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에 총동원된 외교라인
2018년 03월 30일 02시 31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개막된 1984년 7월 29일, LA 현지에서 날아 온 긴급 전문이 차기 올림픽 개최국인 한국 정부를 들쑤셔 놓았다.
올림픽 때문에 LA에 나가 있던 체육부 장관 이영호는 국제올림픽위원회 IOC 위원장 사마란치가 올림픽 기간에 LA 현지에서 남북한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회담을 자신의 주재 하에 열자고 제안했다는 소식을 본국에 급히 보고했다. 정부 관계 부처는 사마란치의 예상치 못한 제안을 접하고 부랴부랴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이영호 장관이 한국 시간 29일 저녁 청와대와 안기부, 외무부 등 관계 부처에 보낸 긴급 전문엔 사마란치의 회담 주선 제안 사실과 함께 체육부의 의견도 들어 있었다. 이영호는 우선 여러 측면을 고려해 사마란치의 제안을 수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전제하고,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정주영이 일본으로 갔다가 8월 7일 LA로 돌아오기 때문에 회담 일정은 7일 이후로 조정하겠다고 보고했다. 이어 남측 회담대표로는 정주영 위원장과 한기복 체육부 국제체육국장, 김종하 핸드볼협회장을 추천했다.
바로 다음 날인 7월 30일, 국토통일원 장관실에서 관계부처 실무대책회의가 열렸다. 안기부에서 차장, 3국장, 6국장 등 무려 3명, 그리고 체육부 차관, 외무부 정보문화국장, 청와대 홍 비서관 등이 참석했다. 2시간 가량 이어진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왔다.
-IOC 제의에 응한다.
-단, 홍보 상 불리점, Kumar(인도 출신 IOC 부위원장)와 북괴의 야합 가능성 등 고려해 형식과 내용을 극소화하고, 회담 성격이 아니라 회동 형식 부여, 8월 10일 이후 회동하고 가급적 1회로 제한한다.
전향적으로 IOC의 남북한회담 중재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한 체육부장관 이영호의 의견은 사실상 묵살된 것이다. 국토통일원 장관은 이런 회의 결과를 대통령 전두환에게 보고했다. 전두환은 다음 날인 7월 31일 친필로 다음과 같은 3개항의 지시를 내렸다.
전두환 친필 지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의 친필지시 메모는 안기부 관계자가 대거 참석한 전날 관계부처 대책회의 결과를 대체로 추인하는 동시에, 이를 뛰어 넘어 “북한작전에 말려들어 갈 것 같다”는 ‘분석’까지 곁들였다. IOC 위원장의 회담 중재 제안이 북한의 사전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또 친필 지시와는 별도로 구두 지시도 남겼다. “사마란치 위원장이 불쾌하지 않도록 지연시켜야 한다, 북괴는 사전 준비되고 계획돼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북괴는 외교전문가 파견이 확실시 된다, 우리도 전문가 보내야 한다, 지연방법으로는 LA 올림픽이 끝난 후 미국 이외의 제3국에서 하자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등이 주요 내용이다.
전두환은 또 “금일 밤 중으로 관계 부처 협의 통해 대안 마련 후 내일 외무장관 보고 시 안기부장, 외무장관, 통일원장관, 비서실장 등이 합동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정부는 전두환의 이 같은 지시를 토대로 8월 1일 안기부장, 외무부장관, 통일원 장관 등 관계부처 장관 회의를 열어 사마란치의 제안이 나온 지 3일만에 LA 현지에 있는 이영호 체육부장관에게 보낼 훈령을 확정했다.
8월 1일 당일 통일원 장관 손재식 명의로 이영호에게 전송된 훈령에는 당초 관계 부처 실무대책회의에서 논의됐던 “IOC 제의에는 응한다”는 전제도 사라진 채 LA 올림픽 기간 중에 3자가 만나는 것 자체가 북한에 악용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들며 회담 또는 접촉은 ‘불가’하다는 지침이 담겼다. 대신 올림픽이 끝난 후 미국이 아닌 제3의 장소에서 3자 접촉을 갖자고 대안을 제시하고, 그 접촉이 실현되는 경우라도 공식 회담 형식은 피하고 규모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손재식은 이 훈령에 ‘대통령 각하 말씀요지’라며 전두환의 지시도 첨부해 보냈다. LA 올림픽 기간에 남북한와 IOC 등 3자가 회동하면 한국선수단과 현지 교민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는 논리를 펴며 “여하한 경우라도 3자 접촉이나 회담 등에 응해서는 안 되며 이를 위한 예비접촉도 불필요함. 설사 IOC 위원장의 기분이 좀 나쁘더라도 LA에서의 3자 접촉에 응해서는 안 됨”이라고 강한 어조로 지시했다.
훈령 발송 다음 날인 8월 2일, 외무부는 LA 총영사에게 전문을 보내 LA에 체류 중인 북한 대표단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그들의 인적 사항도 파악해 보내라고 지시했다. LA 총영사는 바로 김유순 북한 IOC 위원, 장웅 북한 국가올림픽위원회(NOC) 위원장 등 LA를 방문 중인 북측 인사 10명의 인적 사항을 파악해 보고했다.
