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선언으로 당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당했습니다. 일터를 잃은 언론인들은 출판,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언론 현장을 떠난 그들 개개인의 삶은 남모를 설움과 고달픔에 시달렸습니다. 뉴스타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해직 이후의 생활 등을 담습니다. 이 릴레이 회고록은 기자협회보와 동시에 게재됩니다. 열네 번째 글은 정동익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이 썼습니다. - 편집자 주
우리 동아투위는 1975년 동아일보사에서 강제 축출된 이래 줄곧 재야 민주인사들과 호흡을 함께 해왔다. 투위 위원들은 언론인으로서 평소에 각계 인사와 폭넓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재야 민주세력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재야 인사들의 '사랑방'이었던 동아투위 집회
70년대와 80년대 중반까지 독재정권의 탄압이 심해 재야인사들의 공개적인 집회는 거의 없을 때였다. 그런 암흑의 시절 동아투위 모임이 유일한 민주인사들의 공개적인 집회였다. 긴급조치가 발동된 유신체제 아래서도 동아투위 행사는 거르지 않고 지속됐다. 재야 민주인사들은 우리 투위 모임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동지적인 결속을 다짐하곤 했다. 동아투위는 매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기념식과 송년회, 3월 17일 투위 결성식을 함께 모여 기념하였다.
그때마다 문익환·계훈제·박형규·이해동·백기완 등 재야인사, 이돈명·한승헌·황인철·홍성우·조준희 등 민주 변호사들, 성래운·리영희·김병걸·이우정·변형윤 등 해직교수들, 고은·남정현·이호철·신경림 등 문인들, 조선투위 동지들, 김한림 여사 등 구속 학생 학부모들, 나병식·김병곤 등 제적 학생들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이른바 반체제 인사들 3백 명이 넘게 한자리에 모이니 공안 기관원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 동아투위 동료들과 동아일보 규탄 집회에 참석한 필자 정동익.
동아투위는 모임 때마다 성명서를 발표하고 자유언론 실천과 민주 회복을 주창하였다. 모임의 전반부는 권력에 무릎 꿇은 제도언론을 비판하는 성토장이 됐고 후반부는 모두의 억눌린 마음을 달래주는 여흥과 화합의 자리로 이어졌다. 모임 때마다 사회는 내가 도맡아 보았다. 그래서 서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사회를 잘 본다고 ‘정동익은 사회주의자’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85년 민주화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결성될 때에도 재야 민주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동아투위 모임이 한몫을 하였다. 그 덕에 나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초대 감사, 서울 민통련 부의장 감투를 쓰고 재야인사의 길을 걷게 됐다.
1982년 서울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가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기념식이 끝나고 뒤풀이 장소에서 전주고 후배라면서 권형택·윤석인 등 제적 학생들 몇이 인사를 청해왔다. 우리는 시국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고향 전북의 민주인사들에 대한 지원과 관심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모임은 당국에서도 함부로 다루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 아래 우리는 회원 규합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다음 해 5월 12일, 서울 혜화동에 있는 중국집 진아춘에서 한승헌·고은 시인 등 80여 명의 회원들이 모여 전북민주동우회 창립대회를 열고 초대회장에 정동익, 총무에 소병훈을 선임하였다. 창립 이후 매달 첫째 수요일에 월례모임을 갖기로 하였는데 40년이 넘도록 이어 오고 있다. 전민동 회원들은 6월 민주항쟁에서 최근의 촛불투쟁에 이르기까지 창립 때 초심을 잃지 않고 꾸준히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오고 있다.
정보기관과의 악연, 내 발로 서장실에 찾아가다
나는 동아 해직 후 2년 가까이 놀다가 대한간호협회에서 창간하는 간협신보에 서권석 선배와 함께 입사하게 됐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에서 가만히 있질 않았다. 협회장에게 바로 해고하라고 압력이 들어왔다. 이에 분노한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떠들어 댔다. “내가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 들어간 직장인데 그것도 못하게 한다면 광화문서 분신이라도 해야겠다.” 얼마 후 중정 직원이 회사로 찾아왔다. 중간에 오해가 생겨서 그런 모양인데 없던 일로 하자고….
