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바이 잠금 해제] ②박정희 때 부정축재 김치열의 장남, 두바이 부동산 10여 채
2024년 05월 16일 18시 23분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 등과 함께 미국 재무부 금융범죄단속국(FinCEN)에서 유출된 ‘의심거래보고서’(SAR)를 입수해 국제협업 프로젝트 <美 재무부 첩보 유출(FinCEN Files)>를 진행했습니다. 아울러 유럽과 중동지역에서 활동하는 탐사보도기관인 ‘조직범죄와 부패보도 프로젝트(OCCRP)’가 입수한 국제 돈세탁 조직 ‘자랍(Zarrab) 네트워크’ 관련 데이터도 함께 분석했습니다. 뉴스타파는 2013년 <조세도피처 프로젝트>, 2016년 <파나마 페이퍼스>, 2017년 <파라다이스 페이퍼스>에 이은 네 번째 역외금융범죄 관련 국제공조 취재 결과물을 9월 21일부터 보도합니다. ①'김O삼'과 '강O희', 수백개 돈세탁 유령회사 임원 등재 |
지난 4월 우리 국책은행인 IBK기업은행이 미국 당국에 천문학적인 벌금을 내는 조건으로 기소 처분을 유예받는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 제목은 ‘한국 기업은행-기소유예 합의서’.
미국 자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 기소를 유예받은 대신 미국 연방검찰에 5천백만 달러, 뉴욕주 금융감독청에 3천5백만 달러 등, 우리 돈으로 1천49억 원이 넘는 벌금을 낸다는 게 이 합의문의 골자 입니다.
국내 은행이 자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로 미국 당국에 벌금을 낸 사례는 간혹 있었습니다. 외환은행이 10억 원대, 농협이 100억 원대 벌금을 낸 게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이번 기업은행의 벌금은 1000억 원대로 이전 사례와는 차원이 다른 사상 최대 규모입니다.
기업은행이 이렇게 천문학적인 벌금을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뭘까. 기업은행의 한국-이란 원화결제시스템을 통해 1조 원 넘는 이란 자금이 세탁되고, 달러로 환전돼 미국 제재 대상인 이란으로 다시 흘러갔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갑니다.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정은 지난 2009년 서울 송파구 한 오피스텔을 주소로 앤코래라는 중계무역회사를 설립합니다. 정 씨 등 5명의 등기이사 가운데 3명이 외국인입니다. 사무실 주소와 이사, 자본금 등 법인 설립요건을 갖췄지만 실체없이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회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정 씨는 회사 설립과 함께 오피스텔 1층에 위치해 있던 기업은행 지점에서 앤코래 회사 명의로 계좌를 개설합니다.
그리고 2011년, 두바이에 있는 회사의 건축 자재를 이란 소재 회사로 판매하는 중계 무역 거래를 꾸밉니다. 정 씨는 이런 위장 거래로 6개월 간 무려 1조1천억 원 가량의 이란 자금을 세탁해주고 170억 원 가량의 수수료를 챙겼습니다.
건축 자재 중계무역이 발생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정 씨는 한국에, 국제 돈세탁 조직은 두바이와 이란에 각각 회사를 세웠습니다. 정 씨 회사 앤코래는 두바이 회사의 건축자재를 이란 회사로 수출하는 송장, 계약서 등 중계무역 서류를 조작해 한국은행과 전략물자관리원에 제출했습니다. 국제 제재에 위반되는 물품을 거래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받고 한국은행에 신고를 해야 이란계 자금을 국내 은행을 경유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란 회사가 수입하는 것으로 꾸민 건축 자재 대금만큼의 이란계 자금은 한국-이란 원화결제 시스템을 통해 원화로 기업은행 앤코래 계좌로 들어왔습니다. 앤코래는 이를 달러로 바꿔 미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등 여러 국가 계좌를 돌려서 두바이 회사로 보냈습니다.
위장된 무역 거래여서 실제 건축자재의 수출·입은 일어나지 않았고, 출처 불명의 이란 자금만 달러화 무역대금으로 세탁된 겁니다. 이 과정에서 정 씨는 큰 돈을 벌었고, 기업은행도 거래 금액의 최소 3%에 이르는 환전과 송금수수료 수익을 거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당시 기업은행 본점이나 우리 금융당국은 별 사업실적도 없는 신생 회사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무려 1조 원대 외환거래를 했으니 이를 걸러내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돈세탁이 6개월 이상 진행된 2011년 7월에야 한국이 아닌 기업은행 뉴욕지점의 한 직원에 의해 포착됐습니다. 한국에 있는 앤코래 계좌에서 환전한 달러 자금을 국외로 보내려면 미국에 있는 지점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이 거래가 뉴욕지점 직원의 눈에 띈 겁니다. 이 직원은 한국 본점에 이 사실을 알리고, 한 달 뒤 미 재무부 금융범죄단속국(Financial Crimes Enforcement Network)에 ‘의심거래보고서(Suspicious Activity Report)’를 제출했습니다.
