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선풍에 ‘국정원 개혁’ 실종

2013년 09월 06일 05시 25분

현역 의원이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내란 음모 사건’은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과 국정원  전면 개혁이라는 사회적 의제를 완전히 집어삼킬 정도로 충격파가 컸다.

‘내란 음모 사건’이 발생한 8월 28일을 기준으로 국정원 관련 기사를 분석하면 이 같은 경향은 매우 뚜렷하다. 지상파 방송3사 메인 뉴스의 경우 내란 음모 사건 이전 8일동안은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을 모두 27건 보도했지만 이후 뉴스에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같은 기간 내란 음모 사건은 128건 보도했다. 이 기간 동안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돼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지만 일체 보도되지 않았다. 신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국이 완전히 뒤바뀐 셈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내란 음모’ 증거가 대부분  ‘5월 회합’의 녹취록에 근거하고 있어서 내란 음모죄가 성립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법조계의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또 국정원이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전격적인 압수수색을 서둘러 진행하면서 추가 수사의 여지를 스스로 축소하지 않았느냐는 지적도 있다.

물론 법적인 판단과는 별도로 통합진보당 일부 그룹의 행태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엄중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하지만 이 와중에 국정원 개혁이라는 시대적 의제가 묻혀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 또한 높다.


<앵커 멘트>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구속됐습니다. 전격적인 압수수색에서 구속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모든 이슈를 삼켜버렸습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졌습니다. 국정원의 정치적 의도에 모두 휩쓸려 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또 일부에서는 국정원이 제시한 내란 음모는 적용하기조차 힘들다는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헌정사상 초유의 현역 의원 내란 음모 사건.

그 실체는 무엇이고 숨어있는 배경은 무엇인지 김경래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기자>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

"저는 미안하지만 이석기 피의자를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으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 흔한 악수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적이기 때문입니다."

여당의원에 의해 이른바 ‘대한민국의 적’으로 규정된 이석기 의원은 결국 구속됐습니다.

통합진보당은 과거 공안사건들을 예로 들며 이번 사건 역시 국정원의 조작이라고 주장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오병윤 통합진보당 의원]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진보당 조봉암 사건, 조용수 민족일보사건, 다 아실겁니다. 다 무죄로 판결난 국정원의 조작들입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의 조작 주장과는 별개로 녹취록의 내용이 모두 사실로 인정된다 하더라도 국정원이 제기한 내란음모죄가 성립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이상규 통합진보당 의원]

"일명 RO라고 규정을 했는데 결성시기는 어떻게 되나요?"

(황교안 법무부 장관 : 계속 수사중입니다.)

"결성 시기는 시기 미상 또는 불상이라고 체포동의에 나와있는 건 알고 계시죠?"

(황교안 법무부 장관 : 지금 수사 중입니다.)

"결성 장소는 어딥니까."

(황교안 법무부 장관 : 수사 중입니다.)

"결성 인원은 몇 명입니까."

(황교안 법무부 장관 : 수사 중입니다.)

3년 여에 걸쳐 내사를 진행했다면서 조직 구성의 기본적인 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

"RO조직의 강령 제 1조가 뭔지 혹시 알고 있습니까?"

(황교안 법무부 장관 : 조문화 되어 있는 단계까지 아직 수사가 진척되지는 않았습니다만…)

국정원이 발표한 이른바 RO라는 단체가 내란을 음모한 중대한 범죄조직이라면 3년간의 내사끝에 확보한 녹취록을 바탕으로 전체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수사를 은밀하게 진행하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내용으로 보면 국정원은 조직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확보하지 못하고 갑자기 공개수사로 전환했고, 추가수사의 여지를 스스로 축소했습니다.

[김형태 변호사 ]

"기밀이 최고의 수산데 몇 년 씩 걸리는건데 겨우 5월달에 알아서 그 앞에 한 건 아무 것도 없더만요 보니까. 3년 수사했다는데 아무 것도 없고 다 5월달 회의 내용이더라고 더 익기를 기다려서 일망타진해야지 앞에 모여서 몇 사람 떠든 거만 가지고 다 까버리면 무슨 수사가 됩니까. 이거는 수사를 사실 직무유기라 생각해요. 국정원이."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체포동의 요청서는 모두 82쪽입니다. 이 가운데 내란음모, 내란 선동과 관련된 범죄사실을 설명한 분량은 35쪽. 이가운데 4쪽은 문제가 된 5월 회합을 준비한 배경 설명이고 나머지 31쪽은 당시 회합에서 이석기 의원 등이 발언한 내용입니다.

추가적인 압수수색 등에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내란음모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범죄사실은 언론에 공개된 녹취록이 아직까지는 대부분인 셈입니다.

이에 대해 정부는 현 상태에서도 내란음모죄가 성립한다는 입장입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

"내란 음모는 내란죄의 실행의 계획 및 내용에 관하여 두 사람 이상이 서로 통모 합의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행 계획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례입니다."

