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㉓]"명예 회복? 난 불명예스러웠던 적 없습니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선언으로 당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당했습니다. 일터를 잃은 언론인들은 출판,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언론 현장을 떠난 그들 개개인의 삶은 남모를 설움과 고달픔에 시달렸습니다. 뉴스타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해직 이후의 생활 등을 담습니다. 이 릴레이 회고록은 기자협회보와 동시에 게재됩니다. 스물세 번째 글은 맹경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이 썼습니다. - 편집자 주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이라니! 한 생명이 태어나 50년이 지났다면 중년도 한참 지났을 시간인데 이렇게 빨리 지나갔나 하는 생각이, 아니, 한탄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역사적 소명, 언론의 책임 등등은 앞서 여러 선배들이 많이 쓰셨으니 나까지 보탤 필요가 없겠다.
그렇게 쫓겨나와서 동아일보사 건너편 국제극장(현 동화면세점) 골목 깊숙한 곳 여관에 동아투위 사무실이 생겼다. 칠판에 '서로 연락할 것', '지침' 등이 적혀 있는데 하루는 '배 차장님, O시에 여관에서 만나재요'라는 글이 쓰여 있어 폭소를 자아냈던 기억이 있다. 배 차장은 라디오 파트의 배동순 차장님이었다.
강제 해직 후 몇 달은 생활지원비 명목으로 돈이 지급됐으나 오래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선배들이 하는 독려의 말처럼 곧 다시 귀사해 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때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이제 생활이라는 삶의 현실이 다급하고 절실하게 다가왔다.
내가 소속된 동아방송 아나운서부의 전영우 실장과 김인권 차장께서 밤에 우리 집을 방문해 딸이 하는 자유언론 운동이 뭔지 잘 모르는 모친을 설득하고 갔다. 집에서는 난리도 아니었다. '아나운서라는 좋은 직업을 가진 애가 차분히 일을 하고 좋은 급여를 받으며 살 일을 왜 이리 시끄럽게 만드냐'라는 이야기였다. 집안 식구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동아방송 아나운서실의 추억

