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 재산공개제도, 확 뜯어고쳐야 시민 알권리 보장"

2023년 04월 04일 14시 00분

공직 감시가 주 임무인 탐사보도 기자에게 1993년은 각별하다. 그해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은 온갖 저항을 물리치고 본인과 그의 가족 재산을 공개한 데 이어, 그해 9월까지 대한민국 공직자들의 재산 공개가 잇따랐다.
파장은 엄청났다. 국회의장·대법원장·검찰총장 등 권부의 수장들이 줄줄이 물러났고, 장·차관급 공직자 10명이 옷을 벗었다. 국회의원 8명도 의원직을 사퇴하거나 탈당 또는 출당됐다. 고여 있던 공직 사회에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부동산 과다 소유 문제로 국회의장에서 물러난 박준규에 이어 이만섭 의원이 새 국회의장이 됐다. 1993년 9월 7일, 공개된 이만섭 국회의장의 재산 공개 내역이다. 지금의 공개 양상과는 사뭇 다르다. 이 의장 본인의 북아현동 자택의 상세 주소는 물론, 장남이 거주하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동·호수까지 상세히 기재했다.   
▲ 1993년 9월 7일, 이만섭 국회의장의 재산공개 내역 
지금은 이렇게 공개하는 공직자는 없다. 공동주택(아파트)은 아파트 이름만 공개하고 이하 주소는 비공개 처리한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서다. 법원은 더욱 강화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급 이항 공직자의 소유 아파트의 이름까지 지우고 공개한다. 판사의 신변 보호를 내세운 조치였다. 
1993년 당시에도 재산 공개를 둘러싸고 공직자의 거부감은 심했다. “공직자 가족의 재산까지 공개할 필요가 있느냐?”,“공직자도 사생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일갈했다. “명예가 아닌 부를 택하려면, 공직을 떠나라”

손자 두 명의 80만 원 예금까지 신고한 2003년 재산공개 

재산을 공개한 수많은 공직자 중 행정자치부 소속 장암 평안남도지사의 재산공개 내역을 소개한다. 2003년 6월 7일, 관보에 공개됐다. 명예직 도지사이고 재산 총액도 5억 원 안팎이어서 그다지 주목받는 재산은 아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게 있다. 바로 장남은 물론 손자 두 명의 예금까지 '성실 신고'한 부분이다. 손자1이 예금 68만 원, 손자2가 예금 12만 8천 원의 재산이 있다고 등록했다.  
▲ 2003년 6월 7일, 공개된 행정자치부 소속 장암 평안남도지사의 재산공개 
반면, 2008년 이후에는 이런 유형의 재산 신고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독립생계에 따른 고지거부 제도를 활용해 직계 존비속의 재산을 비공개하는 공직자들이 많아졌다. 고지거부는 공직자 가족의 사생활 보호 등을 이유로 도입됐는데, 재산 축소와 은닉으로 악용될 수도 있다. 또 허가 요건을 갖췄다고 하지만, 제대로 심사하는지 심사 결과가 공개된 적은 없다. 

올해도 여전한 고지거부, 국회의원 42.9% 전체공직자 42.7%

인사혁신처 공직윤리시스템에서 자주하는 질문(F&Q) 코너를 보면, 고지거부 질문의 조회수가 상대적으로 많다. 공직자들의 고지거부 비율도 꾸준히 높다. 뉴스타파 분석 결과, 2023년 올해 독립생계를 이유로 부모와 자녀의 재산 공개를 거부하는 전체 공직자와 국회의원의 비율은 각각 42.7%, 42.9%에 이른다. 국회의원 10명 중 4명이 고지거부를 한 것이다. 
고지거부를 없애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06년 이후 고지거부 제도를 없애거나 허가 요건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며 모두 10건의 공직자윤리법 개정법률안이 발의됐다. 모두 국회 본회의장 문턱도 못 밟고 폐기됐다. 2021년 발의한 법안 한 건이 계류 중인데, 내년 4월 21대 국회 임기가 마칠 때까지 통과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의원 10명 중 4명이 고지거부를 한 현실을 볼 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형국이다.    

재산공개 제도 뜯어고칠 곳 산적하지만, 제도 정비는 '하세월'

고지거부만 문제가 아니다.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가 올해로 30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재산 내역의 합계 오류, 직위 누락, 주소지 오기 등이 여럿 발견됐다. 뉴스타파 데이터팀이 찾아낸 것만 2023년 6건, 2022년 5건, 2021년 4건이다. 재산 등록시스템이 개선됐음에도 여전히 손으로 작업하며 기계 판독이 불가능한 형태로 공개해 온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이 약속한 ‘재산공개 DB 일원화’ 공약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뉴스타파 취재로 드러났다. 법으로 정한 재산공개라는 형식 요건을 맞추는 데 급급할 뿐, 공직자의 재산을 제대로 공개함으로써 청렴한 공직사회를 조성한다는 제도의 취지를 살릴 생각은 많지 않아 보인다.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가 자산 축적과 증식의 수단으로 통용되고 공직자 중 첫 신고자까지 나왔지만, 현행 공직자 재산 등록 신고 규정으론 가상화폐를 등록할 수 있는 재산 항목은 따로 없다. 결국 1천 원짜리 통장 계좌를 임의로 만들어 그게 가상화폐 2억 원을 의미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신고 방법까지 나오게 됐다.
이런 식의 재산 공개는 공직자의 재산 형성 과정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결과를 불러올 뿐이다. 법이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이, 공직자만 애를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합법이라도 제도가 본래 취지를 살리지 못한다면, 마땅히 바꿔야 

