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동안 모두 9개 국가기관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가동됐다. 참사 직후부터 검경합동수사본부 수사와 해양심판원 조사, 감사원 감사, 국회 국정조사가 잇달았다. 2015년부터는 특별법으로 설립된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선체가 인양된 2017년부터는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가, 그리고 2018년부터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가 활동을 이어갔다. 사참위 활동 기간 중 검찰 세월호 특별수사단과 세월호 DVR 특별검사의 수사도 있었다.
10년에 걸친 수사·감사·조사 과정에서 확보된 사실관계들과 기록들을 토대로, 이제 세월호 진상 규명의 두 축인 '침몰 원인'과 '구조 실패 이유'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가능해 졌다.
세월호는 ▲사소한 기계적 결함도 견디지 못할 만큼 위태롭고 위험한 배였고, ▲선원들은 승객들을 배 안에 대기시켜 놓은 채 자기만 살기 위해 도주했으며, ▲해경은 지휘부부터 말단까지 집단적으로 무능하고 조직적으로 무책임했다.
작은 기계적 결함도 못 견딜 만큼 위태로웠던 배
세월호는 청해진해운이 2012년 일본에서 들여온 18년 된 중고선이었다. 인천-제주 항로에서 오하마나호를 단독 운항하던 청해진해운은, 이 항로에 다른 선사가 진입하기 쉽도록 규제가 완화될 것이란 소문을 듣고 항로를 방어하기 위해 한 척을 더 투입하기로 했다. 정부가 중고선의 선령 제한을 기존 20년에서 30년으로 완화해준 덕에 중고선을 들여올 수 있었다.
'세월호'라고 이름 붙인 뒤 곧바로 개조 공사를 했다. 여객 정원과 화물 적재 공간을 늘리고 실소유주 유병언이 지시한 전시실을 만들기 위한 증개축은 배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무게중심을 크게 악화시켰다. 평형수를 채우지 않으면 스스로 떠 있을 수도 없는 배가 되어버렸지만, 한국선급은 졸속으로 검사하고 복원성계산서를 승인해 줬다.
▲ 청해진해운이 일본에서 18년 운항한 나미노우에호를 사들여 증축한 객실 부분
2013년 3월 취항한 세월호는 화물은 줄이고 평형수를 더 채워야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해진해운은 그 반대로 운항했다. 수익을 좌우하는 화물을 늘 가득 채웠고 고박은 대충 했다. 과적으로 만재흘수선이 잠기면 평형수를 빼내 배를 띄워 운항관리자의 눈을 속였다. 크고 작은 사고가 속출했다. 강풍에 배가 좌우로 크게 기울며 부실하게 고박된 화물들이 파손되기도 했고, 화물칸 안에서 이동하는 지게차 때문에 배가 기울어 외부의 승객용 계단이 찌그러지기도 했다. 선원들은 화물을 줄여 달라고 요구했지만 청해진해운 임원들은 일축했다. 세월호는 1년 1개월을 위태롭게 운항했다.
▲ 사고 당시 세월호 2층 화물칸에 실려 있던 자동차들이 왼쪽으로 쏠려 내려는 모습
참사 전날인 2014년 4월 15일에도 세월호에는 화물이 가득 실렸고 고박은 대충 이뤄졌다. 안개 때문에 2시간 반 늦게 출항해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는 다음 날인 4월 16일 오전 8시 49분경 병풍도 인근 해상에서 오른쪽으로 급선회하며 왼쪽으로 쓰러졌다. 조타장치 고장으로 방향타가 오른쪽으로 계속 돌아가버려 생긴 일이었다. 만약 복원성이 안정적인 배였다면 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돌다가 엔진만 끄면 서서히 멈췄을 것이었지만 세월호는 단숨에 왼쪽으로 18도까지 기울었고 그때부터 대충 묶인 화물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46도까지 급격하게 기울어버렸다.
