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인터뷰]'선생님' 오태석을 고발한 이후 그녀에게 닥친 일들
2018년 03월 21일 16시 23분
(가해자의) 고모한테 연락이 왔더라고요. ‘내가 대신 사과한다. 우리 누구(가해자) 한 번만 살려달라, 합의해줘라’ 한 번만 만나달라고 계속 얘기를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합의할 생각이 없었어요. 전혀 없었는데 본인(가해자)들이 먼저 저를 계속 찾아오고, 직접 가해자들이 찾아도 왔고 연락, 전화, 문자 이런 게 계속 왔었거든요.
성범죄 고발 이후, 피해자들에게 되돌아오는 수많은 2차 피해, 이 가운데서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가해자 측으로부터 종용 받는 합의입니다. 가해자는 물론 가해자 측 가족까지 나섭니다. 결국 이런 식으로 합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제 주변에 있는 지인들도 지치고, 힘들고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만할 때 안 됐냐, 합의해줘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서 나도 지치고 내가 제 주변인들한테 미안하면서 (주변인들이) 지쳐하고 힘들어하는 게 너무 보이니까. (주변인들이) 나를 위해서 보호해주려고 그랬지만 결론적으로는 나도 힘들고 그 사람들도 힘드니까. 그냥 나만 힘들자.이 사람(가해자)들은 합의만 해주면 더 이상 연락을 안 하겠다고 하니까…
이 상처가 누그러진다든가 뭐가 개선될 게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유일하게 바랐던 것은 좀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 그게 다였던 것 같아요
합의금을 받았는데 이 사람이 나한테 사과하는 의미로 내가 그동안에 피해 받은 걸 보상받는 느낌보다는 ‘옜다 먹고 떨어져라’ 이런 돈 받아서 되게 찝찝한 느낌, 받고서도 찝찝한 느낌…
성범죄는 분명 교통사고나 폭행 사건과는 다릅니다. 전혀 다른 피해의 정도와 차원이 다른 회복의 의미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같은 범주에서 합의가 진행된다는 데 큰 함정이 있습니다. 성범죄 합의, 과연 누구를 위한 걸까요?
‘합의했어? 그러면 걔(피해자)도 돈 받고 용서한 거네, 어떻게 그런 일을 돈 받고 용서할 수가 있어? 걔(피해자) 별로 안 힘들었나 보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게 두려웠어요.
성폭행 피해자가 신고를 하고 합의를 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꽃뱀” 프레임입니다. 가해자에게 합의란 마치 무죄의 증거인양 악용되고 있습니다.
유교적 정조관념에 뿌리를 둔 사회적 편견은 여지없이 피해자를 공격합니다. 합의를 안 해줘도 “젊은 남자 인생 망치려고 그러냐, 합의해줘라” 이런 식입니다. 또한 합의한다 해도 “ 돈 받았으면 꽃뱀이지 뭐 ” 세상의 시선은 늘 이렇습니다. 가해자가 강력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됩니다. 합의라는 이름으로.
‘저것 봐, 그냥 합의하에 (관계) 해놓고 돈 뜯으려고 고소했다가 합의했다‘라고 생각해버리니까. 그러니까 피해를 본 사람한테 ‘너 꽃뱀이냐’라고 하는 게 교통사고 당해서 아파 죽겠는 사람한테 ‘너 자해공갈단이냐’라고 환장하는 소리를 하는 거죠.
피해자의 담론이 전혀 없어요. 가해자는 할 이야기가 많아요. ‘피해자가 꽃뱀이라더라, 일부러 나에게 접근했다더라, 가해자는 되게 좋은 사람인데 술 먹고 한번 실수한 거야’ 이런 식으로 가해자들한테는 레퍼토리가 엄청 다양해요.
‘거봐 걔 꽃뱀이잖아, 돈 받으려고 그런 거야’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까 피해자가 합의금이라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생길 수 있는 거죠. ‘나를 꽃뱀으로 몰아가려고 하는 건가? 나 이거(합의금) 안 받아’
지금까지의 (성범죄) 합의는 사실 가해자나 피해자 누구한테도 별로 도움이 안 돼요. 어떻게 보면 재판이나 수사의 편의성을 위한 제도적인, 실제로 운영되는 것은 그렇게 운영되는 것이지 가해자가 이렇게 했다고 해서 반성하면서 다시는 안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단순히 그 순간 모면해보자는 거고, 피해자 입장에서 내가 진정으로 피해 회복 비용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요
뉴스타파 <목격자들> 제작진이 만난 피해 여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원래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그 사건이 있고 난 후로는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어요. 일반 사람처럼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게 너무 힘들어요. 그게 제일 많이 바뀐 것 같아요 평소에는 그냥 하던 것들이 이제는 노력해야 하는 게 돼 버렸으니까
그동안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편에 서서 세상을 바라본 것은 아닐까요? 처벌이든 합의든 그것의 중심에는 피해자가 있어야 합니다. 형량을 낮추기 위한 목적이나 피해자들 비난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번 주 <목격자들>은 성범죄 형사합의제도의 실상과 함정을 취재했습니다.
취재작가 김지음
글 구성 양 희
촬영 권오정
취재 연출 김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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