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사기 잡아도 내 보험료 줄지 않는 이유
2018년 07월 05일 15시 37분
명절이면 어김없이 나오는 기사가 있습니다. 제목은 대개 이런 식입니다.
장거리 운전이 많은 명절 연휴에 교통사고를 유의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내용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들여다보면 이 기사의 다른 목적이 보입니다.
시작은 각종 통계치입니다. 평소보다 교통사고가 44.8%가 증가하고 부상자 역시 67.6% 늘어난다는 내용입니다. 시종 명절 운전에 대한 불안을 키우던 기사는 이내 뜬금없는 결론을 내립니다. 운전자 교대가 가능하도록 자동차 보험 '단기운전자확대특약'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승-전-보험'인 셈입니다.
올 추석을 앞두고 언론사들이 써낸 '기-승-전-보험' 기사는 모두 20건입니다. 알만한 중앙 일간지와 경제지, 방송사도 어김없이 이런 기사를 썼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손해보험협회가 배포한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겨 쓴 기사입니다.
이런 사례도 있습니다. 지난 4월, 언론들은 이른바 '메디 푸어'(Medi-poor, 과도한 의료비 부담으로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전락한 사람) 문제를 집중 보도했습니다. 하루 사이 20여 건의 관련 보도가 나왔습니다.
민간 의료비 부담과 고액 진료비 비중이 증가해 메디 푸어가 양산될 수 있다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하지만 기사 말미에는 뜬금없는 '기-승-전-보험' 식 해법이 나옵니다. 메디 푸어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중증 질환을 보장하는 CI(Critical Illness)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생명보험협회가 배포한 보도자료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쓴 기사입니다.
문제는 기사까지 써가며 권할 만큼 CI보험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싼 보험료와 까다로운 보장 조건 때문에 많은 보험소비자들이 가입을 기피하는 추세입니다. 생명보험협회에 따르면, CI보험 신계약건은 전년대비 20% 이상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보험사들은 아예 CI보험의 문제점을 보완한 신규 상품을 내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같은 전후 사정은 모른 채 언론 보도 그대로를 믿었다가는 CI보험의 '막차'를 타는 낭패를 보게 되는 셈입니다.
'기사인 듯 기사 아닌, 광고인 듯 광고 아닌' 언론의 보험 보도 사례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노골적인 광고성 기사라도, 소비자 피해까지 유발할 수 있는 엉터리 정보라도 언론은 보험업계의 목소리를 찾아가며 듣습니다.
반면, 금감원에 접수되는 보험소비자의 민원이 연간 5만 건에 이르지만 이들의 하소연이 언론에 실리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이같은 보험 보도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뉴스타파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뉴스 빅데이터 분 석서비스 '빅 카인즈'를 이용해 언론의 보험 보도 경향을 분석했습니다. 8개 중앙일간지가 지난 6개월 사이(2018.5.14~2018.11.14) 작성한 보험 기사 798건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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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뉴스 내용의 대강을 알 수 있는 키워드를 추출했습니다. 이 키워드들을 분석해보니 보험업계 관련 키워드가 뉴스에 등장한 횟수가 소비자 관련 키워드보다 2배 이상 많았습니다. 개별 보험사, 보험 협회, 보험연구원 등 보험업계와 관련된 키워드는 총 3,300번 뉴스에 등장했습니다.
그에 반해 '고객', '가입자', '소비자' 등 소비자 관련 항목으로 분류할 수 있는 키워드가 뉴스에 등장한 횟수는 1,618번이었습니다. 보험업계에 관한 정보가 소비자 측에 비해 2배 이상 언론에 더 자주 노출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기관·단체 이름을 중심으로 추려보면 노출 빈도의 차이는 더 커집니다. 개별 보험사와 보험협회, 보험연구원 등 보험업계 유관기관들이 기사에 등장한 횟수는 총 358건, 소비자 보호를 위한 기관·시민단체가 뉴스에 등장한 횟수는 100건으로 나타났습니다. 3.5배 이상 차이가 난 것입니다.
언론은 보험 취재를 할 때 누구의 말을 들을까요? 어떤 취재원의 코멘트가 기사에 더 많이 인용되는지를 보면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보험업계는 소비자를 압도합니다. 지난 6개월간 보험업계 관계자들은 115건 기사에서 193개의 코멘트를 남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소비자 본인, 소비자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의 코멘트가 기사에 실린 사례는 45건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언론이 보험사 관계자를 4번 만나는 동안 소비자는 단 한번도 만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언론이 보험소비자의 하소연 대신 보험업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신문 마지막 페이지의 전면광고, 황금시간대의 TV 광고, 케이블·종합편성채널의 중간 광고까지. 언론의 가장 비싼 광고 상품을 사들이는 VIP 광고주가 바로 보험회사이기 때문입니다.
