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하라는 판결을 두 번 받기까지 30개월이 걸렸다. 해당 판결문에는 ‘공정성’, ‘투명성’, ‘국민의 참여’, ‘알권리’ 등의 단어가 많다. 헌법으로 보장하는 국민의 알권리와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보공개 제도의 중요성을 알리는 ‘정보공개청구 해설집’ 같은 판결문이었다.
뉴스타파는 지난 2022년 5월, 정부 기관과 지방자치단체가 매년 기획재정부에 제출하는 ‘예산요구서’를 공개하라는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 1·2심 재판부 모두 공개해도 업무에 지장이 없고, 오히려 국가 예산 편성의 투명성을 높인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기재부는 국민의 알권리 대신 대법원 상고를 택했다.
지난 20일, 정보공개 행정소송의 피고인 기획재정부 장관은 2심 패소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장을 냈다. 기재부는 ‘추후 제출하겠습니다”라며, 왜 상고하는지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 12월 20일, 기획재정부는 2심 판결에 불복하고 대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1·2심 재판부, ‘정부부처 예산요구서 공개하라’ 판결
이에 앞서 지난달 29일, 서울고등법원(제1-3 행정부, 재판장 이승한)은 뉴스타파와 세금도둑잡아라, 함께하는시민행동, 정보공개센터 등 3개 시민단체가 기재부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소송’에서 정부 부처(보건복지부)가 낸 예산요구서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2022년 5월, 소송을 시작한 지 30개월 만에 2심에서도 승소한 것이다.
재판부는 4쪽짜리 비교적 짧은 판결문에서 “(피고는) 예산요구서를 공개하게 되면 정부 부처가 보여주기식 예산 요구를 할 우려가 있다고도 주장하나, 오히려 정부 부처들의 무분별한 예산 요구를 방지하고, 책임 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예산 편성의 공정성, 객관성 및 투명성을 제기하는 순기능이 더 크다”며 뉴스타파와 시민단체의 손을 들어줬다. (1심, 2심 판결문 데이터 포털 보기)
앞서 지난해 4월, 1심 재판부(서울행정법원 제1부, 재판장 양상윤)도 “사건 정보(부처별 예산요구서)의 공개는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예산 편성에 있어서 국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데 기여”한다고 밝히며, 정부 예산요구서의 공개 판결을 내렸다. (관련 기사 : 법원, 기재부에 ‘정부부처 예산요구서 공개하라’...23개월 만에 승소)
당초 소송에서는 정부 기관 중 보건복지부, 국토교통부, 해양수산부, 농림축산식품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5개 부처가 기재부에 제출한 예산요구서의 공개를 요구했다. 하지만, 5개 부처의 자료를 모두 비공개 열람해 심사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든다는 등의 사유로 공개 대상을 보건복지부 1개 부처의 예산요구서로 줄여서 재판을 진행했다.
▲ 뉴스타파와 3개 시민단체는 2022년 5월, 기획재정부를 상대로 정부 부처 예산요구서의 공개를 요구하는 정보공개청구를 햤으나, '공정한 업무 수행 지장 등'의 이유로 비공개했다. 이후 뉴스타파 등은 기재부의 비공개 처분이 부당하다며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두 번의 예산감시 프로젝트와 달리, 이번 소송은 구체적 예산 집행의 부정 사용이나 오남용 검증이 아닌 기재부 안 ‘숨은 예산 권력’의 작동 기제를 드러내기 위한 작업으로 시작됐다. 뉴스타파와 시민단체는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기재부에 제출하는 ‘예산요구서’의 공개를 사상 처음으로 요구했다.
‘부처별 예산요구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었다. 각 부처가 낸 예산요구서를 기재부가 어떤 방식으로 검토·조정·수정하는지 파악한다면, 기재부가 어떻게 ‘정부 위의 정부’로 불리며 막강한 예산 권력을 갖게 됐는지 그 원천을 확인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번 소송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려면 우선 국가 예산의 확정 절차를 알아야 하는데, 다음의 세 단계로 이뤄진다.
1단계 : 국가재정법에 따라 매년 5월 31일까지 모든 정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예산요구서’를 만들어 기재부에 제출한다. 이때 부처별·지자체별로 내는 예산요구서는 국가 예산의 ‘초초안’에 해당한다.
2단계 : 기재부는 매년 9월 3일까지 부처가 보낸 예산요구서를 검토·조정해 ‘정부예산안’을 만들어 국회에 보낸다.
3단계 : 국회는 매년 연말까지 기재부가 보낸 정부예산안을 심의·본희의 의결을 거쳐 최종 확정한다.
그런데 1~2단계 과정에서 기재부에 제출되는 부처별 예산요구서 원안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기재부가 매해 5월 31일까지 정부 부처로부터 예산요구서를 받아서 그해 9월 3일 정부예산안을 확정해 국회에 제출할 때까지, 약 3개월간 기재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동안 베일에 싸였던 정부 예산의 1~2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기재부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검증하고 확인하는 것은 국가 예산 감시의 시작점이 된다. 이번 행정 소송이 ‘모피아 감시’, ‘예산 민주화 프로젝트’의 성격을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재부의 상고는 시민의 알권리 보장과 투명한 행정에 반하는 행위”
이번 소송에서 원고를 맡은 채연하 함께하는시민행동 운영위원장은 “기획재정부의 상고는 법원의 판결인 시민의 알권리 보장과 투명한 행정에 반하는 행위로써 대법원은 빠른 판결을 통해 예산에 대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행정소송을 대리한 하승수 변호사(뉴스타파 전문위원/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는 “기획재정부가 굳이 대법원에 상고까지 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기재부가 예산요구서를 공개하지 않으려고 국민 세금으로 변호사 비용까지 써 가면서 상고한 것은, 기획재정부가 비밀주의와 관료주의에 푹 빠져 있으며 개혁의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