간협신보에서 5년간 편하게 직장 생활을 했지만 진로에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론을 대신할 수 있는 출판 쪽에서 활로를 찾기로 하였다. 김승균 씨의 일월서각 출판사 사무실에 책상 하나를 빌려 <도서출판 아침>을 차렸다.
첫 번째 낸 책이 송건호·임채정·김태홍 등 해직언론인 10명이 쓴 『민중과 자유언론』 이었다. 언론통제 실상과 언론운동이 나아갈 방향 등을 제시한 최초의 언론운동 지침서였다. 이 책에서 전국의 해직 언론인 명단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출판사를 차린 지 1년도 안 됐는데 깜짝 놀랄만한 원고가 입수됐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목숨과 맞바꾼 문제의 회고록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며칠 후 국가안전기획부(1981년 중앙정보부에서 개편) 6국에 근무하던 고교 동창이 난데없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정동익이 김형욱 회고록을 입수했는데 동창생인 자기 손에서 조용히 소리 안 나게 처리하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다.
나는 문제가 되면 법정투쟁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우리 회사와 부딪쳐 좋을 거 없다. 제발 부딪치지 마라”라고 경고하고 갔다.
중앙정보부에서 출판사 전화를 도청할 게 뻔한데 과연 출판이 가능할 것인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쇄소 제본소 지업사 등 출판 관련 업소들이 많은데 한 군데만 회고록 관련 전화가 와도 들통나는 거 아닌가. 나는 고민 끝에 친구에게 500만 원을 빌려 관련 업소들에 선금을 주며 회고록에 관한 이야기는 전화하지 말고 직접 만나 처리하기로 약속했다.
가슴을 졸이는 가운데 드디어 책이 완성됐다. 추석 이틀 전 전국 서점에 수천 부를 쫙 뿌리고 나는 줄행랑을 쳤다. 중정에서 경고까지 하였는데도 책이 나왔으니, 괘씸죄까지 붙어 즉시 체포 전담반이 편성되고 현상수배령이 떨어졌다. 현상금이 20만 원이라 했다.
한번은 김장수란 친구 사무실에 숨어 있는데 경찰들이 덮쳐왔다. 마침 밖에 나갔다가 그날따라 기분이 묘해 바로 들어가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니 검은 경찰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그날 잡혀가 엄청 두들겨 맞고 풀려났다.
1986년 봄이 되자 헌법 개정운동으로 정국이 요동쳤다. 공안당국은 시국에 대처하느라 김형욱 회고록 같은 건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관할 마포서장에게 자수하겠노라고 직접 통고하고 내 발로 서장실로 찾아갔다. 그 시국에 김형욱 회고록이 사회문제화되는 것을 꺼린 듯 즉결심판에 넘겨져 구류 열흘을 선고받고 유치장에 수감돼 있는데 나병식 등 운동권 출판사 사장 대여섯 명이 면회를 왔다. 모두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언론운동의 시작, 강당을 메운 분노한 시민들
그 당시 전두환 정부는 출판 탄압을 한층 강화하고 있었다. 서울 시내 대학가 부근 서점 14곳을 압수수색, 도서 51종 1,200여 부를 압수하고 서점 주인 6명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류형을 선고하였다.
<풀빛>, <일월서각>, <거름> 등 많은 출판사가 압수수색을 당하고 출판인들 연행이 줄을 이었다. 이러한 출판 탄압에 대처할 투쟁조직 결성을 논의하면서 나를 면회 온 것이었다. 나는 출감하자마자 출판운동 조직 건설에 참여했다.
마침내 1986년 6월 21일 서울 광화문 한글학회 회관에서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가 출범했다. 나와 <석탑출판사> 최영희 대표가 공동회장으로 선출되고 사무국장에 유대기 씨가 선임됐다. 한출협은 출판사에 압수수색이 들어오고 출판인이 연행될 때마다 항의 집회를 갖고 공동 대응에 나섰다.
80년대 권력에 통제된 언론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 출판은 언론을 대신해 권력을 비판하고 비리를 들춰내며 학생 노동 농민운동에 필요한 이론적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해직교수, 제적 학생들에게 일시적 일자리와 활동자금을 제공하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출판 운동 과정에서 구속 기소된 출판인 수는 약 100여 명, 판금 서적 300만 권에 달한다. 단일 부문 운동 중 그 피해 정도가 가장 심했다. 나도 출판과 관련 두 번 구속돼 옥인동 대공분실과 홍제동 대공분실을 거쳐 서대문 구치소와 의왕 구치소 신세를 진 일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 때는 내가 출판 분야를 대표해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참여하였다.