사실 나의 동아방송 입사 과정부터 좀 시끄럽긴 했다. 첫 직장이었던 기독교 방송에 대학 졸업 전에 합격해서 신입 아나운서로 지냈는데, 몇몇 선배를 중심으로 경영진의 부당한 업무 지시와 개인 취향의 단체 육성 등에 항의하여 투쟁이 시작되었으나 전력 약화와 전투력 부족으로 흐지부지 주저앉았다. 사내 분위기는 다음 달 봉급이 제대로 나올 지가 관건이라 아주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방송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내가 기독교 방송에 입사한 해에는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던 동아방송이 이듬해 신입사원 채용공고를 냈다. 운이 좋게도 실기시험과 필기시험, 면접 등 모든 과정이 공휴일에 있었다. 최종 면접 때 심사위원들은 '기독교 방송 퇴사에 아무 문제가 없겠는가? 1년 경력이 있어도 신입사원으로 모든 교육을 받는 것에 이의가 없겠는가' 등을 물었다.
△ 필자 맹경순(왼쪽)이 운영 중인 유튜브 채널 '맹모닝 상담소' 화면 갈무리
최종 면접을 보고 기독교 방송에 출근을 하니 난리가 났다. 동아방송에서 기독교 방송에 전화해 '이 사람이 응시했고 우리는 이 사람을 선택한다'라고 통보했다고 한다. 전 직장에서 겪은 합당하지 않은 대우와 근무 환경, 그리고 내 근무시간에 저촉되지 않는 상황에서 타사에 응시 지원한 것은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동아방송 입사 후의 교육은 재미있고도 우울했다. 당시 명 MC였던 고려진, 임국희 씨 등 다양한 외부 강사들의 체험과 조언을 듣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사내 강사들이 들어오면 여지없이 '전 직장에서 1년 경력이 있는데 왜 신입사원으로 다시 시작하려 하는가' 물었다. 구질구질하게 과거를 까발리는 것이 싫었다.
동아방송 아나운서실의 여자 선배는 강영희, 이경자, 이선미, 임수진, 홍명진, 한현수, 최남경 씨 등이었다. 남자 선배들은 거의 동아투위에 없었기 때문에 생략한다. 여자 선배들은 내 눈에 마치 파리의 예술인 같았다. 늘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연애를 했다. 집안 어르신 같은 간부 사원들이 있긴 했지만, 비교적 다양함과 특별함을 존중하는 분위기여서 동아방송의 생활은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물리적 환경은 그리 좋지 못했다. 부장, 차장을 비롯해 몇 사람만 개인 나무 책상이 있고 나머지는 책상 몇 개를 공유해 긴 의자에 둘러앉아 책을 보거나 방송 원고를 준비했다. 깔깔거리고 웃고 얘기하다가 담당 피디가 문을 열고 녹음하자는 사인을 보내면 스튜디오로 따라가는 것도 웃기는 풍경이었다. 아나운서실은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고, 일하는 것이 재미있고 중요하게 여겨졌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이 시작되면서 아나운서실의 분위기는 더 이상 하하호호 할 수 없게 됐다. 우리는 호소문을 갖고 사내 곳곳을 방문하는 2인 1조 팀을 만들었는데, 나는 현재 한길사 대표인 김언호 선배와 같이 다녔다. 당시 소신이 별로 없었던 나와 달리, 철두철미 자유언론 정신으로 무장된 분이었다.
그러는 사이 배신자도 생기고, 이탈자도 생기고, 직장을 새로 구해 출근해야 하는 사람도 생겼다. 간간이 투위 사무실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 녹음도 있었지만 그걸로 생활하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그 무렵 중앙일보사의 동양방송(TBC)에서 신입사원 모집이 있어서 응시해 봤다. 가능성은 별로 없었지만.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집안의 누가 '비선'으로 알아보니 최종 심사에서 '굳이 높은 데의 비위를 거스를 필요가 없다'라고 결론을 냈다고 한다. 그 시절 분위기를 보면 무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TBC는 동아와 청취율 싸움이 치열했던 곳이었다.
그때 동기 아나운서였던 황윤미가 무역회사에 들어가 근무하고 있다가 관련 업체인 한 수입 대행업를 알선해 접수 담당자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 회사의 사장은 과거에 동아일보 기자 입사시험에 응시했다 실패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프라이드'였다. '동아방송 아나운서가 우리 직원이야.'

