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무기' 네이팜의 탄생과 민간인 학살

2023년 07월 20일 20시 00분

뉴스타파는 해외 소재 현대사 사료 수집 중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의 제목은 ‘네이팜의 첫 필드 테스트’, 미국 독립기념일인 1942년 7월 4일 촬영됐다. 출처는 하버드대학교 기록보관소다. 같은 날 촬영된 또 다른 사진들에는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는 물웅덩이 안에서 사람들이 뭔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  1942년 7월 4일 촬영된 '네이팜의 첫 야외실험' 사진
네이팜(Napalm, An American Biography)이라는 제목의 책을 쓴 로버트 니어(Neer, Robert)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장관을 이루며 부풀어 오른 화씨 2,100도의 화염이 운동장 위로 치솟았다. 극도로 뜨겁게 타오른 네이팜이 물 위로 떨어지며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기름을 머금은 연기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조교들이 진흙탕으로 뛰어들어 불이 붙어 끈적이는 방울에 물을 퍼붓고, 좀 더 큰 기름 덩어리는 막대를 써 물 속으로 밀어 넣어 진화했다. 그들은 덩어리의 위치와 크기를 기록하고, 회수 가능한 젤리를 양동이에 퍼담았다.

네이팜(Napalm, An American Biography) 본문
뉴스타파는 네이팜을 만들고 폭발 실험을 한 하버드 대학을 찾았다. 108 북 하버드 거리에 다다르자 울타리 너머로 사진에 보이던 건축물이 보였다. 축구연습장에는 푸른 잔디가 심어져 있었다. 도로 옆 전신주에 걸린 표지판이 이곳이 네이팜탄의 첫 실험 장소였음을 알리고 있었다.
▲ 108 북 하버드 거리 전신주에 설치된 '네이팜 첫 실험' 표지판
네이팜은 미국 정부가 1940년 6월 약 1억 달러 예산으로 설립한 국가국방연구위원회, NDRC의 지원을 받아 하버드대학 루이스 교수 연구팀이 개발했다. 하버드대학 화학생물학과 건물 지하실이 그들의 실험실이었다.
▲  하버드대학 화학생물학과 건물
뉴스타파는 미국 국립문서기록청에서 네이팜탄 투하 실험 영상을 수집했다. 첫 실험 2년 뒤인 1944년 6월, 플로리다주 ‘에글린필드’ 미군 기지에서 촬영됐다. 실험을 주관한 곳은 미 해군사령부와 미 육군 항공대다. 3종류의 미군 항공기가 네이팜탄을 목표물에 투하하고 성능을 평가했다. 
▲  1944년 6월 촬영된 네이팜탄 투하 실험 영상 중 살아 있는 염소를 목표물에 배치하는 장면
실험 목표물은 지상, 수면, 다리와 수풀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식 주택 모형을 설치하고 네이팜의 파괴력을 실험하는가 하면 살아있는 염소를 목표물에 묶어두고 네이팜의 살상력을 측정했다. 미군은 네이팜탄 폭격 후 죽은 염소의 혈액에서 인간 치사량의 두배에 이르는 일산화탄소를 검출했다고 보고했다.
미 공군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3만 2천 톤의 네이팜탄을 한반도에 쏟아 부었다. 미국의 네이팜탄 폭격은 적군과 민간인, 군사 목표와 민간 시설을 가리지 않았다. 미군은 네이팜탄 성능 개량을 지속하며 실전에 활용했다. 목표물에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뛰쳐나오는 사람에겐 기관포를 쏘는 방식도 종종 사용했다. 미군이 네이팜탄을 초토화 폭격에 주로 활용하면서 수많은 민간인 인명 피해를 낳았다. 곡계굴 학살이 대표적이다.
1951년 1월 20일, 충북 단양군 영춘면 곡계굴에 피신해 있던 수백 명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됐다. 네이팜 폭격으로 대부분 불에 타 숨지거나 질식사했다. 유족에 의해 확인된 희생자만 167명, 이중 13세 이하 어린 아이만 74명이다. 실제 사망자는 3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침 10시에 폭격을 해서 마을 전체를 완전히 불바다로 만든 거예요. 마을 50가구를 전부 다 태우고 그 다음에 이 안에 피난 나와 있던 우리 영춘 면민들도 있었지만, 우리 마을 분들하고 또 외지에서 오신 영월, 태백, 정선 이쪽에서 피난 오신 분들이 여기 같이 합세해서 이게 너무나 천연 요새 아니에요. 그렇죠? 지금봐도. 그러니까 여기서 살겠다고 여기로 들어갔는데 여기에 네이팜을 쏘니까 모든 열기가 여기로 다 빨려 들어간 것 같아. 그래서 질식사를 다 하신 것 아닌가 싶다고.

조병규 / 단양 곡계굴 미군폭격 사건 유족 (당시 4세)
뉴스타파가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민간인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를 토대로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에 의한 직간접 피해사례를 집계한 결과 희생자수는 2600명이 넘었다. 이는 실제 희생자의 일부일뿐이다.
전쟁이 얼마큼 야만적이고 누구도 그 전쟁의 참화 속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교훈적으로 알기 위해서라도 한국전쟁에 대한 상처를 70년이 지나면서도 아물지 않고 있다는 걸 우리가 확인해야 되고…

안병욱 /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한국전쟁 이후 우리 공군도 네이팜탄을 보유했다. 1961년 10월 2일 건군 13주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공군은 네이팜탄 폭격을 시연했다.
▲ 1961년 10월 2일 건군 13주년 국군의 날 행사 중 네이팜탄 폭격 시연 장면
다음은 화염탄이라고도 불리는 네이팜탄의 공격입니다. 30피트 저공으로 돌진해서 가상 적의 탱크와 포차를 한꺼번에 불태우는 아슬아슬한 공격입니다. 출격의 명령만 내린다면 우리의 제트기들은 침략자의 머리 위에 이처럼 응징의 포탄을 퍼부어 줄 것입니다.

 국군의 날 행사 네이팜탄 폭격 시연  중 내레이션
전쟁은 인간을 야만의 상태로 돌려놓는다. 현재 세계 대다수 국가들은 각종 협약을 통해 반인도적 무기인 네이팜탄과 백린탄, 집속탄 등의 생산과 사용을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에도 베트남전, 이라크전 등에서 계속 등장하고 있다. 전쟁 승리라는 목표 아래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고 있다.
제작진
디자인이도현
그래픽정동우
출판허현재
자료수집전갑생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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