1988년 5월 한겨레신문이 창간될 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주력부대는 모두 한겨레신문 창간 멤버로 떠나고 <말>지 실무자들만 일부 남아 언협을 지키고 있었다. 그 당시 언협은 말지 발간 업무가 본업이었고 지금의 시민언론운동이라는 개념은 아직 없을 때였다.
△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활동 시절 필자 장동익.
그해 6월께 한겨레에 가 있던 신홍범 씨로부터 언협 결정사항이라며 언협을 맡아달라는 통고를 받았다. 나는 졸지에 송건호 선생님 뒤를 이어 언협 2대 의장을 맡게 됐다. 물론 취임식도 없었다. 폐허에 깃발 하나 들고 선 기분이었다.
우선 최장학·황헌식·노향기·정상모·심재택·조양진 씨와 실행위원회를 다시 꾸리고 공개채용 시험을 통해 <말>지 기자들을 보강하였다. <말>지를 내 이름으로 출판 등록하여 서점에서 공개적으로 판매토록 했다. 말지는 5만 부를 인쇄하는 매체로 성장, 재정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대학신문 기자 출신들을 간사로 영입하면서 언협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1991년 시민들에게 언론의 중요성을 교육할 언론학교를 개강한 것이다. 송건호·리영희·이상희·김중배·손석희 선생 등 막강한 강사진들이 흔쾌히 강의를 맡아주었다.
제도 언론의 왜곡 편파 보도에 분노한 시민 학생들이 언론학교를 매번 가득 메웠다. 나는 언론학교 교장으로서 수강생들에게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언론의 주인인 국민이 나서서 언론을 바로 세워야 한다”라고 역설하였다. 저녁 강의가 끝나면 꼭 뒤풀이를 하였는데 우리 간사들이 각 분반에 들어가 소주잔을 나누며 언협 회원 가입을 독려하였다.
△ 언론학교 교장 시절, 필자 정동익의 모습.
나는 전국의 대학과 도시들에서 시국강연을 하며 국민언론운동의 중요성과 언론운동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다녔다. 대학생들 앞에서 강연할 때는 왜 불쌍한 전경들에게 돌멩이를 던지느냐, 독재 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조선일보에 돌을 던지라고 힘주어 말하기도 하였다.
1993년 3월 5일 언협 제7차 총회에서 나는 언협이 해직언론인 단체에서 일반 시민들과 함께 하는 국민언론운동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선포하였다. 언협 최고 의결기구인 중앙위원회를 해직언론인과 <말>지 전현직 상근자, 시민 등으로 구성키로 결정한 것이다. 이 결정이 있었기에 오늘날 민주언론시민연합이 회비 내는 회원만 5,000명이 넘는 명실상부한 시민언론운동의 본산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팔십 평생을 살면서 이때처럼 열심히 뛰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억강부약'을 남긴 아버지, 묵묵히 한 길을 걷다
나는 민통련에 참여한 이래 전민련 전국연합 지금의 한국진보연대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재야단체를 떠난 적이 없다. 크게 운동에 기여한 건 없지만 우리 민족의 숙원인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머릿수 하나라도 보태자는 심정으로 묵묵히 한길을 걷고 있다.
내가 수십 년간 변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처 천양선 씨 덕이 크다. 어려운 고비를 많이 넘겼지만 한 번도 나의 기를 꺾은 적이 없다. 정말 고맙다. 그리고 매번 장학금을 받아 대학 등록금 걱정을 하지 않게 해준 유현·유미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다.
△ 필자 정동익.
말이 나온 김에 선친이신 정희남 씨 얘기를 하고 싶다. 나는 부자가 해직기자라는 진기록을 갖고 있다. 부친은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언론통폐합 조치를 강행할 때 전북일보에서 강제 해직을 당하셨다. 부친께서는 강직한 분으로 소문난 전북 언론계의 최고 원로셨다. 언론인은 항상 약자의 편이 돼야 한다며 나에게 억강부약(抑强扶弱) 정신을 심어 주신 분이다.
자식이 언론인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고 떳떳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하늘에서 미소를 짓고 계시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