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윤석열 대통령조차 알지 못했던 RE100.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캠페인을 말합니다. 대통령 후보 토론회를 통해 유명세를 치른 덕인지, 벌써 RE100에 가입한 국내 기업이 21개에 이릅니다. 전 세계에서는 4번째로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전력 소비량을 충족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당장 모든 기업이 RE100에 참여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셈입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서 산업통상자원부는 재생에너지를 직접 사용하지 않더라도 RE100을 이행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른바 ‘녹색 프리미엄’이라는 제도입니다. 기업이 기존에 내던 전기 요금에 녹색 프리미엄 명목의 추가 요금을 내면 재생에너지를 사용한 것으로 간주해 준다는 제도입니다. 이렇게 모인 녹색 프리미엄 추가 수익금을 재생에너지 확대에 사용하면 사실상 RE100을 이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는 거죠. 하지만 이 제도는 탄소 중립 목표의 핵심과제인 온실가스 감축 효과는 없기 때문에 과도기적인 제도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일단은 만들어 놓은 제도이니 잘 돌아가고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녹색 프리미엄의 규모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제도 시행 첫해인 2021년에는 70개 기업이 참여했는데 올해에는 상반기에만 75개 기업이 참여했습니다. 수익금 규모도 각각 147억 원에서 440억 원으로 3배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일단 제도 활성화에는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도 본래 목적인 재생에너지 확대에는 얼마나 도움이 됐을까요?
재생에너지 직접 투자에 사용된 건 수익금의 30% 불과해
뉴스타파는 국민의힘 구자근 의원실을 통해 녹색 프리미엄 수익금 지출 내역을 입수해 분석했습니다. 녹색 프리미엄의 수익금은 한국에너지공단이 집행합니다. 2021년 녹색 프리미엄 수익금 지출 내역을 살펴보니 재생에너지 확대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사업은 8개 지출 항목 중 ‘태양광 설치 지원’ 하나뿐이었습니다. 전체 예산 130억 원 중 40억 원 수준이니, 녹색 프리미엄 수익금 중 실제 재생에너지 확대에 사용된 건 30% 정도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 녹색 프리미엄 재원 활용 현황 (국민의힘 구자근 의원실 제공)
각 사업의 내용을 들여다봤습니다. 그나마 재생에너지 확대에 직접 투입된 예산이라고 할 수 있는 '태양광 설치 지원' 사업에도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습니다. 이 지원 사업 혜택을 받은 기업은 총 16곳입니다. 이 가운데는 녹색 프리미엄에 참여한 두 기업 '아모레 퍼시픽'과 '대주전자재료'도 포함돼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회사들은 자신이 납부한 녹색 프리미엄보다 태양광 설치비로 지원받은 금액이 월등하게 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의 경우, 2022년 상반기에 녹색 프리미엄에 지출한 금액이 1억 8천만 원인 반면 지난해 받은 설치 지원금은 2억 6천만 원으로 0.7배 가까이 많았습니다. 대주전자재료의 경우 같은 시기 녹색 프리미엄에 5백만 원을 납부했지만 지원받은 금액은 4천7백만 원으로 지출 비용 대비 10배 가까이 많았습니다. 적게 내고, 많이 받고, 친환경 이미지도 쌓았으니 기업은 이 제도를 통해 남는 알짜 장사를 한 셈이네요.
▲ 아모레퍼시픽, 대주전자재료(주)가 납부한 녹색 프리미엄과 지원 받은 태양광 설치 지원금 내역
게다가 아모레퍼시픽은 녹색 프리미엄 수익금으로 지원되는 ‘제3자 PPA(재생에너지 전력 거래 계약) 망 사용료’ 사업으로 1억 원가량의 혜택을 더 받을 예정입니다. 제3자 PPA는 신재생에너지 발전소가 한전 중개를 거쳐 RE100 이행 기업에 전력을 판매하는 계약 방식을 말합니다.
에너지공단의 제3자 PPA 망 사용료 지원 현황을 보면, 이 사업 혜택을 보는 것은 현대엘리베이터, 아모레퍼시픽 두 대기업뿐입니다. 망 사용료를 보태줘서 기업들이 제3자 PPA에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겠지만, 대기업만 참여하는 PPA에 녹색 프리미엄 수익금을 써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게다가 ‘제3자 PPA 망 사용료 지원’은 얼핏 RE100에 동참하려는 기업을 지원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 구조를 보면 한전을 위한 셀프 수익 사업에 가깝습니다. 망 사용료란 전기 소비자, 그러니까 기업이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에게 전기를 공급받을 때 한전이 깔아놓은 망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 사용료를 한전에 지급하는 것을 말합니다. 녹색 프리미엄 수익금으로 망 사용료를 지원하면 결국 한전이 거둬들인 녹색 프리미엄 수익금이 에너지공단을 거쳐 다시 망 사용료 명목으로 한전에 돌아오는 구조가 됩니다.
뭐 구조야 어떻든 기업의 망 사용료 부담이라도 덜어주면 제3자 PPA 방식에 참여하는 기업이 늘지 않겠냐 얘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기업들의 속내는 좀 다릅니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기존 전기요금에 이미 기존 망 사용료를 낸 상황에서 한전이 PPA 목적의 망 사용료라는 명목으로 또 한번 요금을 부과하기 때문에 망 사용료를 내는 게 못마땅한 상황입니다. 괜히 나섰다가 불필요한 비용만 더 치르는 꼴이라는 거죠. 또 한전이 망 사용료의 산정 방식을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것도 기업의 PPA가 늘어나지 않는 원인 중 하나라고 합니다.