▲ 화물칸 2층 통풍구로 침투한 해수가 바닥층 기관부 전체로 확산된 경로
그러자 화물칸 2층 통풍구로 해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통풍구와 연결된 선체 바닥층의 핀안정기실로 해수가 흘러들어갔다. 규정대로라면 운항 중 닫아두어야 할 수밀문과 수밀맨홀 7개가 모두 열려 있었고, 해수는 선체 바닥층 기관부 전체를 채웠다. 세월호는 급격히 부력을 잃으며 1시간 반 만에 뒤집혀 물에 잠겨 버렸다.
도주한 선원들...집단적으로 무능하고 조직적으로 무책임했던 해경
4월 16일 오전 8시 49분, 서해청 소속 진도VTS 관제 모니터 속에서 세월호를 가리키는 아이콘이 급격하게 선회했다. 그러나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2인 1조 근무가 원칙이었지만, 관제사들은 1명만 관제하고 1명은 쉬거나 자는 '변칙근무'를 일상적으로 해왔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8시 52분 승객 최덕하 학생이 전남119에 신고 전화를 걸어 8시 54분 목포해경과 3자통화가 연결됐다. 목포해경이 거꾸로 진도VTS에 전화해 사고 사실을 알렸다. 사고 후 6분이 지나서야 진도VTS는 허겁지겁 세월호와 교신을 시도했다.
▲ 진도VTS 관제화면 포착된 세월호의 급선회 모습
8시 57분, 목포해경이 세월호와 가장 가까이 있던 123정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정원 50명의 100톤급 경비정이었다. 123정은 출발 직후 세월호를 3번 호출했지만 응답이 없자, 더 이상 교신 시도를 하지 않은 채 30분 이사을 그냥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하면 구명조끼를 입은 승객들 수백 명이 바다 위에 둥둥 떠있을 거라 예상하면서 SSB 통신으로 주변 어선들만 불러 모았다. 하지만 이때 세월호 선내에서는 "움직이지 말고 제자리에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이 반복되고 있었다.
▲ 조난선과 교신을 유지한다는 초기 대응 매뉴얼을 지키지 않은 해경 123정
123정이 현장으로 향하고 있던 9시 16분쯤, 상선 두라에이스호가 세월호 사고 해역에 도착했다. 곧 침몰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뒤늦게 세월호와 교신을 시작한 진도VTS는 "지금 승객을 탈출시키면 모두 구조가 가능하냐?"는 세월호의 질문에 아무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답답한 교신을 듣다 못한 두라에이스 문예식 선장이 소리를 질렀다. "라이프링(구명튜브)이라도 착용을 해가지고 탈출을 시키십시오! 빨리!" 진도VTS는 서해청에 전화를 걸어 승객 탈출 지시를 내릴지 물었다. 서해청은 "선장이 판단할 일"이라고 답했다. 진도VTS가 세월호에 그대로 전달하면서 "경비정이 10분 뒤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알렸다. 이 말을 들은 세월호 조타실 선원들은 승객들을 그대로 둔 채 경비정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헬기 511호의 첫 보고
9시 27분, 해경 헬기 511호가 세월호 상공에 도착했다. "여객선 40에서 45도로 기울어져 있고 승객들은 대부분 선상과 배 안에 있음." 첫 현장 보고였다. 그러나 지휘부에선 아무 지시도 내려오지 않았다. 헬기 511호는 눈에 띄는 사람부터 구조하기 시작했다. 가장 빨리 빠져나와 우현 갑판 위로 올라와 있던 조리부 선원과 조리장이 가장 먼저 구조됐다.
▲ 9시 34분경 세월호에 근접한 123정이 촬영한 현장 모습
9시 34분, 123정도 세월호 옆에 도착했다. 그런데 바다 위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당황하기 시작했다. 9시 36분, 해경 본청에서 123정장 김경일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여인태 경비과장이었다. 바다 위에도, 갑판 위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고, 구명뗏목과 구명정도 하나도 펼쳐져 있지 않은 상황에 양쪽 모두 당황했다. 김경일 정장은 "배가 점점 기울어지고 있다"고도 보고했다. 여인태 과장은 "지금부터 모든 상황을 TRS(무선공용통신)로 실시간으로 보고하라"고만 말한 뒤 전화를 끊었고 이후 지휘망에서 사라져 버렸다.
