2017년 당시는 특활비 지침이 없었기 때문에 기록이 관리가 안 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특활비 관련 지침이 없었다'는 당시 대검찰청의 주장은 이후 법원 판결문이나 감사원 자료 등 각종 근거를 통해 거짓임이 드러났지만, 검찰은 왜 거짓 답변을 내놨는지 구체적인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그 후 특활비 기록 불법 폐기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되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한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은 “월별로 (특활비 기록을) 폐기하는 관행이 있었다”는 입장을 내놨고, 공교롭게도 이때부터 대검찰청도 '관행적 폐기'였다는 주장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시민단체가 고발한 검찰 특활비 불법 폐기 사건을 담당한 검사 역시, 수사를 진행해 보지도 않고 '관행적 폐기'였다며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검찰의 각하 결정② 폐기를 지시한 범인을 알 수 없어 처벌 못 한다
검찰이 각하 결정을 내린 두 번째 이유는 피의자가 누구인지 특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검찰은 불기소 결정서에 “고발인(시민단체)은 '검찰 특수활동비 관련 자료 폐기한 성명불상의 관계자들'을 고발하였는바, 피고발인이 특정되었다고 보기도 곤란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검찰 내부에서도 특수활동비 기록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검찰총장을 비롯한 각 검찰청 검사장 등 고위 검사들과 그들을 보좌하는 일부 직원 등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기록물이 폐기된 검찰청의 당시 담당자 조사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 관계를 검찰은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2017년 하반기 무단 폐기 확인됐지만, 검찰 공소시효 시점 2017년 5월로 판단
뿐만 아니라 검찰은 특수활동비 기록 불법 폐기 혐의의 공소시효를 2024년 5월 9일로 못 박았다. 공공기록물법 위반 혐의의 공소시효가 7년임을 감안한다면, 검찰은 특활비 기록 폐기 범죄가 일어난 시점이 2017년 5월 9일 이전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뉴스타파가 앞서 보도한 것처럼, 상당수 검찰청에서는 2017년 하반기, 심지어 2017년 전체 기간의 특활비 기록이 통째로 폐기된 사실이 확인됐다. 그런데도 검찰은 공소 시효를 임의로 앞당겨 죄를 물을 수 있는 기한이 이미 지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검찰이 특활비 기록 무단 폐기 사건을 수사할 의지가 없음을 방증하고 있다. (관련 기사 : 전국 42개 검찰청 특활비 기록 무단 폐기…남은 공소시효 1년)
검찰 예산 공동취재단에 참여하는 시민단체들은 검찰의 각하 결정이 부당하다고 판단하고 어제(5월 16일) 서울중앙지검의 상급기관인 서울고검에 특활비 기록 불법 폐기 수사를 촉구하는 항고장을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