IOC 위원장 사마란치가 LA 올림픽 개막일에 맟춰 남북한 NOC 회담을 자신이 주재하겠다고 제안한 84년 7월 29일부터 한국정부의 대응책 마련 및 LA 현지 훈령 통보까지 숨가쁘게 전개된 닷새 간의 상황은 최근 우리 외교부가 비밀해제한 외교문서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하지만 LA 총영사가 올림픽 때문에 LA를 방문한 북한 측 체육계 인사들의 인적 사항을 보고한 8월 2일 자 문건 이후 사마란치의 제안과 관련한 더 이상의 외교문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84년 8월 7일, 외무부는 LA 총영사관에 8월 5일 자로 북한 대표단이 LA를 떠난 것으로 파악됐다며 정확한 출발일시와 항공편을 파악해 보고하도록 지시한 문건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이 LA 올림픽 기간에 나온 사마란치 제안 관련 마지막 문건이다.
정부가 여러 차례 관계부처 실무대책회의과 관계장관 회의를 열고, 전두환이 직접 IOC의 대화 제의는 “북한의 계획이며, 북한작전에 말려들면 안 된다”는 친필지시까지 하는 등 한바탕 호들갑 떨었지만 북한 대표단이 LA를 떠나면서 ‘북한 작전’ 상황은 매우 싱겁게 끝나버린 것이다.
30여 년만에 공개된 일련의 외교부 문서를 보면 당시 전두환이 남북대화 자체를 꺼려 했고, 언론자유가 보장돼 있는 미국에서 북한과 만나는 것에 큰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적어도 5공 시절에는 남북 대화의 막후에서 안기부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사실도 엿볼 수 있다.
“여하한 경우에도 LA에서는 남북이 접촉하지 말라”는 전두환의 지시대로 LA 올림픽 기간에 남북 간 회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84년 11월 6일, 북한의 김유순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88서울올림픽의 일부 종목을 북한에서 개최하자고 IOC에 공식 제의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IOC 측 관계자들과 접촉해 북한의 88올림픽 분산 개최 제의는 그 배경 및 저의가 극히 의심스럽다며 이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남한 관계자와의 대화에서 북한의 일부 종목 분리 개최 제의는 비현실적이고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남한이 먼저 ‘안 된다’라며 거부하고 나서지 말라고 충고했다. 북한이 먼저 제안한 이 제의를 결국 북한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 올 것이고,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로 인해 서울 올림픽 대회에 참가할 구실을 찾게 될 것이라는 복안이었다.
본인은 이 제안이 비현실적이고 실현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어떻게 북한이 세계 각국의 선수, 임원, 언론인들에게 국경을 개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이 문제는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는 바 남한은 침묵을 지키면서 "안된다"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IOC가 공식적으로 제안해 올 때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용의가 있다" 정도로만 답하면 되는 바 북한은 결코 이 제안을 수락하지 못할 것으로 확신한다.
사마란치가 제안한 IOC 주재 남북체육회담은 결국 85년 10월 8일에 스위스 로잔느 IOC 본부에서 열렸다. 사마란치 위원장이 남북한에 회담 개최 의향을 물어 온 뒤 17개월만이었다. 이틀 동안 열린 회담을 끝내고 대한체육회장 김종하와 북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진충국이 동석한 기자회견에서 사마란치는 회담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성과였다고 평가하며, 남한이 북한의 참가를 권유하기 위해 일부 종목의 예선 경기를 북한 땅에서 개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사마란치는 남북 화해협력 보다는 올림픽에 많은 국가가 참가하고 대회가 안정적으로 개최되길 원했다. 사마란치의 이런 바람은 87년 5월 8일 박세직 서울올림픽·아시아경기 대회조직위원장 및 김운용 IOC 위원과의 면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마란치는 대통령(전두환)의 임기를 연장해서라도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며, 올림픽 개최 6개월 전에 대통령이 교체되는 일정 때문에 한국 내 정세의 안정이 절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88서울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다. 북한에서의 일부 종목 분산 개최와 남북한 단일팀 결성도 이뤄지지 않았다. 84년부터 88년까지 4년 동안 IOC는 여러 차례 남북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결국 사마란치의 중재로 회담이 열리긴 했지만 논의된 것은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소련과 동구권 국가의 불참으로 반쪽 올림픽이 된 LA 올림픽을 겪은 사마란치에게 남북한 대화 주선의 목적은 88올림픽에 최대한 많은 나라가 참가하게 만드는 분위기 조성에 있었다. 하지만 남북한 정권은 서로 경계하고 불신했다. 회담을 해도 3자 모두 동상이몽이었다. 특히 전두환 친필지시 메모에 담긴 “북한의 계획이다. 북한에 말려들어 갈 것 같다” 같은 북한을 보는 인식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 냉전이 오래 전 끝난 이 시대에도 여전히 국회에서 거리에서 살아남아 있다.
취재 : 최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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