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예산 정부 ‘마음대로’...국회 심의 기능 실종

2014년 12월 31일 15시 00분

대한민국 헌법 제54조 1항은 ‘국회는 국가의 예산안을 심의·확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민의 대표로 구성된 국회가 국가 예산이 효율적이고 투명하게 배분됐는지를 감시하도록 명문화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의 예산 편성과 집행 과정을 보면 이 같은 규정은 있으나 마나 할 정도로 국회의 예산 심의권이 심각하게 제약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2013년 1월 국회는 342조 원 규모의 2013년도 예산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이 예산안에서 4조9103억 원을 감액하고, 4조3720억 원을 증액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회가 증액 또는 감액한 사업은 모두 1759개. 국회 예산정책처가 이들 사업에 투입된 예산이 어떻게 쓰였는지 들여다 본 결과, 정해진 용처에 맞게 예산이 집행되지 않은 사업이 5개 중 1개 꼴인 304개나 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정부가 임의로 해당 사업의 예산을 증감하거나 다른 곳에 전용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보건복지부의 가족양육수당 지원사업이 대표적입니다. 국회는 취학 전 0~5살 아동에 대한 양육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안보다 2538억 원을 늘린 8809억 원의 예산을 책정했습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지원 대상을 줄여 국회 증액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880억 원의 예산을 다른 곳에 썼습니다.

정부는 또 10인 이하 사업장 근로자의 고용보험 및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을 위해 국회가 증액한 예산 587억 원 가운데 305억 원을 취업성공 패키지 지원 사업에 전용했습니다. 이처럼 예산 집행 단계에서 정부가 무단으로 예산을 삭감한 경우는 95개 사업에서 3061억 원이나 됩니다.

반면 국회가 낭비 요소를 줄이겠다며 삭감한 예산이 슬그머니 늘어난 경우도 많습니다. 방위사업청은 장거리 공대지 유도탄을 구매하겠다며 564억 원의 예산을 신청했습니다. 국회는 5000만 원만 배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삭감했습니다. 전년도 예산 중 쓰지 않고 이월된 예산 400억 원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방부는 돈이 모자란다며 국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46억 원의 예산을 무단으로 증액했습니다.

이처럼 국회가 감액한 사업 중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예산을 늘린 사업은 22개 부처, 54개 사업. 국회가 예산 낭비를 막겠다며 2840억 원을 삭감했는데 정부는 오히려 원안보다 3285억 원을 증액해 제 멋대로 썼습니다.

국회의 예산 심의권을 침해한 중대한 위법 행위지만 이로 인해 처벌받은 공무원은 없습니다. 처벌 규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국회는 지난 8월 결산심사소위원회 심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기획재정부는 국회에서 감액된 사업이 국회의 의결 취지에 부합하도록 집행하라”며 시정 요구를 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국회의원들 사이에서는 정부가 ‘갑’ 질을 한다는 푸념이 나오고 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완주 의원은 “선출직에 대한 임명직들의 수퍼 갑질이다”며 “자괴감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국회의 예산 심의권이 제약을 받게 된 것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의 영향입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국회는 예산결산위원회라는 상임위원회를 두고, 정부의 예산 수립과 집행을 1년 내내 감시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면서 예결위는 상임위원회 대신 비상설 특별위원회로 축소됐습니다. 정부가 예산안이나 결산을 제출할 때마다 한시적으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는 방식으로 역할이 줄어든 겁니다. 원래 120일이었던 예산안 심의 확정 기간도 90일로 줄었다가 1972년부터는 60일로 축소돼 반 토막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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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결위는 국가 재정에 대한 최종 심의와 의결을 하는 만큼 예결위 활동이 원활할수록 재정에 대한 심도있는 검토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결위가 특별위로 바뀌면서 활동기간이 1년에 두 달 정도로 축소됐고, 국가재정 운용계획 등 중장기 재정계획을 수립하는 단계에서는 아예 배제되면서 제 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게 됐습니다.

게다가 올해 첫 적용된 개정 국회법, 일명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국회의 예산심의권은 더욱 위축됐습니다. 회계연도 개시 30일전까지 여야가 예산안을 확정하지 못할 경우 정부안이 자동 부의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심사숙고할 수 있는 기간 자체가 줄어든 겁니다.

올해의 경우 심사 기일에 쫓기다 보니 예결위 전체회의와 계수조정 소위회의가 각각 7일씩 열렸습니다. 단순 계산하면 하루에 27조 원을 심사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국회 예결위가 손을 댄 삭감 또는 증액 예산은 ±3조 원. 전체 예산안 376조 원의 1%도 안 되는 금액입니다.

이 때문에 김현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예산에 관련된 국회 기능은 죽었다”고 단언했습니다.

김현미 의원은 “(예산안 심의를) 사업명만 보고 하는 거죠. 대부분. 예결위 전체 회의나 상임위에서 의견을 달지 않은 사업 같은 경우는 계수조정 소위원회에 보고도 안돼요.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보고되는 사업 자체가 전체 예산안의 10%도 안되기 때문에 수박 겉도 못 만지고 끝나는 거죠”라고 밝혔습니다.

매년 반복되는 예산안 부실심사.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말에만 반짝 심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년 내내 국회가 정부의 예산 편성, 집행 과정에 보조를 맞추어 심사를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동안 국회의 예산심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진척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지난해 여야는 ‘예결위 상임위화’라는 결론을 도출해 놓고도 상임위의 소관 부처 신설과 법안심사권 부여 등에서 이견을 보여 논의 자체가 중단돼 있는 상태입니다.

김현미 의원은 “국회가 ‘졸속 심사’의 오명을 피해갈 방법은 예결특위를 상임위화하고, 위원들의 임기도 1년에서 2년으로 늘려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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