'일인 무사'가 된 아나운서

하느님은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반대편 문을 열어두신다는 서양 속담이 있는데 실감하는 일이 생겼다. 숫자 맞추기에 진저리를 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저는 문화방송 라디오의 장명호 피디입니다. 맹경순 씨와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고 싶은데 의사가 있으신지요?" 가까운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나는 이미 TBC 일을 겪은지라 기대 없이 말했다. "저희랑 일을 같이 하고 싶으셔도 아마 안 될 거예요."
지금도 내가 '저희'라는 단어를 쓴 게 신기하다. 우리는 공동 운명체임을 깊이 깨닫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마 안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가 이미 크고도 무겁고도 무서운 공권력의 맛을 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사한 모습의 장 PD는 밝게 말했다. "그게 아니더라고요. 저희도 알아볼 만큼 알아봤는데 일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더라고요. 저희도 사전에 다 점검해 봤습니다."
그래서 나는 TBC 때의 일을 꺼냈다. 장명호 PD은 "아마도 방송사 측에서 미리 포기한 걸 겁니다"라고 말했다. 세상에, 내 입장에서는 해직이라는 무거운 체험을 하고 많은 것을 걸고서 응시한 것인데 방송사는 그저 권력에 알아서 기었다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고 이해는 한다.
△ 2015년 인터넷방송 국민TV 라디오 진행자 시절 필자(왼쪽)의 모습.
나를 무직의 어두운 시간에서 구해준 수입 대행업체 대표님께 심심한 사과를 드리고, MBC 라디오의 프리랜서로 방송을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동아에 있을 때 그렇게 신명 나게 일했던 방송이 벤치의 운동선수처럼 영 몸이 안 풀리고 잘되지 않았다. 동아방송 때 이규만 PD 선배는 늘 나에게 적극적 참여를 요구했다. 실제 생방송 전 나는 광화문 거리에 나가 오프닝 멘트를 생각하고 만들었다. 그렇게 내가 진행했던 교통 프로그램은 화제가 되었고 주간지의 취재 요청으로 '행운의 엽서'를 뽑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동아방송 아나운서부라는 소속이 있을 때는 편안했는데, 갑자기 '닌자' 같은 일인 무사가 되어 방송과 사교를 능란하게 처리하려니 일이 영 서툴렀다. 더구나 새 일터의 PD들은 프리랜서란 인사성 밝고 싹싹하고 많은 일들을 능숙하게 해주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이미 공권력에 뺨따귀를 맞고 한없이 작아진 나는 낯가리고 인사 잘 못하고 사교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일 년 반 정도를 견뎌준 PD들에게 감사하다.
그 무렵 큰 아이를 임신하게 되어 서로 편안한 작별을 하게 됐다. 나는 1976년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유일한 투위 소속 남자 아나운서다. 신혼집을 이사 갈 때마다 이른바 '담당'이 인사를 왔다. 인사라는 것은 '우리가 너희들이 이곳에 산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나쁘지 않은, 오히려 매우 정중한 사람들이었지만 돌아가면 소름이 끼치곤 했다. 우리는 저 사람들의 감시와 감독을 받고 사는구나 실감했다.
출산으로 6개월을 쉰 다음, MBC 라디오 부장이셨던 아나운서 선배 한현수 씨의 부군이 어린이 프로그램을 맡겨주셔서 재미있게 일했다. 또 동아방송에서 TBC으로 이직한 김정일 선배가 새벽 생방송을 함께 하자는 제의를 하셨다. 이전에 MBC 프로그램을 할 때 TBC 프로그램으로 옮겨오면 출연료를 더 주겠다는 제의도 있었는데, 그 지겨운 수입 대행업의 숫자 놀음을 끝내게 해 준 MBC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TBC 라디오의 새벽 6시 5분 생방송은 재미있게 진행했다. 일반적으로 녹음 방송이 나가는 시간에 시도한 새벽 시간대의 생방송은 반응이 좋았다. 생방을 마치고 드물게 새벽에 문 여는 서소문의 찻집이 있어서 자주 찾았다. 처음에는 30분 편성으로 시작된 프로그램이 나중에는 한 시간으로 연장 편성됐다. 낯가리고 사교에 능하지 못한 젊은 여성을 따뜻이 감싸주신 동양방송의 이기재 차장, 유성화 차장님께 감사드린다.

