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朝東)100년] ⑦ 45년 전 신새벽, '진짜 기자'들 거리로 내쫓기다
2020년 03월 17일 08시 00분
1969년 6대 대통령 박정희는 장기집권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2번째 대통령 임기 반환점을 돌며 그는 대통령을 세 번 이상 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는 이른바 ‘3선개헌’을 추진했다. 북한의 위협을 막아내고 경제 발전을 이룩하려면 강력한 영도력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조선과 동아일보, 두 신문은 박정희의 영도력이 필요하다며 3선개헌 논리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3선개헌은 법으로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며 개헌에 힘을 실어줬고, 개헌 반대 시위에 대해서는 폭력성을 부각했다.
1968년 ‘신동아 필화사건’으로 해직된 천관우 전 동아일보 주필은 3선개헌이 있던 1969년 기자협회보 기고문을 통해 당시 언론이 “잠든 사이에 스며든 연탄 가스에 취해 비명 한 번 못 질러 보고 어리둥절하고 있는” 상태라고 개탄했다.
박정희의 장기집권 기도에 맞서 야당인 신민당은 물론 함석헌, 장준하 등 재야인사, 시민과 학생들이 나서 3선개헌을 반대했지만, 1969년 10월 개헌안은 국민투표에서 통과된다. 정부·여당의 위법적인 선전 운동과 공무원을 동원한 부정 투표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투표 결과가 나오자 호외까지 발행하며 압도적 찬성으로 반대를 물리쳤고, 박정희 정권이 신임받았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박정희 장기집권의 길이 활짝 열렸다.
3선개헌이 통과된 후인 1970년 5월 13일, 박정희는 당시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한다. 국민훈장은 국가와 사회 발전에 공헌한 유공자들에게 국가원수가 주는 포상 중 으뜸가는 훈격이다. 방우영의 서훈 사유는 “언론의 창달과 언론계 육성, 언론인의 자질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였다.
같은 해 8월 15일 광복절. 이번에는 조선일보 회장 방일영과 동아일보 회장 김상만이 박정희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서훈 사유는 ‘국가와 사회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는 것이었다.
군사반란과 광주학살로 권력을 꿰찬 전두환 신군부는 채찍과 당근으로 언론 길들이기에 나섰다. 세제 혜택 등 언론사에 특혜를 주는 동시에 이른바 ‘언론통폐합’을 통해 입맛에 맞게 언론판을 새로 짰다. 이 과정에서 천 명 넘는 언론인들이 강제 해직됐다.
1982년 4월, 신문의 날을 맞아 조선·동아 사주 방일영과 김상만은 1970년 박정희에 이어 이번엔 전두환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국민훈장 가운데 가장 훈격이 높은 ‘무궁화장’이었다.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는 방일영과 김상만의 서훈 공적서에는 “민주언론 창달과 신문기업 육성에 기여한 원로 언론인에 대하여 국민훈장을 수여”한다고 적혀 있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두 신문 사주가 받은 훈장이 권언유착의 증거와 같다고 지적했다. 김서중 교수는 “언론이 (독재 권력의) 관리대상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징표일 수 있고, 큰 언론들은 결정적인 국면에 정권에 굴복해 기여한 바가 있기에 정권 차원에서 보상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과 동아일보, 두 신문사의 사주들이 독재정권으로부터 특혜와 훈장을 받았을 때, 신문사에서 쫓겨난 젊은 기자들은 제도 언론이 보도하지 않았던 진실을 알린 죄로 유신 법정에 서야만 했다. 포승줄에 꽁꽁 묶인 기자들은 박정희와 두 신문 사주를 향해 무슨 말을 했을까. 오는 3월 30일(월) [조동(朝東) 100년] 시리즈 12편에서 공개한다.
취재기자 | 홍주환 김용진 박중석 조현미 |
데이터 | 최윤원 |
촬영기자 | 최형석 신영철 |
편집 | 윤석민 |
CG | 정동우 |
디자인 | 이도현 |
출판 | 허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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