기후솔루션 한가희 연구원은 제3자 PPA가 활성화 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망 사용료 기본 요금이 중복 부과되고 있고 부대비용들에 대한 투명한 정보공개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상황"이라며 "정부가 기업의 제3자 PPA 참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망 사용료 등 부대비용을 합리적인 수준으로 관리해야 한다"라고 밝혔습니다.
에너지전환포럼의 임재민 사무처장은 “한전이 특별히 이 사업을 위해 망을 더 확충하는 등 투자를 더 하고 있는 것이 없다"라며 "한전이 망 사용료를 비싸게 물린 다음에 이걸 녹색 프리미엄 재원으로 돌려 받는다고 하면 사실 한전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원칙 없는 녹색 프리미엄 지출, RE100 수단으로 괜찮을까
녹색 프리미엄이 RE100 이행 수단으로 작동하려면 무엇보다도 재생에너지 공급 확대라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해야 합니다. 실제 산업통상자원부 고시는 녹색 프리미엄 재원이 △재생에너지 설치지원사업, △재생에너지 보급확대를 위한 금융지원 사업, △재생에너지를 활용한 복지 지원사업, △재생에너지 관련 기반구축사업 등 모두 재생에너지 확대에 쓰여야 한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하지만 뉴스타파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에너지공단은 재생에너지 확대보다는 기업 지원이나 국가 시책 홍보나 연구 사업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RE100 컨설팅 지원’, ‘K-RE100 이행사업 보증지원’ 등 사실상 기업 활동을 지원하는 데 12억 원의 예산을 배정했습니다. 또 홍보와 연구 용역비 역시 이미 그의 역할을 하는 별도의 기관과 예산이 존재하는 데도 2중, 3중으로 지원이 된 모양새입니다.
이 가운데 홍보 예산 5억 7천만 원은 재생에너지 홍보 영상을 만들고, 신문 지면에 광고를 싣는 데 지출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에너지정보문화재단 같이 홍보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인데 말입니다.
▲ 재생에너지 홍보비 지출 내역 (국민의힘 구자근 의원실 제공)
홍보 업무에 특별한 전문성이라도 있는 걸까요? 대체 이 예산으로 어떤 광고를 했는지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글쎄요, 판단은 보류하겠습니다. 이 광고,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본래의 목적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이나요?
▲ 한국에너지공단이 동아일보에 낸 광고 (2022. 2. 24.)
기업 연구 지원 항목을 살펴보면 한국전기연구원, 에너지경제연구원, 한국태양광에너지 학회 등에 용역비 12억 4천만 원을 지출했습니다. 해당 기관들은 애당초 기업 연구 지원을 위해 설립된 전문 연구 기관입니다. 이미 자체 예산을 배정 받아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해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연구 내용도 산업과 기업 정책 등을 위한 연구로,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녹색 프리미엄 제도 본래의 취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 기업 연구 용역 지출 현황 (국민의힘 구자근 의원실 제공)
임재민 에너지전환포럼 사무처장은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야 되는 건데 그냥 수출 경쟁력 강화 기업 지원 이런 차원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녹색 프리미엄의 원래의 취지하고는 맞지 않다”라고 지적했습니다.
탄소중립 목표 시한까지 한시가 급한데, 녹색 프리미엄 수익금은 대체 왜 이렇게 쓰이고 있는 걸까요? 한국에너지공단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규정을 벗어나게 사용하진 않았다”라면서 “사업 초기이다 보니 홍보 활동이 필요했다”라고 밝혔습니다. 또 “더 많은 예산이 재생에너지 확대에 쓰여야 하는 점은 내부적으로도 인식하고 있다"라며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없는 데다가 재생에너지 확대에 제대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녹색 프리미엄. 이 같은 상황에 기업들이 직접 재생에너지를 쓰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이유로 녹색 프리미엄에만 참여해서 친환경, RE100 이행 기업의 타이틀을 가져가고 있는 셈입니다. 이른바 '그린 워싱', 기업이 진짜 탄소 중립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친환경적인 이미지로 포장하는 것을 정부가 돕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당장 폐기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본래의 목적에 맞게 쓰일 수 있도록 제도를 잘 보완하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녹색 프리미엄 수익금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공개조차 되지 않는 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또 당장 재생에너지 보급률이 낮은 상황을 고려해, 일단 녹색 프리미엄 수익금이 재생에너지 확대에 더욱 꼼꼼히 쓰일 수 있도록 감시하자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녹색 프리미엄에 제 기능을 하려면 일단 기업들에 합리적인 수준의 구매 가격을 매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장다울 그린피스 전문위원은 “녹색 프리미엄의 구매 하한가격이 현재 10원/Kwh인데, 재생에너지의 가치로 봤을 때는 매우 낮은 가격”이라며 “장기적으로는 RE100 이행 제도에서 녹색 프리미엄 제도가 제외가 되거나, 구매 하한가격을 높이는 방법 등으로 보완하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