2014년 선거 때 권은희 후보가 공개한 재산 총액은 배우자 재산을 포함해 모두 5억 8천만 원가량이다. 그런데 신고내역에 당시 권 후보가 살던 주택 가액도, 전· 월세 보증금 내역도 없었다. 권 후보가 사는 곳을 도저시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권 후보의 배우자 남모 씨가 소유한 비상장주식에 있었다.
당시 배우자 남 씨가 소유한 두 개 법인은 남 씨가 대주주인 1인기업이었다. 이 두 개 법인이 다수의 상가와 오피스텔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권 후보가 신고한 재산내역에는 이런 내용은 없이 두 비상장법인 주식 액면가 1억 4천만 원을 기재했다.
이런 식의 재산 공개가 법 위반이 아니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공직자와 그 배우자가 실질 소유하는 부동산 규모가 어느 정도이고, 어느 지역에 몇 채를 가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들였는지, 그 과정에서 투기 등 불법은 없었는지 제대로 알 수 없게 된다. 공직자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재산신고 내용이라면, 공직자 재산공개제도 취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은 분명하다.
2005년에는 홍석현(중앙일보 사주) 전 주미대사가, 2008년에는 김병국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이 비상장법인 주식을 액면으로 신고했다가 재산 축소 신고 의혹을 받았다. 당시 김병국 외교안보수석은 서울 을지로에 시가 1천억 원대 빌딩을 소유한 법인의 비상장주식을 50%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재산공개 때는 건물 시가가 아니라 건물을 소유한 비상장법인 주식 액면가 6억 원만 신고했다. 지분으로 따져 시가 5백억 원대 건물을 가지고 있는 셈인데, 재산공개 내역에 건물은 없고 6억 원 주식만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실제 재산 규모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재산 공개 방식은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의 근본 취지를 훼손했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시 김병국 수석은 “법적으로 문제 될 게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6년이 지난 2014년, 김병국 수석의 주장을 권은희 의원이 이어받았다. 권 의원도 “현행 선관위 신고 절차와 규정을 따라 신고했다”며 법적으로 문제 없다고 주장했다.
제도가 본래 취지를 살리지 못한다면 바꿔야 마땅하다. 제도 허점이 발견되면 “위법은 아니다”, “법적으로 문제없는데 왜 그러냐”라며 어물쩍 넘어가서는 곤란하다. 결국, 2021년부터 비상장주식의 평가액을 실제 가치에 가깝도록 실거래가로 신고하도록 공직자윤리법 시행령이 개정됐다.    

6단체 연대해 "재산공개와 정보공개 제도개선 네트워크" 띄워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가 도입된 지 30년, 정보공개 제도가 시행된 지 25년을 맞는다. 공직자와 가족의 재산 규모와 유형, 형성 과정을 제공하고, 국민의 알권리와 참여를 보장하는 두 제도는 민주 사회를 받치는 근간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의 취지에 걸맞게 운용하려면, 손 볼 데가 한두 곳이 아니다. 그래서 뉴스타파를 포함한 6개 단체(경실련, 세금도둑잡아라, 참여연대,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함께하는시민행동)가 의기투합했다. 
▲ 재정넷은 4월 3일 경실련 강당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했다. 
 여섯 단체가 힘을 보탠 협업 프로젝트의 이름은 "재산공개와 정보공개 제도개선 네트워크"다. <재정넷>으로 줄여 부르기로 했다. 첫 연대 활동의 시작으로 어제(4월 3일) 경실련 강당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공직자윤리법의 전면 개정을 촉구했다.
주요 제도 개선 요구는 ▲재산등록 시 공시지가(공시가격)와 실거래가격(시세) 함께 기재 ▲재산등록 시 재산형성 과정 상세 기재 및 자산취득 자료 제출 의무화 ▲직계존비속에 대한 고지거부 조항 폐지 ▲재산심사 및 조사 강화 ▲재산등록 대상 및 공개 대상 확대 ▲재산 내역의 데이터 형식(기계 가독형) 공개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회의록 공개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의 직무 관련성 심사 정보 공개 ▲비상장주식 백지신탁 전수조사 공개 등이다. 
재정넷은 내년 4월 총선 때까지 재산공개 제도와 정보공개 제도의 개선을 위한 연대 활동을 펼쳐나갈 계획이다.
제작진
취재 및 데이터 김강민 연다혜 김지연 최윤원 임선응 박중석
촬영김기철
웹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

관련뉴스