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타파] 현대중공업④ 앞에선 임금체불, 뒤에선 채용박람회

2019년 04월 29일 08시 00분

지난 4월 23일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정문. 노란 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이 오토바이 경적을 울리며 무리를 지어 어디론가 향했다. 이들이 도착한 인근 울산 동구청에서는 고용노동부와 울산광역시 주최로 ‘울산 조선산업 사내협력사 채용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구인기업 25개 사는 모두 현대중공업 사내협력사와 현대미포조선 사내협력사들로 사실상 현대중공업을 위한 채용박람회였다.  

동구청으로 몰려간 노동자들 역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었지만 채용박람회장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피켓을 들고 있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최근 3, 4월 치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었다. 한쪽에서는 임금이 체불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채용박람회를 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지난 4월 23일 오후 울산광역시 동구청에서 열린 ‘울산 조선산업 사내협력사 채용박람회’ 입구에서 최근 임금을 체불당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들이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에 따르면 올해 3월과 4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  18곳의 노동자 2천여 명이 한달 치 이상의 임금을 체불 당했다. 이 중 16개 업체 소속 1천7백여 명은 현대중공업이 하청업체들에게 빌려주는 이른바 ‘상생지원금’으로 밀린 임금을 일부 지급받았다. 하지만 폐업되거나 계약해지 통보를 받은 업체 소속 노동자 300여 명은 이날까지도 임금을 받지 못했다. 상생지원금은 10개월 상환조건으로 현대중공업이 사내하청업체에게  이자없이 빌려주는 돈이다. 말은 상생지원금이지만 턱없이 낮은 기성금(공사대금)으로 지급하기 부족한 인건비를 채우는데 쓰이고 결국 하청업체에게는 고스란히 빚이 된다.

같은날 오후 현대중공업 정문에서는 최근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체불한 현대중공업 현직 사내하청업체 대표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곽성한 (주)하양 대표는 “현대중공업은 매월 직원들의 임금도 줄 수 없는 기성(공사대금)에 전자서명을 요구했다”며 “전자서명을 거부하면 직원들에 대한 최소한의 임금도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고 이후 사업 지속이 불가능하기에 사실상 강제 서명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주)하양 곽성한 대표는 지난해 4월부터 사내하청업체를 운영하는 1년 동안 기성금으로 부족한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신용보증재단‧중소기업진흥공단 대출 2억 4천만 원, 4대보험 체납액 1억 1천만 원, 3월말 현재 체불임금 4억 5천만 원, 현대중공업 상생지원금 대출금 1억5천7백만 원까지 총 9억5천7백만 원의 빚을 진 상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양은 현대중공업으로부터 이번달 30일자로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인건비도 줄 수 없는 수준의 기성금에 항의해 노동자들과 함께 몇 차례 작업거부를 한 것이 해지 사유였다.

▲4월 23일 울산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현대중공업 갑질 피해자대책위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사내하청업체 (주)하양의 곽성환 대표가 현대중공업의 갑질 실태에 대해 밝히고 있다.

‘갑질타파 주인공들’의 문제는 개선됐을까

뉴스타파는 지난해 12월 갑질타파 첫번째 대기업으로 현대중공업을 세 차례에 걸쳐 보도했다. 당시 보도에서 현대중공업의 갑질 피해 사례로 등장했던 하청업체들은 어떻게 됐을까.

관련 보도에 등장했던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 대한기업 김도협 대표와 현대중공업 1차 벤더 동영코엘스 이원태 대표는 지난 2월부터 현대중공업 정문 맞은 편에서 천막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두 대표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고 흰머리가 부쩍 많아졌다.

김도협 대표는 “방송이 나가고 조금도 개선된 것은 없다”며 “개선될 여지도 없어 보이고 현대중공업은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울산시와 고용노동부가 나서서 현대중공업을 위한 채용박람회까지 연 것을 두고 “인력난이 왜 생겼냐를 봐야 한다”며 “현대중공업 갑질때문에 월급을 제대로 안 주니까 작업자들이 떠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대중공업의 납품 단가 후려치기로 지난해 공장 문을 닫은 동영코엘스의 이원태 대표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 결과만 기다리고 있다. 동영코엘스는 지난해 3월 공정거래조정원에서 현대중공업과의 조정에 실패했고 같은해 7월 공정위에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위반 혐의로 현대중공업을 고발했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 대표는 “물론 피해사례 내용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조사해야 되겠지만 조속한 결과 발표도 굉장히 중요하다”며 “공정위 조사 결과가 하루 늦어지면 목숨이 하루 더 촌각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23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 대한기업의 김도협 대표와 1차 벤더 동영코엘스 이원태 대표가 울산 현대중공업 정문 맞은 편에서 이날로 70일째 천막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

두 대표는 현대중공업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현대중공업 정문 맞은 편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거대한 이슈 앞에 이들처럼 피해를 입은 하청업체들의 목소리가 묻혀버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원태 대표는 “그동안 국회에 가서 증언대회나 토론회를 통해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렸는데 그것들이 다 물거품이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불법파견업자였다며 현대중공업과 본인을 노동청에 셀프고발했던 한익길 전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 경부산업 대표. 한 대표는 2016년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 참석해 스스로 불법파견을 했다고 인정했다. 이후 고용노동부 울산지청이 2017년 1월 현대중공업 사내하도급 실태조사를 벌여 불법파견이 아니라고 결론내자 같은해 12월 고용노동부 울산지청에 본인과 현대중공업을 불법파견 혐의로 고발했다. 이 사건은 올해 2월 검찰에 송치됐지만 검찰에서 보강 조사를 지시해 다시 울산지청에 넘어와 있는 상태다. 울산지청이 어떤 의견으로 검찰에 사건을 송치했는지는 고발 당사자인 한 대표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한 대표는 지난해 10월 공정위가 현대중공업의 하도급 위반 혐의에 대해 직권조사를 한 것과 관련해 “오는 6월 말쯤 결과가 발표될 것으로 알고 있다”며 “대우조선해양보다 더 확실하게 하도급 위반에 대한 판정을 내릴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공정위는 지난 2월 대우조선해양에 대해 서면미교부, 부당특약 강요, 부당한 도급대금 결정 등 하도급법 위반으로 108억 원 과징금 처분을 내렸다. 대우조선해양은 이에 불복해 이달 3일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한편 현대중공업은 지난 3월 8일 산업은행과 대우조선해양 인수 관련 본 계약을 체결했다. 업계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의 초기 인수 소요자금은 6천억 원 내외, 향후 조선업황에 따라 최저 1조원에서 최대 6조원까지 재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취재 조현미
촬영 신영철
편집 박서영 정지성
그래픽 정동우
디자인 이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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