묻고 싶다, 자유언론 운동 당시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나

1980년 신군부 주도로 언론 통폐합이 일어났다. 신문사 11개, 방송사 27개, 통신사 6개 등 44개 언론 매체가 통폐합됐다. 1,000여 명의 언론인들이 해직되는 사태였다. 날이면 날마다 비분강개의 회식을 하며 슬퍼하고 분개하는 사람들을 보며 한편으론 '우리는 몇 년 전 더 참담하고 참담하게 당했답니다'하고 중얼거렸다. 5년 전 자유언론 운동 당시 당신들은 어떤 생각이었는가 묻고 싶었다.
상당수 민영 방송사의 인원은 KBS의 보직과 급여가 보장되어 수평 이동을 했다. 대한민국의 이른바 방송인들은 하루아침에 다 여의도로 운집하게 된 셈이었다. TBC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여의도 별관도 KBS가 접수했다. 물론 직장이 거대 권력에 접수되어 인질 내지는 포로로 잡혀가는 심정이라 참담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낯설고 불안한 환경에서 일하더라도 급여에는 큰 지장 없이 생업을 이어갈 수 있지 않았는가. 동아투위의 많은 희생을 생각한다. 스트레스로 신병을 얻어 삶을 마감한 선배들, 해보지 않던 일을 생계로 하면서 힘들게 살았던 선배들,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버티기에 삶은 너무 가혹했다.
TBC에서 진행하던 내 프로그램도 KBS로 옮겨갔다. '아침의 로터리'란 이름으로 TBC PD와 동아방송 PD와 같이 재미나게 일을 했다. 이 무렵부터는 동아투위에 대한 공권력의 적개심이나 보호 관찰도 좀 느슨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KBS도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포로로 잡아온 듯한 타 방송사 직원들을 정중히 대하고 언론 통폐합이라는 신군부의 거대한 프로젝트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역력했다.
△ 최근 필자 맹경순의 모습.
동아방송 선배 아나운서였던 남편은 매형의 소개로 접착 윤활제 수입을 하는 회사에 근무하다가 그 아이템을 인수해서 사업을 시작했다. 다른 남자 아나운서들은 한 명도 투위에 합류하지 않았다. 동아투위의 정신이 어딜 가겠나. 남편은 구매 담당에게 업계의 관행인 리베이트를 주지 않았다. 자신이 취급하는 물건이 품질도 훨씬 뛰어나고 가격 면에서도 월등히 싸기 때문에 문제없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회사의 가격이 비싼 것은 리베이트 관행의 비용이 반영됐기 때문이겠지.
구매 담당 직원들은 제품의 장점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과 상사들에게 떨어질 리베이트 액수가 관건이었을 것이다. 동아투위, 자유언론 운동의 정신으로 우리나라에서 사업을 하겠다는 사람, 참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물론 좋은 날도 있었다. 살림이 피어서 풍족하게 산 날도 있었다. 남편은 그렇게 사는 게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60세 생일을 맞기 몇 달 전 폐암 통보를 받고 두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동아에서 해직될 때만 해도 다시 직장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이 있었다. 물론 불안도 있었지만. 회사의 회유에도 안락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것은 남은 선배들과 동료 때문이었다. 자유언론이고 나발이고 그것은 뒷날의 영광이었다. 당장의 판단을 좌우한 것은 '과연 그들을 남겨두고 내가 안락을 택할 수 있는가'였다. 그것은 차마 못 할 일이었다.
나는 MBC, TBC, KBS, 그리고 다시 MBC 라디오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1990년 개국한 평화방송의 개국 멤버로 입사했다. 다시 프리랜서가 아닌 소속원으로 방송을 한다는 벅참이 있었다. 평화방송도 개국 다음 해 사측과 노조의 충돌이 시작됐다. 가돌릭 신자로 간부 사원인 나로서는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 지금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는 언론을 몰랐고 언론은 교회를 몰랐다.' 교회는 언론의 노동조합 운동에 너무 겁을 먹고 있었고 언론은 교회를 무시했다. 불행한 시간이었다.
△ 필자 맹경순.

먼저 떠난 이들에게 장하게 성장한 언론을 보여주고 싶다

얼마 전 구청에서 국가유공자로 월 10만 원을 지급하고 명예 회복을 해주겠다고 알려왔다. 담당 공무원에게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불명예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일이 없습니다."
성유보 선배의 사모님께서는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거(자유언론운동) 할란다" 하셨지만, 솔직히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내 양심으로, 내 판단으로 그렇게 했지만 너무도 크고 무거운 고통이었다. 이런 선택이 다시는 없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그 고통으로 지금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50년이 흘렀는데도 우리의 언론 환경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에 한탄한다. 우리가 바쳤던 희생과 고통이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던가. 앞서 세상을 떠나신 선배들께 장하게 성장한 언론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By
원고맹경순 동아투위 위원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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