해경 지휘부에서 별다른 지시가 없자 123정도 눈에 보이는 사람부터 구조하기 시작했다. 역시 가장 먼저 탈출해 좌현 갑판에 대기하고 있던 기관부 선원들이 먼저 해경 구명보트에 올라탔다. 9시 39분이었다. 앞쪽 조타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조타실 선원들도 탈출을 결심했다. 9시 40분, "승객이 450명이라서 경비정 이거 한 척으로는 부족할 것 같고 추가적으로 구조를 하러 와야될 것 같다"고 제주 운항관리실과 마지막 교신을 한 뒤 조타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123정을 향해 손을 흔들자 123정이 조타실에 접안했다. 선원 8명과 필리핀인 부부 가수 등 10명이 차례로 123정으로 올라탔다. 이준석 선장은 속옷만 입은 채 세월호를 버리고 탈출했다. 그 순간에도 선내에서는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안내방송이 계속되고 있었다.
▲ 속옷 바람으로 123정으로 건너가고 있는 이준석 세월호 선장
세월호가 기울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123정의 급박한 현장 보고가 계속됐다. 그러나 지휘부에서는 '열심히 해보라'는 수준의 지시만 내려왔다. 9시 50분을 넘기며 3층과 4층 좌현 출입구가 잠겨 승객이 탈출하기도, 해경이 진입하기도 어려워졌다. 그 지경이 되도록 123정장도, 각급 상황실의 지휘부도 '승객 탈출' 판단 내리지 않고 하나마나한 보고와 지시만 주고받았다. 배가 70도 넘게 누워버린 10시가 되어서야 김문홍 목포서장이 '퇴선 방송'을 해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김경일 정장은 이마저 이행하지 않았다.
10시 10분부터 기울어지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배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닷물에 밀려 승객 수십 명이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주변 어선들이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이들을 구해냈다. 그러나 300명 넘는 승객이 배와 함께 물 속으로 잠겨버렸다. 사고 발생 100분 만이었다.
▲ 들이치는 바닷물에 밀려 밖으로 튕겨 나오는 승객들을 구하려 달려드는 어선들
이 과정에서 해경 지휘부의 적절한 지시는 거의 없었다. 해경 본청에서는 "퇴선 준비를 하라"고 했다가 조금 뒤 "차분하게 구조를 기다리도록 유도하라"고 하는 등 상반된 지시로 오히려 혼선을 부추겼다. 당시 TRS와 함께 해경 구조세력의 핵심 통신수단이었던 코스넷 문자상황보고 대화방의 교신 상황은 해경이 얼마나 엉망인 조직인지 보여준다.
123정 출동 직후인 9시 2분부터 세월호 전복 이후인 10시 35분까지 코스넷 대화방에 올라온 문자는 모두 1,190개였는데, 이 가운데 770개가 "000님이 입장하셨습니다"와 같은 입장 알림 문자나 "000님을 환영합니다" 같은 입장 환영 문자였다. 자동 설정된 환영 문자들이 간간히 이뤄진 지휘부의 지시 문자들을 순식간에 밀어올려 모니터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게다가 123정에는 코스넷이 설치돼 있지 않았는데도 본청 상황실에서는 123정을 향해 문자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고, 세월호와 직접 교신하고 있던 진도VTS는 문자 대화방에 초대되지도 않았다.
▲ 자동 설정된 '입장 환영멘트'로 가득찼던 해경의 코스넷 문자 대화방. 123정엔 코스넷이 설치되지 않았었다.
지난해 11월 2일, 대법원은 구조 지휘 과실 혐의로 기소됐던 김석균 해경청장 등 지휘부 11명에 대해 최종 무죄를 선고했다. 해경 조직 전체의 집단적이고도 조직적인 무능이 구조 실패의 원인이므로 일부 개인들만 형사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결국 해경 지휘부는 세월호 승객 구조에 대해 아무것도 판단하지 못 하거나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해경 지휘부에 대한 사법적 단죄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곧 국가의 책임까지 면제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2018년 7월 법원은 세월호 유가족들이 낸 국가배상 소송에서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