한국 검찰은 그로부터 1년 넘게 지난 2012년 9월 수사에 착수해 정 씨를 외국환거래법 및 관세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했습니다. 검찰은 기업은행 관계자들도 조사했지만 정 씨가 조작한 가짜 무역 서류에 속아서 거래를 허용해준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미국과 한국 수사 당국이 압수한 정 씨의 이메일에는 정 씨가 외화송금액에서 일정 비율을 기업은행 관계자에게 사례비로 줬다는 내용 등이 나옵니다. 하지만 검찰이 이 부분을 얼마나 철저하게 수사했는지는 불투명합니다.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기업은행 관계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사건이 불거지자 금융감독원도 2013년 조사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기업은행 관계자들이 불법송금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고, 내부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점만 드러났다고 밝혔습니다. 기업은행은 금융감독원 감사를 받았기 때문에 자체 감사는 따로 하지 않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기업은행과 우리 금융당국이 정 씨와 국제 돈세탁 조직의 수상한 거래를 기업은행 뉴욕지점 직원이 파악하기 전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주장은 쉽게 납득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정 씨와 돈세탁을 공모한 외국인들이 인터넷 검색만 해도 쉽게 수상한 인물들임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현재 폐업 상태인 정 씨 회사 앤코래의 등기부를 다시 살펴봤습니다. 이사로 등재된 외국인 3명의 이름을 검색했습니다. 모두 조세도피와 돈세탁 등 금융범죄에 연루된 적이 있는 인물로 확인됐습니다.
앤코래의 등기이사로 올랐던 영국 국적 세브킷 센서는 미국 당국에 수배된 투자사기 용의자입니다. 그는 조세도피처에 사모펀드를 만들었다는 뉴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이사인 스웨덴인 야콥 킨데는 영국 기업등록소에 40여 개 법인의 이사로 올라와 있는 전형적인 유령회사 프록시(Proxy, 대리인)입니다. 영국인 안토니 찰스 에릭 에만 나이트 또한 수십 개 법인의 임원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그도 프록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취재 결과, 정 씨가 꾸민 위장 중계무역 거래에서 건축자재를 수출하는 역할을 맡았던 두바이 회사 또한 전형적인 유령회사로 확인됐습니다. 회사 이름을 검색하니 사서함 주소만 나오고, 미국 수사 기록을 찾아봤더니 이 회사의 운영을 주도했던 후샹 호세인푸르 또한 수상한 인물이었습니다.
호세인푸르는 뉴스타파가 지난 2016년 ICIJ와 함께 취재했던 ‘파나마페이퍼스’ 데이터에도 나옵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란계 미국인 사업가 파하드 아지마와 함께 조세도피처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웠습니다. 이 유령회사 관련 문서에 등장하는 호세인푸르의 개인 주소는 이란 정부의 돈세탁에 협력해 미국 제재 대상에 올랐던 재벌 바박 잔자니 소리넷그룹(Sorinet Group) 회장이 두바이에 설립한 금융회사 소리넷커머셜트러스트은행 주소와 일치했습니다.
인터넷 검색만 해도 케네스 정이 한국에 설립한 앤코레는 이런 수상한 인물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겁니다. 더구나 앤코레는 중계무역의 근거 서류로
인터넷에서 출력한 건축자재 사진과 가짜 청구서 등을 만들어 제출했는데도, 기업은행이나 금융당국은 1조 원대에 이르는 희대의 국제 돈세탁 사건을 걸러내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IBK기업은행은 미국 당국에 1천억 원이 넘는 벌금을 내는 처지가 됐습니다. 국제 돈세탁 조직의 범행 통로가 됐다는 점에서 국책은행으로서의 국제 신인도도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기업은행에서 이 사건에 책임을 진 사람을 아무도 없습니다.
취재 | 김용진 홍우람 김지윤 이명주 |
촬영 | 최형석 정형민 오준식 |
편집 | 정지성 |
CG | 정동우 |
디자인 | 이도현 |
웹출판 | 허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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