금융계는 전통적으로 가장 많은 광고비를 쓰는 업종입니다. 한국광고산업협회가 발간한 '2017 광고산업'에 따르면(*시청률조사기관 등의 자료에 근거한 광고비 추산치), 금융계는 지난 5년 사이 전체 광고 시장의 20%를 차지해왔습니다. 금융계의 광고주 가운데에서도 보험사의 위상은 독보적입니다. 2016년 보험사 가운데 가장 많은 광고비를 쓴 3개 보험사(AIA생명, KB손해보험, 동부화재)의 광고비 총액(1,600억 원)은 은행권 상위 3개 회사(IBK기업은행, 신한은행, 농협은행)보다 2배 이상 많았습니다.
매년 20대 광고주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보험사입니다. 최근에는 보험사들이 광고비 지출을 줄여나가는 추세이지만, 2013년까지만 해도 20대 광고주 4곳 중 1곳은 보험사였습니다. AIA, AIG, 라이나 같은 외국계 보험사들은 2013년 한해 동안에만 무려 2,000억 원의 광고비를 각각 지출했습니다. 국내 보험사 가운데서는 동부화재(현 DB화재)와 삼성화재, KB손해보험이 매년 500~700억 원의 광고비를 써가며 20대 광고주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10000배 부자 앞에선 노예가 된다'는 옛말은 보험과 언론의 관계에 들어맞습니다. 중견 신문사의 한해 매출은 채 1000억 원이 되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보험사 하나가 언론사 한해 매출에 맞먹는 광고비를 쥐고 있다 보니 언론사로선 보험업계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드는 보험사의 이 천문학적 광고비는 어디서 나올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고객이 내는 보험료입니다. 보험료 안에는 보험사가 운영 경비와 서비스 비용 등으로 사용할 '사업비'가 포함돼 있습니다. 광고비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금감원 금융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생명보험사들의 평균 보험료 수입은 2~3조 원 수준입니다. 이 가운데 사업비는 보험사 평균 6,000억 원 정도입니다. 보험사가 정해진 사업비 안에서 무한정 광고비를 끌어쓰다 보면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옵니다. 보험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거나, 고객에게 청구되는 보험료가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소비자는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 지난해 금감원에 접수된 전체 금융 민원 가운데 3건 중 2건은 보험 관련 민원이었습니다. 민원은 결국 금융분쟁 조정위원회로 넘어가지만 위원회의 결정을 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제기된 64,447건의 분쟁 조정 신청 가운데 실제 분쟁 조정 결정을 받은 건은 49건에 불과했습니다.
내몰리듯 소송에 나서도 보험사를 상대로 소비자가 이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난해 법원이 판결을 내린 보험사-소비자 소송 8,421건 가운데 소비자가 전부 승소한 사례는 8.3% 정도였습니다. 언론이 소비자들의 마지막 보루인 셈입니다.
왜 뉴스타파만 보험사랑 싸우나요?
취재하며 많이 들었던 얘기입니다.'보험의 배신'을 향한 소비자의 아우성이 계속되고 있지만 정작 언론의 마이크는 엉뚱한 곳을 향해 있습니다. 뉴스에는 새 국제회계기준 IFRS17 도입을 앞두고 보험업계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들이 가득합니다. 소비자가 더 많은 보험금을 받으려 하는 것은 보험금 누수를 야기하는 보험 사기라는 보험업계의 주장을 여과 없이 그대로 실어 나르기도 합니다.
사실 그 힘들다는 보험업계의 진실은 따로 있습니다. 지난해 보험업계의 당기순이익은 전년 대비 33%나 급증했습니다. 액수로는 7조8323억 원에 이릅니다. 약속된 보험금도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한 보험소비자들의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간 '보험의 배신'이 다룬 이야기 중에 정말 새로운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이미 수많은 보험소비자들이 겪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을 다뤘습니다. 하지만 어디를 가나 보험소비자들의 하소연은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소비자들이 갖고 있는 언론에 대한 갈증은 그만큼 컸습니다.
여전히 다루지 못한 얘기가 많습니다. 병보다도 보험 때문에 더 힘들다는 환자들, 보험사와의 소송으로 수년째 법원을 드나들어야 하는 민원인들, 억울하게 보험사기범에 몰렸지만 끝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기구한 사연까지. 뉴스타파가 '보험의 배신' 연속 보도를 맺으면서도 보험 문제에 대한 관심과 취재는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취재 : 오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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