1999년 총을 훔쳐 현금 수송차량을 털어서 한탕하자라는 모의을 했던 군인 2명에 대해 대법원은 강도 음모죄와 관련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대법원은 형법상 ‘음모죄’가 성립되려면 2인 이상이 범죄 실행을 합의했어야 하는데, 이 때 합의라는 것은 '단순히 범죄 결심을 외부에 표시, 전달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며 '범죄 실행을 위한 준비 행위라는 것이 명백히 인식되고, 그 합의에 실질적인 위험성이 인정될 때' 가능하다고 무죄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호중 서강대 법대 교수]

"아주 디테일하게 예를 들어서 몇 월 몇 일 몇 시에 어떤 식으로 해서 어디에 가서 뭘 하고 이렇게 까지 나와있을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공격 대상이 뭐냐 그리고 언제 할 거고 어떤 방식으로 할거다, 라고 하는 거에 대한 합의가 도출돼 있었을 때 그럴 때 음모라고 하는 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공개된 녹취록을 보면 이석기 의원과 당시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역시 총기 탈취나 시설 파괴 등에 합의했다거나, 구체적인 범죄 실행을 준비했다는 대목은 없습니다.  이들에게 내란 음모죄를 적용하기는 힘들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호중 서강대 법대 교수]

"총기는 부산에 가면 있다더라. 폭약을 제조하는 방법은 인터넷에 있다더라. 이 정도의 의견 교환 정도잖아요. 그것도 아주 조악한 수준에서 의견 교환이고 전혀 구체화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정도 가지고는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그런 내용에 대한 계획에 대해서 구성원들 사이에서 완전한 합의를 이루었느냐 그건 절대로 아니죠. 내란 음모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하지만 내란 음모 사건은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고, 국기문란사건으로 거론된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지난 2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공판.

민병주 국정원 전 심리전단장이 댓글 사건의 당사자인 여직원에게 '선거도 끝나고 이제는 흔적만 남았네요. 김하영씨 덕분에 (대통령) 선거 결과 편히 지켜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실 등이 새롭게 드러났지만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국정원의 압수수색으로 내란 음모 사건이 표면으로 드러난 지난달 28일을 전후한 언론의 국정원 관련 보도를 분석해봤습니다.

KBS와 MBC, SBS 등 지상파 3사는 지난달 20일부터 8일동안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을 메인뉴스에서 모두 27건 보도했지만 내란 음모 사건이 터진 뒤 8일 동안은 단 한 차례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기간 이석기 의원 관련 방송 보도는 모두 128건이었습니다.

신문들도 마찬가집니다. 조선, 중앙, 동아, 한겨레, 경향 등 5개 신문은 지난달 21일부터 신문이 발행된 7일동안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을 129건 보도했지만 이후 7일동안은 28건으로 대폭 줄었습니다. 같은 기간 이석기 의원 관련 보도는 403건이었습니다.

국정원이 던진 ‘내란’라는 강력한 카드로 국정원 개혁이라는 화두는 사실상 실종됐습니다. .

통합진보당의 임기응변식 대응과 말바꾸기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국정원의 전격적인 압수수색 직후 통합진보당은 사실 관계를 무조건 부인하기에 바빴습니다.

[김재연 통합진보당 의원]

"전부 다 황당무계한 소설들입니다."

(CBS 김현정 앵커 : 그렇다면 김 의원님은 지난 5월 합정동, 이 모임에 참석한 적은 없으십니까?)

"네. 물론 간 적이 없습니다."

녹취록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국정원의 조작이라는 원론적인 내용만 반복했습니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내란 음모니 반국가 단체의 동조니 하는 국정원의 날조와 모략에 대해서는 한 치의 타협 없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녹취록에 대한 통합진보당의 구체적인 해명은 사건이 발생한 지 8일 만에 겨우 나왔지만 이마저도 설득력을 얻기 힘들었습니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실제로 분반토론 때 이 얘기를 한 사람은 농담으로 한 말인데 발표자가 마치 진담인 것처럼 발표했다고 합니다."

내란 음모를 인정하느냐 마냐를 떠나 녹취록에 등장한 이석기 의원의 언행에 대해 공당의 의원으로서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많습니다.

[김형태 변호사]

"본인이 (국회) 의원이라는 헌법 테두리 안에 있는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마치 지하에 있을 때나 서클에 있을 때나 학생운동할 때나 (똑같이)이런 식의 말과 행동을 하면 그거는 있을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이죠. 그러려면 없어야지요."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이 국회의원과 공당으로서 적절하게 처신하고 행동했는지는 법적인 문제와 별개로 국민들에게 엄중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 국정원 대선 여론 조작 사건이 잊혀져 버린다면 국정원 개혁을 위한 기회가 언제 다시 찾아올지 기약하기 힘듭니다.

뉴스타파 김경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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